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화합해야 위기 뒤 과실 있다
노사 화합해야 위기 뒤 과실 있다
제네시스가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북미 올해의 차’에 선정되는 등 현대차의 성능이 인정을 받고 있다. |
지난 16일 미국 백악관의 자동차 태스크포스팀의 책임자 스티븐 래트너 특별보좌관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자동차 ‘빅3’의 파산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자동차 산업의 문제를 백악관에서 언급할 만큼 현재 미국 자동차 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래트너 특별보좌관의 이런 예외적인 언급이 나온 것은 이유가 있다.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의 회계법인인 딜로이트투시가 지난 5일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감사보고서에서 “GM의 계속되는 영업손실과 주주들의 손실, 채무상환에 필요한 충분한 현금 유동성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등을 감안할 때 이 회사가 계속 생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GM과 크라이슬러의 운명은 이제 정부의 보조금 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미국 자동차 ‘빅3’ 중 유일하게 정부 구제금융을 받지 않은 포드는 노조와 임금인하에 가장 먼저 합의했다. 지난 12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포드가 전미자동차노조(UAW)와 올해 시간당 임금을 종전 70달러 이상에서 55달러로 20% 이상 낮추는 방안에 합의했다.
미국 이어 일본도 감산·감원 잇따라
포드는 성과급 및 해고수당 삭감 등은 물론 쟁점이 돼온 퇴직자 건강보험기금(VEBA) 개혁에서도 노조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포드는 이로써 연간 5억 달러의 영업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동차 노조마저 임금인하에 합의할 정도로 미국 자동차 업체는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자동차 업계는 한편으로는 구제금융에, 한편으로는 인력감축과 임금인하 등 비용 줄이기에 매달리면서 생존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만이 아니다.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는 일본차 업체도 이번 위기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다. 도요타 역시 판매가 급감하는 북미법인을 위주로 구조조정에 나섰다.
북미 공장 직원을 대상으로 조기퇴직 접수를 시작했고, 임금동결과 보너스 삭감도 4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혼다는 국내 공장에서 4300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닛산 역시 내년 3월까지 전 세계 공장에서 2만 명을 감원하기로 했다. 이처럼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이 감원과 감산, 구제금융 요청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자동차 산업이 급속히 냉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일 발표된 2월 미국 내 자동차 판매실적을 보면, 68만8000대가 팔려 지난해 2월에 비해 41%가 줄었다. 1981년 12월 이후 최저다. GM(53%), 포드(48%), 크라이슬러(44%), 도요타(40%), 혼다(38%), 닛산(37%) 등 모든 메이커가 이 폭풍을 비켜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37%가 줄어들었다.
일본에서도 2월 신차 판매가 1년 전에 비해 32.4%가 줄었다. 1974년 이후 최악이다. 프랑스는 13.1%, 스페인은 48.8%가 감소했다. 전 세계의 모든 시장에서 판매가 감소하고 있고 모든 자동차 회사가 위기를 겪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만 지난 2월까지 미국시장에서 오히려 3.6% 성장했다.
북미에서 현대·기아차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국내 자동차 업계가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직격탄을 맞은 세계 자동차 산업. 국내 자동차 업계도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증가하는 판매량에 흐뭇해 하던 완성차 업체들은 공장 가동을 멈춰 감산에 들어간 것은 물론 당장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인력 감축 등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는 형편이다.
내수 판매량은 지난 1월 7만3874대, 2월 8만7818대로 각각 지난해보다 24.1%, 14.7% 줄어들었다. 국가경제에 대한 자동차 산업의 기여도는 지대하다.
자동차 업체 부도 전후방 연관산업에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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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완성차 메이커들은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인 감산과 함께 경비절감을 위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감산은 감원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는 쌍용차는 물론 은행권에서 긴급 자금을 받아야 하는 GM대우는 구조조정 방안을 세우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폭적인 인원 감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산업연구원의 이항구 박사는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남은 것은 인력 감축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시장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경영상황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고, 결국 자금압박과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 일단은 자동차 업계에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세계적 경제위기로 인한 수요위축에 기업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완성차 업체의 한 고위관계자는 “모든 자동차 강국이 정부 차원의 지원을 시작했다”며 “우리나라 정부도 그 배경과 필요성을 인식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자동차공업협회 측은 “자동차 산업은 고용 측면에서 약 160만3000명, 국내 총 산업의 10.4%에 달해 세수 측면에서도 총 세수 199조원의 15.5%에 달한다”며 “자동차 산업의 붕괴는 소비 위축과 투자 부진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경제위기 탈출을 요원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동차 업체의 부도는 부품 협력업체의 연쇄 도산과 철강 등 소재산업, 금융 등의 서비스 산업 등 전후방 연관산업에 극심한 타격을 입힌다.
