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이 활력의 힘
지방분권이 활력의 힘
인도네시아는 이제 멕시코·브라질 등 신흥 공업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요즘 자카르타의 모습은 아시아의 여느 21세기 신흥 도시와 다름없다. 쇼핑몰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교통이 막히며 현대식 오피스타워가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이 도시가 나락에 떨어질 뻔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눈부신 발전이라 하겠다.
장기 독재자인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1997~98년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 때만 해도 많은 전문가는 아시아 제3의 대국(인구 2억3500만 명)인 인도네시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오히려 단결되고 탄탄하며 상당히 민주적인 온건 무슬림 국가로 거듭났다. 경제가 워낙 잘나가다 보니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인 인도와 비교되기도 한다.
양국 모두 여전히 부패하고 혼란스러우며 고통스러울 만큼 복잡하다. 그래도 두 나라 모두 매력적인 신흥 경제다. 인도는 말 그대로 개발도상국 세계의 총아라 할 만하다. 다음은 인도네시아의 차례인가? 이 나라의 경제는 지난해 6.3% 성장률을 기록했다. 주요 증권거래소는 2003년 이래 세계적 수준의 실적을 올렸고,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는 세 배 가까이 늘어 4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모든 것이 개혁으로 대형 경제의 잠재력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1990년대의 인도를 빼닮았다. 다만 외부인들은 IT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성장률이 8%를 넘어설 때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산업은 에너지, 광산, 고무·야자유·코코아 같은 농산품이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애칭 SBY) 대통령은 뉴스위크와 단독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 같은 큰 민주국가가 근년에 10% 성장률을 기록한 중국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인도네시아는 많은 잡지의 커버를 차지할 것이다. 실제로 이 나라는 두 가지 점에서 이미 인도보다 나아 보인다.
1인당 국민소득(3348달러)이 3분의 1가량 더 높고, 정부의 긴축 재정 덕분에 세계적으로 낮은 외채 비율을 자랑한다. “동남아의 최대 경제가 10년의 구조조정 끝에 건강을 회복했다”고 CLSA 증권의 자카르타 법인 대표 겸 수석 연구원 니콜라스 카시모어가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 발전도 경제 발전만큼이나 극적이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육군대장 출신이지만 2004년 중반 당선 이후 가장 효율적인 민주 지도자로 변신했다. 4년 뒤 고질적인 테러리스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이 2004년의 쓰나미 피해를 딛고 일어서게 했다. 그보다는 인정을 덜 받긴 하지만 더 항구적인 조치는 정치권력의 분산 프로그램을 지원해 수백 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강화한 일이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는 포고령이 아닌 합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린다. 여기에는 약점도 있다. 중국처럼 대규모 국가 개발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유도요노는 이렇게 말했다. “지자체가 정부 프로젝트에 찬성하지 않아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같은 민주주의에서 변화·개혁·저항은 정상적이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정당들은 경제정책, 부패 추방의 필요성, 법치주의 개선, 정부의 능률 향상 등에서 기본적으로 뜻을 공유하고 있다. 자유언론, 공정한 법원, 유권자들이 뽑는 입법부 등 핵심 민주제도는 매우 튼튼하며 과거 막강한 권력을 구사했던 군부도 대체로 정치에서 손을 뗐다. 한편 지방자치가 변두리 지역의 경제발전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동남아의 전형적 모델과 대비된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홍콩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지닌 잠재력의 규모를 이해하거나 이 나라에 자카르타 말고도 얼마나 많은 것이 더 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카시모어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GDP 가운데 수도권이 차지하는 부분은 15%에 불과하다. 아시아 다른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작은 비율이다.
인도네시아는 수도권의 경제적 비중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처럼 크지 않다. |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멀리,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가를 떠올린다면 이 나라가 이룬 성취는 더 인상적이다. 10년 전 수하르토의 신질서(독재자 일당에 절대 권력을 부여한 고도로 중앙화된 체제)가 무너지고 극심한 금융 붕괴가 이어지면서 IMF 체제를 맞았다. 인도네시아는 또 분리독립주의자들의 격렬한 저항, 기독교-무슬림 폭력사태, 2002년의 발리 폭발사고로 대변되는 이슬람 급진주의를 맞았다.
나라가 통째로 무너질 듯이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국립대학의 경제학자 앤드루 매킨타이어와 아시아재단의 더글러스 라메이지가 최근 보고서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 관측통들은 인도네시아를 “인도·멕시코·브라질처럼 국민소득이 중간 수준인 대형 민주주의 개도국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도전과 씨름하는 정상적인 나라”로 보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는 여타 국가들보다 오히려 발전했다. 지방분권의 경우를 보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방·치안·재정·외교·사법제도를 감독한다. 그러나 인도 정부와 달리(2001년과 2006년 통과되고 유도요노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두 차례의 ‘빅뱅’ 개혁안 덕분에) 대부분의 나머지 통치행위는 33개 지방과 500개에 이르는 지자체와 협의해야 한다.
