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침체가 현대미술엔 호재?
윈턴 마살리스의 4인조 재즈 밴드가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이나 파리 근교의 스타드 드 프랑스, 또는 뉴저지주의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연주한다고 상상해 보라. 드라이아이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분위기의 연무와 불꽃놀이, 거대한 앰프와 스피커.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와 담배 라이터의 불빛을 흔들며 괴성을 지르는 청중 5만 명.
이런 상황이라면 재즈는 어수선하고 요란한 분위기에 짓눌려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재즈는 트럼펫과 피아노, 콘트라베이스와 드럼 연주자가 아늑한 클럽 안에서 그들의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는 청중을 앞에 두고 연주해야 제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미술에서도 그런 불상사가 빚어졌다.
미술 전시회가 대규모 청중 앞의 시끌벅적한 헤비메탈 콘서트처럼 변해 버렸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와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지만 그 뿌리는 앤디 워홀과 팝아트의 전성기인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위미술가들도 더는 불만에 찬 공상가나 고통 받는 외톨이가 아니라 말주변 좋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업가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또 한 세대 뒤엔 줄리언 슈나벨과 데이비드 살레 같은 전위미술가들이 미술을 수익성 큰 사업으로 탈바꿈시켰고, 대미언 허스트는 미술학도로서 상어 등 대형 동물을 포름알데히드가 든 유리 상자 안에 넣은 작품을 꿈꾸었다. 괴짜들만 택하는 진로로 간주되던 현대미술가라는 직업도 그때부터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처럼 그리 특이하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대학교수들이 전시회 카탈로그나 미술잡지에 평론의 형태를 빌려 특정 작품을 광고하는 글을 실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론가들은 아주 복잡한 용어를 사용해 가며 상업적인 미술 작품들을 반 고흐나 피카소, 또는 뒤샹의 작품처럼 기존 질서를 뒤엎는 대담한 작품으로 치켜세웠다.
그런 홍보는 효과가 있었다. 화랑들이 번창했고 수집가들은 메디치가(중세 유럽의 예술을 후원한 이탈리아 가문)의 귀공자들처럼 명사 대접을 받았다. 또 미술 잡지들은 패션 잡지 보그처럼 두꺼워졌고 대중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그리고 미술관들은 관람객으로 넘쳐났다. 2007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 수는 520만 명에 달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엄청난 숫자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관람객 수는 연간 한 미술관당 결코 100만 명대에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마치 대형 콘서트장을 찾는 사람들이 윈턴 마살리스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대에 자욱한 연무와 화려한 불꽃놀이, 흥분한 관중 속의 일부가 되고 싶은 기분에 끌려서 가듯 미술관을 찾는다.
아주 오래전 실시된 조사에서 미술관 관람객들이 한 작품을 보는 데 소비한 시간은 평균 2.3초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요즘 사람들이 한 작품에 집중하는 시간에 비하면 ‘영원’에 속한다. 요즘은 아상블라주(폐품·일용품 등을 끌어 모아 만든 작품) 조각이나 개념미술 작품, 난해한 설치미술 작품 등을 파는 상업적인 화랑들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또 베네치아와 파리, 베를린, 뉴욕 휘트니 미술관뿐 아니라 마카오와 시드니, 한국의 광주에서도 대규모 비엔날레가 열린다. 이들 비엔날레 행사는 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초라해 보일 만큼 화려하고 웅장하다. 또 미술품의 대형 마트 격인 각종 ‘아트 페어’에선 점잖은 화상들이 마치 중고차 세일즈맨처럼 작품 팔기에 여념이 없고 돈 많은 수집가들이 백화점 세일에 가는 주부들처럼 몰려든다.
아트 바젤 마이애미(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스위스 아트 바젤의 자매 미술제)에는 제트족들이 워낙 많다 보니 전시장 주변에선 화물 컨테이너를 활용한 ‘위성’ 미술제들까지 판을 친다. 한편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매혹적이고 눈부신 현대미술관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스페인 빌바오(미술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름 없는 소도시에 불과했다)에 세워진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 시초다.
수집가들이 미술관 사업에 직접 나서기도 한다. 찰스 사치는 런던에, 도널드와 메라 루벨은 마이애미에 미술관을 세웠다. 급격히 늘어나는 소장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려면 미술관 규모의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상은 과열된 미술시장 덕분이었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풋내기 화가들이 이류 화랑에서 데뷔전을 열어도 그림 한 점당 1만~2만 달러를 요구했다.
