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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찌 두려움에 떨기만 하리오

우리 어찌 두려움에 떨기만 하리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쓸쓸하다. 겨우 영하 9도의 날씨에도 쓰러질 듯이 몸이 아프다. 곧 우리의 행복한 명절이 다가오는데, 아무 즐거운 기대도 없고 마음만 잔뜩 어둡게 찌푸린 구름처럼 묵직하다.

어머니가 씻어놓은 멥쌀 한 자루 들고 방앗간 기계에서 뜨끈뜨끈하고 그 새하얀 가래떡이 냇물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본 때가 언제였나. 기대와 설렘조차 사라진 명절.

마음마저 딱딱한 장작이 된 것 같고 세상이 낯설고 아프게 다가온다. 불경기로 인한 공장 가동중단, 정리해고 등 직장 잃은 가장과 아픈 가족이야기 등 세상은 온통 내일 걱정으로 얼룩져 있다.

삶이 얼마나 암담하게 흘러가는지 꼭 뉴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서운 불황 속에서 오존층 파괴로 북극이 사라지고 있는 등 무서운 환경재앙, 전쟁과 분쟁, 살인과 자살, 사건 사고… 이런 뉴스도 너무나 익숙해서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사람살이가 예전과는 달리 감수성이 굳어져가고 정서가 강퍅해진 느낌에 놀란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도 듣기가 힘든 시대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남이 어찌 받아들일까 상처받을까 두려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치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고받는다.

나도 상처를 받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빈곤은 감정의 빈곤, 정신의 빈곤까지 만드는 것 같다. 지난달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2년 전 5년간 밤잠을 설치며 쓴 원고료로 한 푼 두 푼 모아온 내 알뜰 저축을 거래은행의 권유로 펀드를 들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수익을 올린 후 작업환경이 좋은 곳에 이사비용으로 쓰겠단 계획에서 가입한 펀드였다.

지난해 11월 말 해지하면서 60%의 원금을 잃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었다. 내일, 미래, 꿈, 기쁨의 원천이었던 내 귀엽고 사랑스런 알토란 저축. 그것이 반 이상 사라진 현실 앞에 세상 접고 싶은 마음도 들 만큼 괴로웠다. 슬픔과 막막함으로 빨간 연탄처럼 온몸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그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와 화가 내 정신을 얼마나 파먹고 있었는지 한 달 지나 정신 차린 후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의 ‘미래’는 ‘진보’란 뜻을 의미했고, 검소한 생활 속에서 삶의 환경은 더 좋아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은행이 틀릴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엔 당연한 건 하나도 없고, 타인의 불행이 바로 내 것이며, 재테크란 말도 공허하게 울렸다.

미래가 더 이상 ‘진보’를 뜻하지 않았다. 앞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며 사는 것도 감사한 일만 같았다. 몸은 움츠러들었고, 다시 살 기운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충격이란 삶을 다시 살피고 다시 계획하라는 신호다. 충격은 나 자신을 다시 만들고 구성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상처를 받고, 돈을 잃는 것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겪는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일이든 최후의 결정을 한 내가 책임져야 하며 남의 탓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는 그동안 꿈꾼 행복에 대한 개념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은 행복은 무엇일까? 진정한 기쁨이란 어떻게 얻어지며,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성공이나 재산을 유지,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달려왔다. 삶의 진정한 행복이나 가치로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점검도 없이… IMF사태 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이번 경제 위기는 지금까지 살던 방식과 진보개념의 브레이크였다. 혼자 떠안는 경제적 상실감에 종일 누워있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물론 마음을 다스리며 영혼 깊숙이 와 닿는 영성책들을 읽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워가는 웃풍 속에서 이불을 덥고 있어도 바람결이 느껴졌다. 책장 속에서 글자들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풀 냄새도 났고, 커피와 나무 냄새가 섞인 글자가 보였다. “삶의 묘는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을 즐기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를 비출 충분한 빛을 갖게 되리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는 전 생애를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빛 속에서 기뻐하십시오.”

영성저술가 헨리 나우웬의 이 글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 시대가 주는 절망, 불평을 해 봤자 마음만 상할 뿐이다. 깊은 어둠을 헤아려야 하며 내가 어찌 생각하느냐에 따라 더없이 좋아질 기회라는 점이다. 더 나이가 들어 참으로 불행한 일은 무엇일까를 또한 물었다. 늙고 추해지고 동반자가 없거나 가난함이 아니라 나를 떠나 남을 위해 한 번도 살지 않은 인생이야말로 불행이며, 돈에 얽매여 돈 버는 데만 시간을 쓴 재미없게 산 인생, 진정한 삶이 무엇일까 묻지도 않고 그냥 달리는 삶이야말로 불행이다.

불운으로 인생의 큰 깨달음이 있었으면 한다. 거부와 쓸쓸함, 끝없는 실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인생에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갈 힘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아갔으면….



