학벌의 ‘유리천장’ 부숴버리다
학벌의 ‘유리천장’ 부숴버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고에 진학했던 소년이 외국계 기업 현지법인 CEO가 됐다. 실적이 뛰어난 그를 본사 임원에 앉히기 위해 이 회사는 “두 지역(국가) 이상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임원 선임 규정을 고쳤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이야기다. 수입차 부문은 자동차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뛰어들면서 비로소 하나의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는 말은 글로벌라이제이션과 통합니다. ‘따로 또 같이’라고 할 수 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일종의 전략적 제휴죠.”
좌우명이 명심보감에 나오는 ‘척벽비보촌음시경’(尺璧非寶寸陰是競: 한 자나 되는 구슬을 보배로 여길 게 아니라 한 치의 짧은 시간도 아껴야 한다)이라는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에게 글로벌 시대에 음미할 만한 동양의 경구를 구하자 맹자와 공자가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김 사장은 ‘척벽비보촌음시경’도 사자성어처럼 넉 자씩 나누어 풀이했다. 전자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우리 속담과 등치시키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 경구에서 그는 ‘실천’과 ‘시간 싸움’을 키워드로 골라냈다.
글로벌 기업 BMW그룹 본사 임원 입에서 동양의 고전이 줄줄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2000년 이후 BMW의 판매 대수는 꾸준히 늘었다. 지난해엔 7618대를 팔았다. 수입차 시장 1위. 렉서스·벤츠·아우디가 그 뒤를 이었다.
올해도 이런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수입차 시장을 평정한 것이다. 차를 수리하는 동안 다른 차를 무상으로 빌려주는 대차(貸車) 서비스, 차의 수리 과정을 대기실에서 화면으로 볼 수 있는 CCTV, 23분 출동 체계, 다양한 자동차 리스 등이 차별화된 병기였다.
그의 손에 의해 수입차 부문은 하나의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그를 아시아인 최초의 BMW그룹 본사 임원으로 임명하기 위해 이 회사는 ‘두 지역(국가) 이상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임원 선임 규정까지 고쳤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의 일이다. 도요타 등 다른 수입차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남은 브랜드들도 감원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BMW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있던 김 사장은 정량적 분석을 토대로 투자를 확대하는 게 오히려 재무적으로 타당하다고 본사에 보고했다.
“철수했다가 다시 진출하려면 비용이 더 많이 들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본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국내 딜러였던 코오롱그룹에 금리가 연 20%가 넘을 때 파격적으로 5%에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코오롱으로선 연간 40억, 50억원을 앉아서 버는 셈이었다.
본사의 파격적인 지원은 수입차 시장에 “BMW는 어려워도 한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전달됐다. 이 결정은 BMW가 한국 시장에서 약진하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이 사례를 현지화의 성공 케이스로 분석했다.
이 사례는 영어·중국어로 번역됐고 여러 나라 경영대학원에서 케이스 스터디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독일의 그룹 본사에서도 자연스레 ‘한국을 배워라’ ‘한국만큼만 하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어떻게 이런 판단을 하게 됐을까?
“국내에 자동차산업에 관한 체계적인 자료가 없을 때 일본 자료를 구해 공부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도 자동차산업이 된다는 확신이 생겼죠.”
김 사장은 늦깎이로 방송통신대학을 마쳤다. 덕수상고를 졸업한 지 22년 만이었다. 부친이 중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생활능력을 잃는 바람에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3남2녀 중 장남인 그는 고교 1학년 때부터 중학생들을 가르치며 살림을 거들었다.
불혹의 나이에 BMW코리아 임원으로 있으면서 방통대를 마친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에서는 국제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국제전략을 전공했다. 새삼 학위가 필요했던 건 박탈감 때문이었을까?