또 현존하는 현대미술가 중 경매에서 작품 한 점당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이 100명에 가깝다. 과열된 미술시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한 수집가가 어떤 아트 페어에서 최초로 공개된 1960년대 이류 추상화가의 그림을 보다가 가격이 10만 달러가 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했다면 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을지 모르겠네요.” 현대미술품은 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대미언 허스트는 지난해 소더비 경매장에 새 작품을 직접 내놓아 1억8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거기에 더해 다이아몬드로 뒤덮인 인간 해골 모양의 작품을 1억 달러에 팔았다. 지난해 11월에는 그 자신조차 현대미술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그런 호황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리처드 세라의 인상적인 조각 작품 ‘비틀린 타원들(Torqued Ellipses)’이나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추상화가 엘리자베스 머리의 멋진 회고전, 뉴욕 센트럴 파크에 설치됐던 크리스토의 대형 설치미술 작품 ‘게이츠(Gates)’ 등은 대규모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위의 예는 뉴욕에 국한됐지만 호황기 동안 세계 각지의 미술 중심지는 제각기 손꼽을 만한 작품과 전시회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제 호시절은 끝났다. 현대미술이라는 칵테일을 휘젓던 든든한 재정이라는 빨대가 잔에서 거둬졌다. 2007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과 크리스티 경매장은 각각 3억1600만 달러와 3억2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2008년에는 매출이 1억2500만 달러와 1억1400만 달러로 떨어졌고, 경매가 열릴 때마다 세 작품 중 한 작품은 아예 팔리지 않았다. 아트 바젤 마이애미는 2008년 매출 감소폭이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일부 화상은 구매자들로부터 수금하는 데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마치 깨진 접시 조각들을 붙여 만든 슈나벨의 오래된 작품에서 접시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듯 화랑들이 추락했다.
화랑을 운영하는 어느 대형 화상은 얼마 전 직원들에게 ‘실적이 부진한 직원’을 계속 고용할 형편이 아니며, 직원들도 자신처럼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화랑 일에 매달려줘야 하겠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아트택틱 주식회사라는 리서치 전문회사에서 내놓는 서양미술시장신뢰지수(WAMCI)가 지난해 5월 이후 56에서 10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뭔가 나쁜 징조라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요즘 미술관과 화랑들엔 LA 현대미술관(MOCA)의 사례가 교훈이 될지 모른다. 이 미술관은 LA 시내의 두 건물에서 개관한 뒤 ‘세계적인’ 전시회를 개최해 왔다.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가 설계한 건물은 호황기가 시작되던 1985년 문을 열었다.
거기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의 나머지 한 건물은 경찰 차량 차고로 쓰이던 곳을 프랭크 게리가 개조했다. MOCA는 최근 퇴직한 제레미 스트릭 전 관장 시절 미술관 기금의 원금이 바닥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가 LA의 억만장자 엘리 브로드가 내놓은 3000만 달러로 가까스로 구제 받았다.
이 미술관은 그 대가로 브로드가 기부한 액수만큼의 기부금을 자체적으로 모으고, 소장 작품을 이용해 비용이 적게 드는 전시회를 더 많이 열겠다고 약속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 만한 작품을 비싼 값에 빌려 여는 전시회를 줄이고, 미술관 측이 심사숙고해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사들인 작품들을 이용한 전시회를 늘린다는 뜻이다.
때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이번 경기침체가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왜곡됐던 현대미술 시장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팀 이튼은 “최근의 변화는 어떤 작품이 중요한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주체가 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황이 더 나빠질 가능성도 있다. 현대 미술관들에 주어진 기부금 액수가 30~40% 감소했다고 한다. LA의 화상 잭 러트버그는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아까운 환자 몇몇을 잃게 될 듯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부 훌륭한 미술가와 화랑들의 파산을 일컫는 말이다. 이튼은 “일반 사회는 고사하고 미술계 내부의 진정한 도덕적 재편도 꿈꾸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서광이 비친다.
일류 현대미술품을 취급하는 화상 캐롤 재니스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작품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홍보만 떠들썩했지 실속은 별로 없는 이류 전시회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독창성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비싼 작품들이 화랑의 조명을 받는 일도 줄게 된다. 화랑 관계자들의 태도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할 듯하다.
독일의 미술 평론가 우테 톤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가을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아트 페어에선 화랑 관계자들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성의껏 설명을 해주었다. 이전에는 돈을 싸들고 가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몬트리올의 개념미술가 조슬린 피셋은 “지금의 경제위기로 일정한 틀을 강조하는 물질적인 작품보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순간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우 이상적인 희망이다.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예술을 탄생시킨 원동력은 탐욕과 허세가 아니라 이상주의였다. 현대미술이 지금 겪는 혹독한 고통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른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민주, '대통령 재판 중단법'· 법사위 소위 단독 처리(상보)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백종원, 15년 만 방송 활동 중단 선언..무슨 사연?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고개숙인 최태원 “SK그룹 전사 보안체계 검토”[전문]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쪼개기 보호예수’ 백종원, 더본코리아 오버행 우려 잠재울까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비만약에 150억 달러 투자 나선 화이자, 디앤디파마텍·인벤티지랩에 호재?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