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사회 스트레스가 부른 비극

사회 스트레스가 부른 비극

탕융밍(唐永明·47)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다. 탕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된 후 12시간이 지난 8월 9일 정오 무렵 13세기에 건축된 베이징의 누각 구러우(鼓樓)에서 미국인 관광객 부부에게 잔인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누각의 서쪽 난간에서 40m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미니애폴리스의 사업가 토드 바크먼(미국 남자배구 대표팀 코치 휴 매커천의 장인)이 사망했고, 그의 부인 바버라는 중상을 입었다. 그들의 안내를 맡았던 젊은 중국 여성도 부상을 입었다. 탕의 범행 동기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5년 전 탕이 실직한 뒤 그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주려 했던 사회복지사 왕융샨은 “그에게서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왕의 동료 쑤궈팡 역시 같은 생각이다. “탕은 ‘비교적’ 평범했던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했다.”사건 직후 중국 당국은 탕이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러리스트의 소행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뒤 올림픽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근본적으로 중국 사회의 불안감을 반영한다. 탕을 파멸로 이끈 원인(실직과 결혼생활의 실패, 방탕한 건달로 자란 외자녀에 대한 비탄 등)은 요즘 중국에선 매우 흔한 문제다.

현재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나라다. 30년간 계속된 개혁은 사회 안전망을 파괴하고 중국 사회를 몰라보게 바꿔놓았다. 다음 달 덩샤오핑(鄧小平)의 자본주의 개혁 3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의 지도층이 경기침체 방지를 위해 5000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붓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럴 만도 하다.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새 일자리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국내총생산(GDP)이 매년 7.5~8%씩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전역에서 이미 노동불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올 들어 중국 완구 업체의 절반이 파산해 수백만 명의 공장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또 몇 주 전 충칭(重慶)에서는 고유가에 분노한 택시 운전기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 차량을 불태웠다.

탕도 그들처럼 큰 좌절감을 느낀 듯하다. 탕을 알고 지내던 사람 중 대다수가 당국과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인터뷰에 응하기 전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탕의 이야기는 중국 사회의 표면 바로 밑에서 들끓고 있는 긴장과 불안감을 드러내준다.

탕은 1961년 저장(浙江)성의 항저우(杭州) 교외에서 태어났다. 정부의 압제가 심했던 힘든 시절이었지만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많은 중국인이 아직도 그 ‘철밥통’ 시절[마오쩌둥(毛澤東 )은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와 집, 기본적인 사회복지를 보장했다]을 그리워한다. 그 이후 시작된 개혁은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자살률(매년 인구 10만 명당 23명이 자살한다)은 미국의 두 배를 웃돈다. 상하이(上海) 정신위생 센터는 최근 상하이시의 우울증 사례가 지난 10년 동안 네 배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탕 같은 중년층은 특히 타격이 심하다. 마오 시대에 그들은 주머니에 돈 한푼 없어도 긍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돈이 전부다.

광저우(廣州)에서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는 심리학자 웨이지종은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국가에 공헌한 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항저우에 있는 정부 소유의 계측기 공장에 취직한 탕은 의기양양했다. 공장 근로자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던 마오 시대의 정서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고용주들은 안정된 임금과 주택부터 의료혜택과 연금까지 모든 것을 제공했다. 유치원 시설까지 갖춘 공장도 많았다. 이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탕의 지인 한 명은 “그 시절 탕은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말했다. 남송(南宋)의 수도였던 항저우는 한때 맑고 푸른 운하와 호수들로 아름다움을 뽐내던 도시다(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항저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았다).

탕의 공장은 그에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서호(西湖) 지구에 있는 아파트를 제공했다. 주방은 공동 복도에 있었고, 모든 입주자가 옥외의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다. 2층 동쪽 끝에 있던 20평 남짓한 그의 아파트는 “그 건물에서 가장 좋은 위치”였다고 한 주민은 말했다. “그 아파트에는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탕의 삶은 순조로웠다. 얼마 안 돼 동료 근로자 유장칭과 결혼했고, 사람들은 그들 부부가 행복했다고 말한다. 1987년에는 아들이 태어나 이름을 ‘웬쥔’(‘온화하고 뛰어나다’는 뜻·현재 21세)이라고 지었다. 그들은 마오 이후 시대의 엄격한 가족계획법에 따라 자녀를 한 명만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를 중국의 다른 수많은 응석받이 외자녀와 유사한 방식으로 키웠다. ‘한 자녀 정책’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유교적 양육 방식을 혼란에 빠뜨렸다. 중국의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링뎬(零点) 리서치사의 소비자 조사에서는 오늘날 많은 중국 가정에서 조부모의 권한이 가장 약하고 아이들의 권한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언론에는 철저하게 자기본위적인 ‘소황제’들과 자식에게 노예처럼 헌신하며 버릇없게 키우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탕의 이웃들은 어린 시절 웬쥔이 “다소 반항적이긴 했지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고 말했다. 탕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9년 계측기 공장의 모회사가 국영기업 정리작업의 일환으로 매각됐다.

