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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 온천’이 마을의 보약 됐다

‘보양 온천’이 마을의 보약 됐다


유후인의 전형적인 일본 시골 풍경.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유후인(由布院) 역사를 나서자 해발 1584m의 유후다케(由布岳)가 앞을 가로막는다. 분고 지방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명산. 유후인 거리 어느 곳에서나 이 휴화산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랜드마크다. 유후인은 1000m 이상인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오이타현 유후(由布)시 유후인. 2005년 유후시로 통합될 때까지는 유후인정(町)으로 불렸다. 유후인정 의회는 1990년 5층 이하의 건물만 지을 수 있다는 내용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분지의 어느 지점에서나 유후다케의 경관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와노 이즈미 유후인온천관광협회장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지금의 유후인은 없다”고 말했다. 개발 붐을 타고 고층 건물이 난립해 다른 도시와의 차별성을 상실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적어도 지금 같은 한적한 산촌 마을로 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조례가 제정되기 전인 1988년 일본은 버블 경제가 한창이었다.

당시 리조트법에 따라 유후인에 리조트 3600실 정도가 지어질 예정이었다. 유후인의 가구 수를 웃도는 대규모 개발이었다. 외부의 대기업 자본이 참여했다. 이런 움직임에 맞서 유후인의 민·관은 건물의 고도를 제한하는 한편 대형 개발은 사전에 주민 동의를 얻도록 조례에 규정했다.

유후인의 5가지 성공 비결
1. 민간이 주도한 민·관 협력
2. 벳푸와의 이미지 차별화
3. 유후인 자체의 브랜드화
4. 지역산업과 연계를 통한 지속적인 지역 살리기
5.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위기관리 능력
개발에 반대하는 의견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개발에 반대하는 측과 찬성하는 측이 선거에서 맞섰다. 유후시 관계자는 “주민들 간에 이해가 상충해 갈등이 있었지만 주민들이 개발에 반대하는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일단락됐다”고 말했다.

유후인은 규슈 오이타현의 한가운데 있는 면적 128㎢의 작은 마을이다. 인구는 약 1만2000명. 관광업 외에 농업·공업·상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1960년대 50%에 달했던 농업 종사자가 30여 년 만에 10%로 줄었지만 관광업을 중심으로 서비스업이 급성장해 인구 감소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구와노 회장은 “관광업이 지역의 다른 산업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관광업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70년대 연간 100만 명 선이던 관광객은 2000년대 38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이 중 100만 명 가까이가 숙박 관광객이다. 관광 소비액은 65년 이후 30년 만에 47.4배(95년 146억1821만 엔)로 급증했다. 버블 경제 붕괴 후에도 유후인의 관광객 수는 별 변동이 없다.

유후시 관계자는 “무리한 성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이 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유후인은 경관이 빼어난 온천 관광지다. 온천과 경관은 유후인을 압축하는 두 개의 키워드. 온천의 원천 수는 인근 벳푸(別府)시에 이어 일본에서 둘째로 많다. 용출량은 전국 3위. 유후인에서 버스로 약 50분 거리에 있는 벳푸는 단체 여행객이 주로 찾는 온천이다.

회사 일의 연장으로 대형 버스를 타고 단체 방문한 남자들이 마시고 떠들다가 돌아가는 관광지다. 벳푸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후인 관광업계는 여성 관광객에게 주목했다. 일례로 여성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화려한 네온사인을 규제했다. 온천 관광지가 빠져들기 쉬운 유흥가 분위기를 제거한 것이다.

남성, 밤, 대형 여관, 유흥가 등이 벳푸의 이미지라면 유후인은 여성에게 친숙한 문화의 거리, 낮에 관광하고 밤엔 민박에서 쉬는 관광지로 차별화했다. 때마침 일본의 버블 붕괴로 사람들이 가족 단위의 여행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온천 관광을 하는 사람들은 온천지의 성격도 고려하게 됐다. 여행의 트렌드가 바뀐 것이다. 유후인의 이런 전략은 주효했다.

유후인 거리에서 만난 여성 관광객 노구치 유카리(32)는 “유후인에 처음 와봤는데 벳푸보다 좋다”며 “다시 찾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40대 중반의 다른 여성 관광객도 “유후인은 처음이지만 온천의 질이 벳푸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그 역시 “다시 오고 싶다”고 덧붙였다. 80세가량의 한 할머니는 “벳푸보다 조용해서 좋다”고 한마디 했다. 유후인 거리를 안내한 가이드 하지 게이시는 “유후인의 강점은 가족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후인 역에서 바라본 명산 유후다케.