정부의 신속한 지원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자생력이 있는 한국 자동차의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사 간의 화합을 통한 위기극복 노력이 중요하다. 이번 위기에 한국 자동차 업계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 자동차 수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빠르게 성장하는 품질력과 브랜드 가치에 더해 노사 관계 안정만 된다면 단숨에 세계 5위권 업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브랜드 가치도 한층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아직 현대·기아차의 노사 관계가 대립과 불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13일 발행한 노조소식지 ‘쟁대위(쟁의대책위원회) 속보’를 통해 총 고용보장과 임금인상을 주내용으로 하는 임단협 요구안을 마련해 회사에 요구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노조는 소식지에서 “어려운 시기지만 정당한 요구를 사측에 반납할 수 없다”며 “오는 4월부터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또 “17일 금속노조가 올해 산별중앙교섭 상견례를 갖고 단체교섭에 들어간다”며 “지난달 26일 대정부, 대자본 5대 요구안과 기본급 8만7709원 인상 등의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 요구안을 사측에 전달한 금속노조는 요구안 쟁취를 위해 본격 투쟁 전까지 현장 동력을 높여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경제위기 속에서도 현대차 노조가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술’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도요타나 포드 같은 세계적인 업체의 노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난해 GM을 꺾고 세계 1위로 올라선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노사는 이미 실질임금 동결에 합의했다.
4년 만의 일이다. 위기가 오자 도요타 노조는 신속하게 임금인상 자제를 천명하고 나서면서 노사가 한 몸이 되고 있다. 세계 경기침체에 따른 신차 수요 급감에 맞서기 위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단행된 것이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 16일 도요타 자동차 노사가 올 춘투에서 4년 만에 실질적인 베이스 업(임금 개선)을 ‘제로’로 하기로 했다면서, 연간 일시금(보너스)에 대해서는 노조 측이 요구한 평균 198만 엔보다 12만 엔 적은 186만 엔으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현대차의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노사 간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진은 지난해 현대차 노사의 임금협상 합의 모습. 윤여철 사장(오른쪽)과 윤해모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장이 임금협상에 잠정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
도요타 노조는 임금 인상 자제뿐 아니라 노조가 자동차 판촉 캠페인도 주도하고 있다. 지난 1월 도요타 자동차 그룹 소속 300개 노동조합의 대표 단체인 전 도요타 노련(全豊田勞連)은 “도요타 자동차 판촉 캠페인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노조가 자발적으로 판촉에 나서자 회사 측은 부장급 이상 모든 직원이 도요타 한 대 더 갖기 운동을 시작했다.
세계 1위 업체는 노사가 합심해 위기극복에 주력하고 있지만 현대·기아차는 아직 그런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위기에도 현대차 노조는 공식적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판매량이 떨어지면서, 일감도 30% 이상 줄고 있는 상황임에도 임금은 예전과 똑같이 달라며 파업을 벌이겠다고 공언 중이다.
공장 간 일감 나누기 수용…변화 조짐
현대차 노조는 또 버스, 트럭 등 상용차를 생산하는 전주공장은 판매량이 줄고 재고가 쌓이는 상황에서도 지난해 합의한 주간연속 2교대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재 전주공장 상황은 경제위기 여파로 주간 1교대 물량도 다 팔지 못하는 상황인데 노조가 지난해 합의를 근거로 주간연속 2교대를 고집하고 있다”며 답답해 했다.
1987년 결성된 현대차 노조는 1994년 한 해를 빼고, 14년 연속 파업이라는 대기록을 갖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15년 연속 파업도 불사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현대·기아차 노조가 파업을 통해 임금인상을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위기 뒤에 오는 과실까지 따먹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는 현대차 국내공장의 뒤처진 생산성이 증명한다. 현대차 울산공장과 아산공장의 시간당 생산대수(UPH)는 각각 53대와 63대로 미국 앨라배마 공장의 93대, 중국 베이징(北京) 공장의 68대에 비하면 턱없이 효율성이 떨어진다.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일본 도요타와 비교하면 60%에 불과한 수준이다.
다행히 현대차 노조는 지난 19일 그동안 사측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공장 간 일감 나누기를 수용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공장별로 생산차종이 엄격히 제한돼 있던 현대차의 생산방식이 이번을 계기로 혼류생산(한 라인에서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바뀔 경우 현대차는 시장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또 일감이 줄어든 공장 근로자들에게 일감이 몰리는 공장의 물량을 넘겨줌으로써 고용안정과 임금하락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윤해모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장은 19일 발표된 담화문에서 “중장기적으로 국내 공장 물량 확보를 위해 단기적으로 ‘물량 나누기’를 할 수밖에 없고, 장기적으로 경기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다차종 생산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노조에서도 혼류생산이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생산의 탄력성 확보를 통한 회사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번 조치로 현대차 노조는 그동안의 강성 이미지를 일부나마 씻어 낼 수 있게 됐다. 현대차 노조가 살기 위해서도 노사 협력은 불가피하다. 회사가 망하면 노조도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미국의 ‘빅3’가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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