새로운 공장주는 탕과 유를 포함해 2000여 명 근로자의 고용을 유지했다. 그리고 임금과 연금, 주택과 의료보험에 관한 계약을 이전대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졌다. 새 고용주는 수익성이 없는 오래된 생산 라인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숙련된 기술자로 일해오던 탕이 공장 문을 지키는 수위로 발령 받았다.

2003년 들어서는 탕의 부인이 해고됐고, 12월에는 회사 측이 탕에게 퇴직금과 살고 있던 집의 소유권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월급 100달러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조기퇴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탕이 그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 중국의 모든 부동산 소유주는 정부였다. 하지만 이제 그가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개혁의 여러 측면 가운데 그가 반길 만한 유일한 요소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탕과 유는 다른 실직자 부부들처럼 말다툼이 잦아졌다. 2004년에는 그들의 부부싸움이 동네의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였다. 탕은 유가 외도를 했다고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언론에 인용된 그의 전 직장동료 장리핑의 말에 따르면 탕은 가끔 부인을 구타하기도 했다.

한 이웃 주민은 뉴스위크 기자가 그 일에 관해 묻자 직접적인 대답은 회피했지만 이렇게 암시를 주었다. “중국에선 (부인을 구타하는 게) 아주 흔한 일이다. 부인이 외도를 해 체면을 손상시켰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에서는 체면을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탕과 유는 2005년 6월 이혼했다.

유는 거주지를 옮길 때 새 주소를 등록하지 않은 듯하다(뉴스위크는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오 시대의 중국에서는 이혼이 드물었다. 이혼을 하려면 소속 기관장이나 직장 대표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촌락위원회는 이혼하려는 부부들을 설득해 이혼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2003년 저렴한 비용으로 하루 만에 이혼할 수 있는 새 법이 시행된 이후 이혼율이 급증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이혼율이 18.2%나 뛰었다(결혼 증가율은 12%에 불과했다). 사회적 스트레스와 (결혼과 인생에 대해) 높아진 기대 수준, 완화된 이혼 관련법, 이 모든 것이 요인으로 작용했다. 탕은 2006년 재혼했지만 결혼생활은 두 달도 가지 못했다.

이웃 주민 중에 탕의 둘째 부인에 관해 (심지어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현지 경찰에 따르면 탕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이후 외자녀인 웬쥔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그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려고 했다. 그는 아파트를 2만8000달러에 판 뒤 그 돈을 웬쥔에게 아낌없이 쓰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웬쥔은 소형 버스를 운전했다고 한다. 그는 그 버스를 무면허 택시나 화물 배달 트럭으로 이용한 듯하다. 탕의 지인들은 탕이 그 버스를 아들에게 사준 듯하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탕은 집 판 돈을 1년도 안 돼 탕진했다. 한때 조용하고 깨끗했던 탕의 동네는 요즘 지저분한 쓰레기더미와 건축폐기물로 어수선하다.

또 주변에 분홍색이나 회색 타일을 붙인 볼품 없는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벼락부자가 된 농부들이 지어서 이주 노동자들에게 방을 세놓는 집들이다. 탕도 그런 방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쑤와 왕 등 사회복지사들은 그에게 새 일자리를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쑤는 탕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줄 때마다 그가 “‘먹고살긴 해야겠는데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핑계를 늘어놓으며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왕은 일자리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탕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고 돌이켰다. 한번은 왕이 백화점에서 경비원을 구한다고 말하자 “탕은 건강이 좋지 않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또 교통안전요원 자리를 제안했을 때는 “온종일 햇볕에 얼굴을 그을려 가며 서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웃 주민 한 명은 “탕은 허드렛일을 해 체면이 깎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고 말했다. 탕은 키가 크고 옷차림이 단정하다는 점을 빼곤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담배 취향이 사치스러웠다고 말한다. 그가 즐겨 피우던 중화(中華) 담배는 주로 공산당 간부나 과거 상류층이 애용하던 브랜드다.

