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은 사라지고 송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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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씨는 방청석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둘러 변호인석에 앉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난 5월 감사원장에서 물러난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 전씨는 부총리 재직 시절(2002년 4월~2003년 2월) 변씨를 부하직원으로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사원장 시절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해 검찰 수사를 촉발시켰다. 악연이라면 악연인 셈이다. 수의를 입은 변씨의 모습을 직접 보자 다소 당황한 듯했다. 실제로 전씨는 증언석에서 “한때는 부하직원으로 같이 일했는데 수의 차림으로 앉은 걸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렇다고 증언석에서까지 측은지심이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전씨는 검찰과 변호인 측의 심문에도 흔들림 없이 ‘외환은행 매각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전날 증인으로 법정에 선 현역 국회의원 신분의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2003년 2월~2004년 2월)는 검찰 조사 때와는 달리 피고인 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온 김씨가 다른 모습을 보이자 검찰은 당황했고, 변호인 측조차 예기치 못한 증언에 의아해 했다. 검찰은 변씨와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 등에게 배임죄를 적용했다. 국제결제은행비율(BIS)을 조작한 것도, 은행 인수 자격도 없는 론스타에 억지로 외환은행을 판 것도 변씨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성립하려면 당시 매각 책임자였던 두 사람은 실상을 제대로 몰랐고, 변씨가 의도적으로 두 부총리를 속였다는 사실이 증명돼야 한다. 특히 매각 결정 당시 현직이었던 김씨는 검찰 조사에서 “외환은행 매각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추진된 것으로 나는 그걸 승인해 준 것”이라고 진술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엔 변씨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날 재판에선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외환은행의 매각, 론스타와의 수의계약 등의 결정은 변 국장의 보고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사후적으로 확인한 내용들”이라며 자신이 중요 사항을 직접 결정했음을 분명히 했다.
“매각 결정엔 외환은행의 위급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 인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또 “변양호 국장이 (의사결정 권한을) 빼앗아 갔거나(편취), 관련 사실을 속였다(기망)고 생각하느냐”는 변호인 측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 같은 진술 때문에 검찰 측은 “재경부 후배를 배려해서인지 김진표 의원의 증언엔 위증 소지가 많다. 다시 심문할 기회를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전씨는 매각 당시 현직에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변 국장으로부터 외환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며 “매각이 추진되고 있었다면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에도 보고됐을 터인데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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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경제지표들이 2003년 4월부터 호전되기 시작했는데도 외환은행을 무리하게 팔았다는 검찰 측 심문에 김씨는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였을 뿐 하루하루가 고비였다”고 되받았다. 반면 전씨는 “2003년 2월 재경부를 떠났기 때문에 경제상항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면서도 “검찰이 제시한 자료를 보니 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되는지에 대한 증언도 달랐다. 김씨는 “론스타가 은행 인수자로 적합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전씨는 론스타의 은행 인수 자격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론스타가 서울은행 인수전에 참여했지만 하나은행에 빼앗긴 것은 시세차익을 노리는 사모펀드 특성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론스타의 인수 자격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했다.
다만 그는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BIS가 너무 낮다면 예외적으로 사모펀드가 은행을 인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8월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매각된 이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시민단체의 고발로 경제관료 20명이 검찰에 고발되고, 국회 국정감사만 일곱 차례 진행됐으며,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까지 진행됐다.
공판도 기네스북 감이다. 지난해 1월 15일 공판이 개시된 이후 2일까지 67회가 열렸다. 이것도 모자라 10여 차례의 공판이 더 진행된 후 이르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다. 이처럼 재판이 장기화하고 있지만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HSBC가 외환은행 인수에 성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승인권을 쥔 금융위원회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과 헐값매각 사건의 1심 결과를 지켜본 뒤 승인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종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바뀌었다. 금융위는 8월 중순부터 HSBC에 대한 승인심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론스타의 강공 자세도 주목된다. 론스타와 HSBC의 계약은 9월까지기 때문에 재판 결과를 기다리려면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론스타는 “금융위가 승인 심사를 개시한 것만으로는 이사회의 계약 연장을 끌어내기 어렵다”며 “9월까지 승인하지 않을 경우 시장에서 지분을 매각한 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절차를 진행할 것”이란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소송에서 론스타가 승소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산업은행 민영화 등과 관련해 외자유치가 다급한 정부로선 소송 제기 자체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금융위가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와 관련, 론스타 측의 자료 미 제출을 이유로 과태료 부과와 주식의 강제매각 명령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얼핏 론스타에 불리한 조치 같지만 강제매각 명령이 내리질 경우 론스타는 당초 계약대로 HSBC에 지분을 팔고 한국을 떠나면 된다. 9월 말까지 HSBC의 승인을 결정하지 못하더라도 주식매각명령만으로도 론스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결국 3년여에 걸친 ‘먹튀 논란’에서 한국 정부는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상처만 남게 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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