고교 때 은사 권유로 외국계 기업으로
“제가 현장에서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이 이미 책에 정리돼 있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쪼개 주경야독을 했죠. 제가 학부와 석·박사 과정에 다닐 때 우리 직원들은 몰랐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알고 깜짝 놀랐죠. 외국 기업은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사실 공사가 불분명하면 영이 안 서게 돼 있어요. 논문을 쓸 땐 하루에 2~3시간씩 잤어요. 수면 부족으로 회의를 하다가 졸기도 했습니다.”
한양대 경영대학원에서 받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지식 이전의 흡수 능력과 동기부여에 관한 연구’. 한국국제경영학회가 주는 올해의 논문 우수상을 받았고, 미국경영학회·미국국제경영학회의 인증도 받았다. 본사의 전략이 어떻게 현지 법인에 흡수되는지, 현지 법인에서 축적한 지식이 어떻게 해야 본사를 경유해 다른 현지 법인으로 이전되는지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동기부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했다. 회사 업무와 연관된 내용이었고, 본사에서도 그의 학위 취득을 반겼다. 그가 BMW코리아로 옮길 당시 “자꾸 공부를 더하겠다고 우겨 좋지 않게 봤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학벌사회의 ‘유리천장’을 그는 어떻게 뚫었을까? 덕수상고 3학년 때 대우증권의 전신 삼보증권에 입사한 그는 보충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하트포드라는 외국계 화재보험사로 직장을 옮긴다.
“제대하고 만난 은사님이 ‘너는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한국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역할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옮겼고, 그 후로 외국계 기업에만 있었죠. 직장을 옮기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은사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에게 학벌사회는 어떤 장벽이었을까? “길게 보면 세상은 공평합니다. 좋은 인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대학을 나왔건 안 나왔건 바른 성품과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사람은 세상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김효준의 성공 DNA는 무엇일까? BMW에 몸담기 전 그는 제약회사인 한국신텍스의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때 자신의 인사 서류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가 차장이었을 때 그의 전임자였던 미국인 사장은 일찌감치 그를 CEO감으로 낙점하고 있었다.
그 근거로 그는 세 가지를 꼽았다고 한다. 광범위한 업무 지식, 상식적인 사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광범위한 업무 지식에 바탕이 된 것은 호기심이었다. 재무통으로 숫자를 다루는 게 일이었지만 그 숫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왔는지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 보니 영업 쪽도 기웃거리게 되고 윗사람들이 짜는 사업전략에도 눈길이 갔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다 보니 업무영역이 넓어졌다. 이런 지적 호기심을 그는 학습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상식적인 사고방식이란 균형 잡힌 사고와 행동을 가리킨다.
매사에 상식적이다 보니 그는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통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다. 이 힘은 진정성과 솔선수범에서 나온다고 그는 믿는다.
“스스로 롤 모델이 되는 겁니다. 가장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스스로 보여주는 거예요. 진정성을 갖고 직원들을 대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향해 앞장서고, 거기서 얻은 보상을 나누려고 할 때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후 그는 지식·상식·소통 세 요소를 인재 발탁 요건으로 확장시켰다. “기술적인 것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향과 인성은 바꾸기 힘듭니다. 그래서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인지, 가치 지향이 회사와 일치하는지를 먼저 보게 됩니다.”
김효준 경영의 키워드는 고객, 인재 그리고 실천이다. 그는 모든 비즈니스는 고객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비즈니스는 휴먼 비즈니스라고 못 박는다. 그래서 그는 고객을 많이 만난다. 그는 또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래서 직원들을 해외로 많이 내보낸다. 인재 경영의 토대는 노사 간의 신뢰다. 직원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면 이 회사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회사는 회사대로 직원들을 잘 키우면 미스터 BMW, 미스 BMW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내장하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나 실천이다. 학력이 평준화된 고학력 사회에서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김 사장은 지난해 초부터 자동차산업이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신규인력 채용을 억제했다.