한 갑에 7달러로 보통 담배보다 거의 두 배나 비싸다. 탕은 한 그릇에 75센트짜리 국수로 연명하면서 예전에 살던 아파트 근처에서 하루 종일 카드 게임이나 마작에 매달렸다. “도박은 우울하거나 근심에 사로잡힌 중국인들이 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탈출구 중 하나”라고 심리학자 웨이는 말한다. “서양에는 다양한 기분풀이 방편이 있지만 중국은 사정이 다르다.” 탕은 경제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도박에 더 매달렸다.

웬쥔 역시 힘든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2007년 5월 그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항저우 북부의 퇴폐 목욕업소(음식과 술, 여종업원의 서비스가 제공된다)를 찾았다. 항저우 경찰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웬쥔은 그날 밤을 그곳에서 보낸 뒤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치려 했다. 당국은 그를 사기 혐의로 10일 동안 감금한 뒤 훈방했다. 경찰 소식통은 “액수는 150달러 미만으로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웬쥔의 범법행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올 3월 그는 룸메이트의 돈 수백 달러를 훔쳤다. 그는 절도 죄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경찰 소식통은 “웬쥔이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룸메이트에게 돈을 갚을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웬쥔의 한 지인은 그가 툭하면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탕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한 이웃은 탕이 “요즘은 농부들이 돈과 명예를 다 차지한다. 이건 정말 부당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탕은 기대가 너무 높았고, 실망이 너무 컸다”고 왕은 말했다. 지난 4월 탕은 방세를 청산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그곳을 떠나 이주 노동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항저우의 혼잡한 상업지구에서 일하는 그의 지인 한 명은 “한마디로 체면 때문”이라고 말했다. 탕은 “언젠가 모든 걸 잃고 파산한다면 고향만 빼고 어디든 가서 거지 노릇이라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탕은 또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쓰촨(四川)성(중국 내에서 타지역으로 노동력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지역으로 알려졌다)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5월 12일 쓰촨성에 대지진이 일어나 6만9000명의 사망자와 수천만 명의 실직자 및 이재민이 발생하면서 그의 구직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탕은 셋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삶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도 체면을 지키려 했다. 옷이 단 한 벌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가난해졌을 때도 저녁이면 옥외 세면대에서 손으로 옷을 빠는 그의 모습이 동료 세입자들의 눈에 띄곤 했다.

지난 8월 1일 그는 단골 음식점에서 늘 먹던 75센트짜리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방세 45달러를 낸 뒤 (집주인은 그가 방세 내는 날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짐을 꾸렸다. 집주인은 그의 짐이 종이 쇼핑백의 절반도 안 됐다고 말했다. 오후 5시쯤 탕은 웬쥔에게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길이라고 말했다. 돈을 벌면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던 듯하다.

탕은 아들에게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찾지 말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것이 그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탕은 베이징행 기차를 탔다. 구러우 사건이 발생한 뒤 경찰은 조사차 웬쥔을 연행했다. 경찰은 웬쥔에게 그의 아버지가 베이징에서 미국인 관광객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자살했다고 말했다. “웬쥔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경찰 소식통은 밝혔다. “그는 완전히 무표정이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김천 묘광 연화지, 침수 해결하고 야경 명소로 새단장

2"겨울왕국이 현실로?" 영양 자작나무숲이 보내는 순백의 초대

3현대차 월드랠리팀, ‘2024 WRC’ 드라이버 부문 첫 우승

4'1억 4천만원' 비트코인이 무려 33만개...하루 7000억 수익 '잭팟'

5이스타항공 누적 탑승객 600만명↑...LCC 중 최단 기록

6북한군 500명 사망...우크라 매체 '러시아 쿠르스크, 스톰섀도 미사일 공격'

7“쿠팡의 폭주 멈춰야”...서울 도심서 택배노동자 집회

8다시 만난 ‘정의선·도요타 아키오’...日 WRC 현장서 대면

9 신원식 “트럼프, 尹대통령에 취임 전 만나자고 3~4차례 말해”

실시간 뉴스

1김천 묘광 연화지, 침수 해결하고 야경 명소로 새단장

2"겨울왕국이 현실로?" 영양 자작나무숲이 보내는 순백의 초대

3현대차 월드랠리팀, ‘2024 WRC’ 드라이버 부문 첫 우승

4'1억 4천만원' 비트코인이 무려 33만개...하루 7000억 수익 '잭팟'

5이스타항공 누적 탑승객 600만명↑...LCC 중 최단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