슬픔 속에 기쁨의 씨앗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이 가장 큰 불만은 돈이 부족하며 시간이 없다는 것이라 한다. 이런 불만도 바닥에 내려놓아야 할 때다. 우리는 너무나 불안정하고 걱정에 차 있다. 돈을 좇다보니 그 자체 목적이 되지 않았나 살펴야만 한다. 세속적인 것은 언제나 정신적인 것보다 앞서가지만 많이 갖는다는 것을 행복과 혼동하는 건 아닌지도 봐야 한다.

자꾸 불행하다고 한탄만 하면 주변 사람들은 떠난다. 불행해도 밝은 마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에게 더 정을 주고 싶지, 한탄·낙담만 하고 이겨내려 애쓰지 않는데 누가 곁에 남아있을까.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 한다. 고통 받거나 절망할 때, 혼란과 불확실한 시간을 함께해주는 친구가 되어주기.

스스로 그런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그런 친구가 있다면 세상을 다시 얻는 것이다. 따뜻한 사람살이만이 빛나는 삶으로 이끌어간다.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이미 있는 것, 사소한 일에 대한 감사야말로 인생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므로. 긍정적인 말은 생수와 같다.

긍정적인 말과 자세만이 자기 삶을 키우고 남들에게도 복을 주는 생명수가 된다. 내게 남아있는 것들이 뭔가를 살폈다. 건강한 몸과 웃풍 세지만 내 몸 하나 눕힐 수 있는 집과 읽을 책과 한 달 전에 후배가 내게 부쳐준 쌀 반 가마니가 있잖은가. 행복은 사랑처럼 결심이더라. 마음자세며, 훈련이더라.

대부분 꿈꾼 것을 얻는 것만이 행복의 키를 잡는 거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잃는 것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얻는 인생의 깨달음은 더없이 크다. 그 안에서 품이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음을 기쁘게 깨닫는다. 어제 저녁에는 혈육의 감정을 느낄 만큼 힘들 때 도우미로 알게 되어 오랜 인연의 친구가 된 여성에게 늦가을에 산 새 스웨터를 선물했다.

“어머, 이렇게 예쁜 스웨터를 제가 가져도 되나요? 선생님이 입으시죠.”

“나보다 님께서 입으시면 더 옷이 반짝반짝 빛날 거야.”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내지 마라

워낙 퍼주는 성품이기도 하지만, 펀드로 큰돈을 날린 후 물건에 대한 욕심은 더욱 없어졌다. 단순하게 살고만 싶었다. 정말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따뜻한 친밀감 속에서 내 일을 하고 세상을 위해 도움되는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고 싶다.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 이런 소박한 꿈 속에서 괴로움도, 슬픔도, 모든 생의 그림자들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괴로움 속에 이미 즐거움이, 슬픔 속에 기쁨의 씨앗이 있음을 안다. 어느 바람 부는 날 문득 그 씨앗은 여물어 활짝 꽃피울 수 있음을. 자신의 기도와 땀과 수고로 피어남을 또한 잊지 않으리라.

만사가 안 된다고 걱정하거나 마음 상하지 마라
생명수는 어둠 속에 있으니
형제들이여, 가난을 슬퍼하지 마라
역경 속에 기쁨이 숨겨져 있으니
세월의 모순된 변화에 슬퍼하지 말고 참아라
쓰디쓴 날 뒤에 반드시 다디단 날이 오리니


페르시아 고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분인 사디의 시다. 희망의 시. 역사 속에서 위대한 영적인 멘토들은 모두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다. 예수, 부처, 간디, 케네디….
기쁘고 만족스런 삶을 위한 변화를 만들려면 늦은 때는 없다. 우리가 맞닥뜨린 고통이나 슬픔이 너무 크다는 생각은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욱 크게 보이는 것이다. 무엇인가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잃게 만든다. 불평불만, 한탄으로,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사랑할 시간도 행복할 시간도 부족하다. 나부터 쓸데없이 하루를 빛나게 쓸 에너지를 더 이상 낭비하지 않으리라.
설날에는 모처럼 만에 만나는 가족친지와 인생의 멘토들에게 배운 희망과 꿈을 서로 나누련다. 이제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상처와 상실감을 서로 나누며 위로하고 보살펴야 하리라.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따뜻한 정이 다시 찾아질 것이다. 우리가 살고 두고 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가를 생각하면서. 앞서 인용한 헨렌 나우웬의 글과 상통된 내용인 M.M.마고의 시 ‘지금 행복하십시오’를 설날 아침 차례가 끝난 후의 가족들의 밥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싶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행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두 팔로 안으십시오
그리고 인생이 주는
작은 기쁨의 전율들을 마음껏
받아들이십시오
맛있는 커피, 알맞게 구워진 토스트
기름이 가득한 연료 탱크,
황금물결이 굽이치는 밀밭
아름다운 석양 그리고
당신 상관이 말하는
칭찬의 소리
항상 금덩이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얼마 가지 않아
피곤하고 지루해지니까요
다만 눈에 보이는 작은 금싸라기를
즐기며 사십시오

신현림

시인. 사진작가. 신선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매혹적인 시와 사진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작가다. 시집 『세기말 블루스』로 주목 받은 후 네 번째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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