그 지자체들에서는 선출직 지도자들이 정책을 세우고 전체 공무원의 3분의 2를 관리하며 학교와 경제발전 등 모든 것을 감독한다. 세계은행의 연구원 볼프강 펭글러와 베르트 호프만이 곧 출간될 보고서에서 설명하듯이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중앙화된 나라에서 분권형의 나라로 바뀌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돈의 흐름을 살펴보면 된다. 2001년 시행된 새 회계제도 아래 각 지역은 국가 예산의 막대한 몫을 배정받아 어느 정도 자기네 입맛대로 쓸 수 있다. 가난한 오지가 머릿수로 따져 가장 많은 돈을 받는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자원 개발로 얻는 세입을 정부와 나눠 갖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지자체들이 쓰는 돈은 전체 공공지출의 36%로 모든 개도국의 평균치 14%와 비교된다. 각 지역은 자기네가 원하는 정책목표를 따로 추진해도 된다. “이것은 진정한 혁명”이라고 이 나라에서 세계은행의 지방자치 계획을 지휘하는 에르만 라만이 말했다. 진취적 지도자를 둔 지역은 실험장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혁신적인 부패추방, 보건, 경제성장 계획들이 출현했다.
한편 SBY는 거시경제적 질서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그 과정을 가능케 했다. 그가 지방자치를 지원하자 분리독립주의, 급진주의, 지역사회의 폭력은 발을 붙이지 못했다. 지방의 개척자 가운데 가마완 파우지가 있다. 2001년 웨스트수마트라의 솔록 지역에서 권력을 쥐자마자 불투명하고 복잡한 과거의 관청과 브로커 조직망을 대체하는 원스톱 행정 서비스센터를 만들었다.
부패 근절의 수단으로 모든 행정 서비스를 한 지붕 밑에 모아 정액 수수료를 명시하고 자동납부를 촉진하며 신속봉사를 보장하자는 개념이었다. 그것이 주효했다. 그 뒤로 이 모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부패가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크게 줄었다고 보고했다. 혁신적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명성을 얻는 지방 지도자도 있다.
관광지 발리섬의 아홉 개 섭정 통치구 중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다스리는 게데 푸트라야사는 만인 의료보험과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걸고 2001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무상교육은 상대적으로 쉬웠다(그가 월사금 5000루피아를 면제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방 예산의 범위 안에서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옛 체제에선 자금이 병원과 지방 관리들의 몫이었고 이들은 뇌물을 주는 회사의 약품을 구입해 쌓아두곤 했다. 푸트라야사의 혁신은 각 가정이 병원에서 실제로 제공받는 서비스를 보상하는 방식의 무료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것이다. “크게 절약되는 돈은 없지만 모두가 보험 혜택을 받으며 더는 부패가 없기 때문에 훨씬 더 능률적”이라고 푸트라야사가 말했다.
그런 개혁이 경제성장을 자극했다. 푸트라야사의 의료보험과 교육 계획(아울러 일거리가 부족한 농민을 일본에 보내는 취업알선 프로그램)으로 이 지역의 빈곤율은 4분의 1로 줄어든 고작 5.5%에 그쳤다. 지방자치의 개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세계적 농산품 붐의 큰 수혜자가 되기도 했다.
CLSA의 계산에 따르면 4대 작물(고무·코코넛·야자유·코코아)의 총가격이 2000년의 23억 달러에서 2008년에는 190억 달러(추정치)로 올랐다. 술라웨시섬의 가난한 고론탈로 지방의 주지사 파델 무하마드 같은 지도자들 덕분이다. 그는 농업 컨설턴트 팀을 배치해 선거구 유권자들을 이 나라 최고의 옥수수 재배농으로 바꿔놓았다. 보조금을 통해 농민에게 종자·비료·임대 기계를 제공했다.
작물 생산을 늘리는 마을 지도자에게는 현찰로 상금을 줬다. 2002년 이후 고론탈로의 빈곤율은 49%에서 29%로 줄었다. 물론 지방분권에 문제도 있다. 분석가와 감시단체들은 500개 지자체의 지도자 가운데 뛰어난 이들이 유도요노 집권기에 들어서 극소수에서 50명 정도로 늘었지만 이들은 국가적 개혁과 프로젝트를 봉쇄하는 데도 가끔은 특출난 능률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발전이 “혁명적이지 못하고 점진적”이라고 라메이지가 말했다. 예컨대 자카르타를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와 잇는 트랜스자바 고속도로는 2009년 완공을 목표로 2004년 착공했지만 지방의 반대에 부닥쳐 10% 공정밖에 진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이미 동남아와 이슬람 세계에서는 안정의 등대 역할을 한다.
그들의 반테러 캠페인(인도네시아는 급진적 종교학교를 폐쇄하고 효율적인 테러 대항 부대를 설립했으며, 의심스러운 세포를 강경 단속하면서도 인권 유린은 피해 갔다)은 이 지역에서 귀감으로 여겨진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인구대국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맹목적 신앙, 불관용, 극단주의의 대안을 예시했다는 점에서 모로코에서 민다나오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 시사하는 바 크다.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보는 급진주의의 무풍지대는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온건하고 관용적인 나라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유도요노가 말했다. “그것이 문명의 충돌을 막아준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내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할 공산이 크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분석가들은 정책의 급변을 예상하지 않는다. 자카르타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현재의 개혁 청사진을 찬성하기 때문이다. 인도조차 중국을 따라잡을 방법을 놓고 그런 식의 안정적 합의를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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