가족 단위로 찾는 관광지

유후인은 1955년 인근의 유노히라와 합병돼 유후인정이 된다. 유후인의 오늘은 초대 정장이었던 이와오 히데카즈가 그 초석을 놓았다. 그에 앞서 1952년 댐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청년단장으로 있던 이와오는 댐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때의 활약으로 초대 정장이 된 그는 보스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서른여섯의 젊은 의사였던 그는 천혜의 온천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결합시킨 보양 온천지라는 지역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구와노 현 온천관광협회장의 아버지 미조구치 굼페이, 나카야 겐타로 등 세 명의 젊은이를 독일에 보내 보양 온천지를 둘러보게 했다. 이 여행에서 이들은 벳푸가 아니라 보양 온천이 유후인의 모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오는 훗날 나이 오십에 참의원에 당선돼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한다. 지방 재정 정비에 주력했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유후인의 재원 중엔 자위대 부대 유치에 따른 정부 보조금도 있다. 유후시 관계자는 “자위대원 500명가량이 상주하는데 가족까지 합하면 유후인의 인구 유지에도 한몫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경도 있었다.

1975년 대형 지진이 오이타현 중심부를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2층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유후인의 규슈레이트 호텔이 붕괴했다. 이 사고 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면서 유후인은 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국적으로 유후인의 지명도가 올라가던 중이었다. 유후인은 이런 불리한 상황을 다양한 문화 콘텐트를 개발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음악제와 영화제를 개최했고, 대마도에서 말을 들여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쓰지 마차 운행을 시작했다. 또 1952년 출범한 ‘소 한 마리 운동’을 ‘쇠고기 먹고 소리 지르기 대회’로 발전시켰다. 1976년 시작된 유후인영화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다. 일본 영화만 상영하는데 감독과 출연배우가 유후인에 찾아와 관객과 대화를 나눈다.

영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연다. 개봉 예정작을 이곳에서 먼저 상영하기도 한다. 영화제 요원은 자원봉사자들이다. ‘쇠고기 먹고 소리 지르기 대회’는 3~4시간가량 진행된다. 수상자는 목소리의 크기와 얼마나 이색적인 메시지를 담았는지를 기준으로 선정한다. 올해는 지난 10월 13일 열렸다. 1000명가량 참여했고 이 가운데 약 100명이 직접 소리를 질렀다.

30%는 아이들이었다. 메시지는 다양하다. 유후시 상공관광과 다카다 노부아키는 “아이들은 ‘용돈 주세요’ ‘아빠, 술 드시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매년 어린이음악제와 유후인어린이영화제도 열린다. 일본의 버블 붕괴 후 농림수산성이 주도한 그린 투어리즘도 유후인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 등으로 타격을 입은 농촌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농촌 체류형 관광을 권장했다. 그린 투어리즘은 일방적인 구경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교류를 지향한다. 자연과 벗하는 생활형 관광지라는 유후인의 개발 방향은 이런 정책과 부합했다. 유후인은 주민의 생활을 관광자원화했다. 관광업계는 농업 등 지역 산업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료칸(旅館)은 농가로부터 식자재를 구입하고 현지 인력을 채용한다. 지역 경제가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리연구회는 료칸의 요리사들로 하여금 유후인산 야채를 맛있게 요리하는 레시피를 공개하도록 했다. 다카다는 “료칸 수준의 요리로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요리법을 농가에 전수하고 있는데 요리사가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엔 불편한 점도

도시가 발전하면서 편의점 등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는 편의시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유후인만의 개성을 퇴색시킬 가능성이 있다. 유후인 진흥국 지역진흥과 고초 세이지 계장은 “대규모 개발은 막았지만 작은 건물은 지을 수 있다”며 “작은 선물가게가 줄지어 들어서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생활 온천지라는 방향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주민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을 몇 년째 주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전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게가 늘고 있어요. 이들 점포에 대해서는 유후인의 점포답게 꾸미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관광객이 늘면서 주민들이 생활에 불편을 겪기도 한다. 그래서 차량을 통제할 때도 있다. 고초 계장은 “관광객이 유후인의 생활 속에 들어와 체험형 관광을 하고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고 털어놨다. 거리에서 만난 유후인 주민 가와사키(52)도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차량이 증가해 도로가 붐비는 점은 불편하다”고 말했다.

