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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피부색과 출신 국가에 민감한 사회

[Seoul Serenade] 피부색과 출신 국가에 민감한 사회

나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1995년 그곳에서 필리핀에 영어를 배우러 왔던 남편과 만났다.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나는 어학원에서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강사와 학생의 신분으로 만났다가 사랑이 싹터 연인 사이가 되고, 부부가 되고, 결국 이듬해 한국에 오게 됐다. 이른바 국제결혼 여성이다.

내 한국 이름은 남지희. 한국 국적을 취득한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11세인 딸을 두고 경남 창원의 어느 지붕 아래 오순도순 살고 있다. 12년 전 한국에 대한 내 첫인상은 밝았다. 청결한 거리, 풍족해 보이는 사람들, 현대식 빌딩과 도로들…. 하루 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필리핀의 현실과는 여러모로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그 호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한국어를 하지 못해 의사소통과 운신이 불편했다. 그때만 해도 거리에는 영어로 된 이정표가 드물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제3 세계에서 온 외국인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했다. 일부 한국인은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퉁명스러운 반응부터 보였다.

택시를 타면 다른 택시를 이용하라고 떠밀리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기가 먹을 우유 한 통을 사는 일도 내게는 전투처럼 여겨졌다. 그 즈음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 갈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마치 내 신세가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차츰 안정될 무렵 나는 필리핀에서 줄곧 해왔던 영어강사 일자리를 알아볼 참으로 창원 시내에서 꽤 이름난 영어 어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내 목소리를 접한 어학원 대표는 금세 호감을 보이며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정작 학원에서 만난 그는 실망하는 얼굴빛이 역력했다.

그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여성을 기대하기라도 한 건가? 동남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영어강의 능력이 의심 받고, 결국 보수도 백인 강사들보다 30%가량 적은 금액을 제안 받았다. 당시 그 학원에는 원어민 강사 7∼8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예외 없이 하얀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들이었다.

나는 보수보다는 일단 한국 사회 안으로 뛰어들어 활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달갑지는 않았지만 학원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강생들의 반응이 좋았던지 두 달 후부터 보수가 조금씩 올랐다. 하지만 내가 그 학원을 떠났던 6개월 후까지 백인 강사들의 보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필리핀의 대학원에서 어학을 전공했고, 현지에서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직접 가르쳤다. 결코 능력에서 밀렸다고 보기 어렵다. 단지 선입관 때문에 이곳에서 홀대 받는다고 여겨졌다. 10년 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정은 요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한국의 외국어학원에서 강의하는 필리핀의 후배들에 따르면 백인과 차별대우가 여전하다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강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면 몰라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는데도 피부색깔과 출신 국가에 따라 보수에 차등을 둔다는 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다. 이처럼 일부 한국인은 ‘차이’를 ‘차이’로 받아들이지 않고 차별과 괄시로 되돌려주는 일이 적지 않다. 필리핀에서 왔다는 이유로 ‘마닐라에도 고층빌딩이 있느냐’ ‘승강기를 아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았다.

심지어 ‘바나나 말고 먹어본 과일이 있느냐’고 비아냥댄다. 어떤 이들은 내가 돈을 벌거나 혹은 특정 종교단체를 통해 한국에 왔는지를 묻는 이들도 있다. 무지에다 무례함까지 더해질 땐 말문이 막힐 뿐이다. 동남아 여성들에게 한국 남성과 국제결혼은 가난을 벗으려는 방편이 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뭐가 문제인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름답고 권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과 2세들의 보다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생면부지의 나라에 정착한 외국인 여성들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국제결혼 가정이 크게 느는 요즘은 이런 무례한 일이 많이 줄었으리라 생각한다. 국제결혼 여성이 늘면서 고령화와 공동화에 직면한 농촌 공동체에는 생기가 감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많은 외국인 여성이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직접 만나는 외국인 여성도 상당수는 고달픈 삶과 무수한 난관에 부닥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이 양육과 시부모 봉양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여성에게는 더 나은 삶을 향한 꿈이 환상에 그치기도 한다. 감히 말하자면 사랑 때문에 국제결혼을 한다면 환상이 깨질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돈 때문이라면 결혼생활은 이내 실망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의 외국인 여성들의 삶은 유리그릇과도 같다.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한마디가 이들에겐 일상의 스트레스요, 삶의 고통이 될 수 있다. 한국인들이 그 점을 사려 깊게 헤아린다면 그들의 어깨도 조금은 가벼워질 듯하다.

[필자는 창원대 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같은 대학에서 영어회화 시간강사로 일한다. 그녀는 또 창원 소재 경남 외국인노동자상담소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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