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영웅 거품 지나치다
미국 TV 드라마 ‘오피스(The Office)’의 최근 에피소드에서 아둔한 상사 마이클 스콧(스티브 커렐)은 앙숙인 동료 직원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세운다. 그의 책상 서랍 속에 마리화나를 숨겨 놓은 뒤 경찰에 발각되게 할 요량이었다. 도중에 마이클은 “너무 야비한 짓”이 아닐까 잠시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마이클의 계획은 실패로 끝난다. 그가 마리화나인 줄 알고 산 비닐 포장 꾸러미 속엔 바질이 듬뿍 섞인 카프리식 샐러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참 황당한 줄거리지만 더 황당한 것은 ‘덱스터(Dexter)’ ‘쉴드(Shield)’ ‘데미지(Damages)’ 등 인기 드라마들의 줄거리가 모두 이런 식이라는 점이다.
요즘 미국 TV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불법약물을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이야기가 코미디에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요즘 미국 TV는 ‘나쁜’ 사람들의 경연장 같다. 1년 반 전 시청자들은 ‘소프라노(The Sopranos)’ 마지막 회 맨 끝 부분의 암전 장면에서 주인공 토니가 살았을까 죽었을까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 토니가 생존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요즘 우리는 거의 모든 미국 TV 드라마에서 토니(아니면 적어도 그가 창조해 낸 반영웅의 전형)의 모습을 본다. ‘24’의 고문을 즐기는 테러 방지 요원 잭 바워(키퍼 서덜랜드), ‘덱스터’의 매력적인 연쇄 살인범 덱스터 모건(마이클 C 홀), ‘매드 멘(Mad Men)’의 두 얼굴을 가진 광고회사 간부 돈 드레이퍼(존 햄) 등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에미상 투표단은 누구에게 표를 던졌을까?
이 주인공들은 뛰어난 인물 묘사로 TV 드라마를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미국 TV 드라마의 황금기로 불리는 요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너무 모호한 성격이라는 느낌을 준다.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에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을 적용하던 구태를 벗으려다 보니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성격의 인물들이 양산된 듯하다.
‘소프라노’에서 토니가 딸과 함께 대학 탐방을 하던 변절한 폭력단원을 목 졸라 죽였을 때 우리가 얼마나 전율했는지 기억하는가? 하지만 요즘 웬만한 TV 드라마 주인공들은 ‘보다 나은 선(善)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피를 보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한때 대담하고 충격적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이제는 뻔한 줄거리가 됐다.
어쩌면 지난 8년 동안 미국의 정치 풍토가 시청자들로 하여금 반영웅을 숭배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시작한 전쟁(이라크전), ‘블랙 사이트’(관타나모 등 미국 밖에 있는 비밀 수용소를 말한다)로 보내지는 테러리스트 용의자들, 부시 정부의 불법 도청 파문….
이런 분위기 속에서 권력자들의 행동 밑에 깔린 진정한 동기를 파헤쳐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데미지’의 변호사 패티 휴스(글렌 클로스)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도덕한 기업들을 소송으로 보복한다. 휴스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온갖 부도덕한 수단을 동원하고, 많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A&E TV의 ‘비스트(The Beast)’에 나오는 찰스 바커(패트릭 스웨이지)도 좋아한다. 바커는 행동이 수상쩍은 연방수사국(FBI) 요원으로 자신의 새 동료가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TNT TV의 ‘레버리지(Leverage)’에 나오는 네이선 포드(티머시 허튼)는 또 어떤가?
범죄 집단의 두목인 그는 탐욕스러운 기업에 보복하려는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다. 월스트리트의 로빈후드가 아닌가? 포드는 “때로는 악당들이 가장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에 나온 세 드라마 모두 이번 달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걸 보면 ‘악당들만이 좋은 사람’인 시대가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잘 팔리면 더 만든다’는 할리우드 방식이 TV에 적용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서바이버’가 인기를 끌자 유사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왔던 게 좋은 예다. 하지만 반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들은 성격상 제약이 따른다. ‘24’나 ‘위즈(Weeds)’ ‘덱스터’의 팬들이라면 누구나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위기감을 더해 가는 드라마를 보면서 “재미는 있었지만 다음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끌고 가려고 하지?”라는 궁금증이 들 것이다.
수년 동안 세계 테러 위기의 아슬아슬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 ‘24’의 작가들은 지난 시즌 마침내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 핵무기가 폭발하도록 줄거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 뒷수습이 안 돼 줄거리가 아직도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 반면 ‘쉴드’의 경우 시즌 마지막 부분에서 비열하고 공격적인 형사 빅 매케이는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세상과 단절돼 사무직 직원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완벽한 결말이다. 끝으로 갈수록 위기감을 더해 가는 게 아니라 극단적인 줄거리를 완화시켰다. ‘쉴드’의 크리에이터(전체 에피소드가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숀 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장수 비결이라고 본다. ‘우리는 온갖 황당한 이야기를 다 보여줬다. 더 보여줄 게 뭐가 있겠는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해가 갈수록 극단적인 줄거리의 수위를 낮춰 왔다. 만약 반대 방향으로 나갔더라면 진즉 막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24’에서 보듯 모든 드라마의 제작진이 라이언처럼 절제심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반영웅 드라마의 또 다른 문제는 주인공들이 ‘완벽’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실수나 실패하는 법이 없다. 잭은 매번 비양심적인 결정을 내리지만 일을 그르칠 만한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 시즌7 첫 회에서 그는 자신의 전투를 조사하는 청문회에서 블레인 메이어 상원의원(커트우드 스미스)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전투병에게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적의 특성에 맞게 대응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규칙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건 결과뿐이다.” 잭은 물론 매번 승리한다. 또 ‘하우스(House)’의 염세적인 의사에게 불쾌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다른 의사들이 모두 못 보고 지나친, 까다로운 병을 진단해 낸다.
덱스터는 형벌을 면한 살인범들만 골라서 살해한다. 그는 일을 실행에 옮기기 전 상대가 유죄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면밀한 조사를 한다.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들도 대체로 TV 드라마에 적합하다. 매회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드라마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의 경우 완벽성은 캐릭터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아니다.
일례로 ‘로 앤 오더(Law & Order)’의 형사들이 수사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다(이 드라마에선 실제로 이런 일이 잦다) 해도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덱스터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법이 없고, 잭은 자신의 틀린 직감을 옳은 것으로 만들려고 누군가를 고문하지 않는다.
반영웅들은 실수를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결과로 난처해지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다. 처음엔 닷컴 거품, 그 다음엔 주택 거품, 이젠 반영웅 거품의 시대다. 한때 혁신적으로 보이던 이 캐릭터들이 이젠 흔하디 흔한 존재가 됐다. 시청자들이 조만간 싫증을 느낄 듯하다.
‘매드 멘’과 ‘데미지’는 떠들썩한 광고에도 불구하고 ‘소프라노’의 시청률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다고 미국 TV 드라마의 황금기가 끝나간다는 말은 아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TV가 필요로 하는 건 마셜 허스코비츠와 에드 즈윅[‘원스 앤 어게인(Once and Again)’과 ‘서티 섬싱(thirtysomething)’의 주인공] 같은 극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구하거나 망치려 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어울려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자체가 극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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