BMW그룹 본사도 지난해 11월부터 감량 경영에 들어갔다. BMW의 다른 현지 법인들은 뒤늦게 인력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리더의 시선은 오늘에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내일을 내다보고 시장의 요구에 맞춰 조직의 틀을 바꿔 나가죠. 일상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매니저와 리더의 다른 점입니다. 김효준 이후 BMW코리아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지금의 조직으로 대응할 수 있나? 부단히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는 전 직원을 매니저화하는 작업을 2~3년째 하고 있다. 비매니저는 주어진 일만 하고 책임에 둔감하다. 기안할 때도 적당히 하고 윗사람이 알아서 챙기겠지 한다. 직급과도 무관하다. 매니저 마인드가 떨어지는 부사장은 결재할 때 사장에게 책임을 미룬다.
이런 조직은 결국 한 명의 매니저와 그를 둘러싼 나머지 비매니저들로 구성되게 마련이다. 김 사장은 아침 시간에 고객을 많이 만난다. 최근엔 “BMW코리아의 딜러가 제공하는 서비스 수준이 미국과 격차가 난다”는 고객의 전화를 받고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그날 한 시간 내내 혼났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러나 밝았다.
“그렇게 털어놓고 나면 고객도 불만이 해소됩니다. 딜러가 아니라 BMW코리아 사장을 만나 의견을 개진한 사실에 만족스러워 하죠. 저도 고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고요.”
그는 아침에 사람을 만나면 더 효율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침에 만난 사람은 또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가 아침식사를 겸한 비즈니스를 중시하는 까닭이다. 조찬 경영이라고 할까?
미국에서 공부한 어느 여교수는 조찬을 함께하는 동안 BMW를 타던 유학 시절과 견줘 BMW코리아 서비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김 사장은 다음 달 딜러 300명을 소집해 그 교수의 조찬 강연을 듣게 했다.
점심·저녁 식사는 가끔 직원들과 소통하는 기회로 활용한다. 지난 연말엔 전 직원에게, 원한다면 사장과의 식사를 신청하라는 e-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신청자를 부서·직급 구분 없이 열 명, 스무 명씩 초대해 식사를 했다. 일주일 내내 약속을 잡지 않고 직원들과 식사를 한 적도 있다.
회사 창립일이면 100여 명의 직원에게 책을 선물한다. 각기 다른 책에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담은 편지를 동봉한다. 책값은 외부 강의료로 충당한다. BMW코리아에 몸담기 전 한국신텍스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신텍스 본사가 스위스 로슈에 매각되면서 한국신텍스도 한국로슈에 합병됐다. 127명의 직원은 일자리를 원했지만 회사에서는 정리하고 싶어 했다. 결국 돈 문제로 귀결됐다. 그는 회사가 자신에게 제공하기로 한 인센티브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놨다.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그는 이 돈을 내놓을 테니 회사에서도 더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을 n분의 1씩 나눠주고 그는 회사를 떠났다. 세계적인 제약회사들 간에 합병이 성행할 때였다.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분규가 1~2년씩 간 곳도 있지만 한국로슈는 한 달 만에 이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구조조정의 악역과 재무담당 임원 자리를 제시한 노스웨스트 한국법인을 뿌리치고 BMW코리아로 옮겼다. 한국신텍스 직원들의 재취업을 주선하기 위해 고용했던 헤드헌터가 다리를 놓았다. 그는 글로벌 리더는 시각도 마인드도 남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은 지속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조직입니다. 그 가치는 경제적인 부일 수도, 새로운 문화코드나 기술일 수도 있어요. 그 선두에 선 사람이 리더입니다. 그런데 100년, 200년 가는 기업의 리더는 공통점이 있어요. 창조적인 리더십의 소유자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이죠.”
그는 별무취미다. 젊은 날 사진에 빠진 적도 있지만 그마저도 끊었다.
“사람 만나는 게 취미죠. 자동차 파는 것도 취미고요. 몰라서 그렇지 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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