유후인은 편안한 관광지를 모토로 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에겐 불편한 점도 있다. 기자가 일본 현지 취재를 준비하는 동안 원-엔 환율이 급등했다. 환율 변동이 극심해 출장을 떠나면서 경비의 일부를 환전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 현지에서 환전하거나 예금을 인출할 생각이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현금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후인에 머무르는 동안 이 중 어느 한 가지도 할 수 없었다.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가게도 몇 곳 안 됐다. 유후시 상공관광과 다카다는 “유후인은 작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생활형 관광지를 지향하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신경을 못 쓰고 있습니다. 또 소규모의 료칸을 상대로 행정지도를 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팸플릿 등은 그림문자를 사용해 외국인의 언어장벽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관광객을 빨아들이는 유후인의 힘은 유후인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의지에서 나온다. 일본 100대 온천 1위에 뽑힌 일이 있는 다마노유(玉の湯)의 경영자이기도 한 구와노 회장은 “유후인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유후인다운 요리를 선보이려고 늘 노력한다”고 말했다.
“유후인답다는 것은 유후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제 나이에 느끼는 것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체인 호텔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죠.”

지역개발 어떻게 이뤄냈나
시골마을 이미지로 개성 살려

유후인의 개발은 민간주도형으로 이루어졌다. 이 점에서, 일본의 농·산·어촌 지역 활성화가 흔히 관 주도로 이뤄진 것과 대비된다. 그렇다고 관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지역 활성화가 진행되면서 민·관 협력의 형태로 발전했다. 민간이 앞장서고 행정이 뒤에서 지원하는 식의 역할 분담이 차츰 자리를 잡았다.

일례로 대규모 개발에 맞서 유후인은 이를 저지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그 덕에 유후인이 난개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둘째로 유후인은 철저하게 이미지를 차별화함으로써 유후인 자체를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했다. 1955년 유후인의 초대 정장이 된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顯一)는 벳푸와의 차별화를 주도했다.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벳푸와 선을 긋고 여성적인 시골 마을의 이미지를 창출했다. 70년대엔 유후인의 젊은 온천주들을 인솔해 유럽의 관광지를 둘러봤다. 이때 보양 온천이라는 지금 유후인의 컨셉트를 떠올렸다. 그 후 유후인은 보양 온천지의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유후인은 또 다양한 이벤트를 실시했다.

지역 활성화를 도모한 지 50년, 이와오의 구상은 오늘날 유후인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온천으로서는 벳푸와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후인의 상가는 규모, 가격, 다양성 면에서 대형 점포와 비교되지 않는다. 이런 인식에서 유후인은 공공투자나 기업 유치에 의존하는 과거의 지역 회생책을 지양했다.

오히려 지역 고유의 자원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즉 지역 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건강한 마을 만들기에 나섰다. 유후인은 생활형 관광지다. 보양 온천을 축으로 농촌 어메니티(amenity)를 활용했다. 농촌 어메니티란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농촌의 모든 경제적 자원. 서유럽에서는 이런 농촌 어메니티를 농촌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택하고 있다.

유후인도 관광한다기보다 이곳 생활을 체험하고 돌아간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전형적인 일본의 시골 풍경, 고유의 관습과 생활양식은 온천과 함께 유후인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다. 어려움도 있었다. 축산업·농업 종사자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땅을 팔려는 사람이 늘어났고 외부 자금이 유입됐다.

그에 따라 유후인이 개성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갔다. 유후인 주민들은 살기 좋은 마을이 관광객에게도 어필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에 따라 온천 업소를 중심으로 유후인산 식재료, 유후인산 가공품을 구매토록 하는 한편 지역 주민을 고용하게 했다. 이런 노력은 주효했다.

그 덕에 지역 산업과 연계한 지역 경제 활성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건강한 마을 만들기에 주력한 결과 유후인만의 색깔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인다. 70년대 규슈 일대에 큰 지진이 덮쳤다. 이때 유후인이 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후인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주민들은 다양한 이벤트를 열었다.

이런 발상은 이벤트형 지역 활성화라는 컨셉트로 발전했다. 70년대 골프장 건설, 규슈 지진, 80년대 거대 자본의 리조트 개발 등의 악재가 터졌을 때 외부 인사들이 나서 유후인을 편든 것도 이벤트를 통해 유후인을 끊임없이 홍보했기 때문이다. 온천으로 유명했던 유후인은 영화제, 음악제 등의 이벤트를 통해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노력 끝에 인구 1만2000명의 시골 온천지가 단체 관광객을 위한 대형 숙박시설이나 오락시설 없이 연간 380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유명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오이타현 유후인=구모란 지역연구센터 연구원·rany@empal.com

인터뷰 구와노 이즈미 유후인온천관광협회장
“행정은 100년 앞을 내다봐야”

“우리 지역에서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 실행에 옮기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sustainable) 개발로 이어질 수 있죠.”

구와노 이즈미(桑野和泉) 유후인온천관광협회장은 지속가능한 지역 개발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해당 지역의 고유한 잠재적 경쟁력을 찾아내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답했다.

“유후인은 온천지입니다. 온천지로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벳푸(別府)시와 인접해 있죠.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는 작은 벳푸라고 불렸어요. 우리는 분지라는 유후인의 지형과 잘 어울리도록 자연경관을 가꾸고 상점도 소규모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그 자신 료칸(旅館) 다마노유의 경영자이기도 한 구와노 회장은 ‘살고 싶은 마을’이 유휴인의 컨셉트라고 말했다.


- 살고 싶은 마을과 가보고 싶은 마을을 등치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살고 싶은 곳이라야 다른 지역 사람들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유후인온천관광협회 가입 업체 중 100곳이 료칸입니다. 이들은 유후인을 살기 편하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도시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기 업소에도 사람들이 온다는 믿음이 있죠. 마케팅도 공동으로 합니다. 서로 힘을 합쳐 ‘100가지 매력이 살아 숨쉬는 유후인으로 오세요’라고 홍보합니다.”


- 농촌이지만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 이른바 과소지역이 아니란 점이 인상적입니다.
“유후인은 관광업이 지역 산업 및 경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식당의 식탁은 이 고장 사람들이 만들었고 과자나 야채도 이 고장에서 만들었거나 재배한 것을 쓰죠. 농업이 지탱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관광객을 겨냥한 찻집, 미술관, 숙박시설 등도 고용 창출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에 유후인은 인구 감소가 없습니다. 다른 지역과 교류가 없는 지역은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 체류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어떤 노력이 이런 흐름을 만들어냈나요?
“편안한 곳이라야 묵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또 현지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는 곳이라야죠. 무엇보다 둘러볼 데가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술관 등 매력적인 공간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매력적인 지역이더라도 짧은 시간에 그 매력을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관광객이 잠깐 머물다 통과해 버리면 지역사회에 떨어지는 수입이 없어요. 유후인은 분지인데, 차량을 통제했더니 1인당 소비액이 4000엔에서 6000엔으로 증가했습니다.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오게 했더니 체류 시간이 길어지고 지출도 늘어난 것이죠. 필요하면 택시를 이용하면 되는데 이 역시 주민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구와노 회장은 일본의 관광 통계를 인용해 설명했다. 주민 1인당 경제적 효과는 외국인 7명의 방문 효과, 내국인 14명의 숙박 효과, 내국인 27명의 당일치기 방문 효과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외지인이 차로 도착하면 주차장을 더 만들어야 하고 도로도 확장해야 하는데 이런 식의 개발은 작은 분지 지역인 유후인의 실정에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 지역 개발에서 지방정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행정관서의 역할은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을을 어떻게 만들어갈 건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규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1990년에 만들어진 유후인시 조례 중 5층 이하의 건물만 지을 수 있도록 한 규정이 대표적이죠. 만일 유후인이라는 분지에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 다른 도시들과 비슷해졌다면 지금의 유후인은 없습니다. 행정은 100년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100년 후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면 필요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어요.”


- 주민 간에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는 어떻게 풀었습니까? 외부 자본이 들어오려고 할 때 땅을 팔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요?
“농업 종사자는 땅을 팔고 싶어했고, 관광업 종사자는 온천이 농촌 풍경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호텔이 들어오려고 할 때도 상업 종사자는 찬성했고 관광업계는 반대했습니다. 유후인역 앞에 유후다케(由布岳)를 가로막는 10층 건물이 생겼다면 유후인은 지금과 달라졌을 겁니다. 전후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무엇이든지 새롭고 크게 짓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온천지에 큰 호텔을 지으면 손님들이 호텔에만 머물게 됩니다. 정작 지역과는 유리되는 거죠. 또 높은 건물을 지으면 고유의 경관이 퇴색해 관광객으로서는 굳이 유후인을 찾을 까닭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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