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 해프닝…세계 눈길 조선에 쏠리다
오보 해프닝…세계 눈길 조선에 쏠리다
1. 에밀리 브라운이 대한제국 황후가 되었다고 보도한 기사. (Boston Sunday Post, 1903. 11. 29) 2. 정장 차림의 고종 황제. 3.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생활하던 경운궁 돈덕전. 에밀리 브라운이 실존했다면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고종 폐위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
1903년, 주한 미국공사 알렌(H. N. Allen)은 특별한 휴가를 보냈다. 6월 1일 서울을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항해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6개월 동안의 긴 휴가였다. 그가 의료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한 것은 1884년.
그의 한국 생활도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알렌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왕립 병원 제중원을 설립했고, 왕실의 시의(侍醫)로 일하면서 한국 국왕의 외교 자문 역할도 맡았다. 1887년 주미 한국공사관이 설치될 때는 참찬관으로 정식 임명돼 2년간 한국인 ‘초보’ 외교관들의 워싱턴 적응을 도왔다.
1890년부터는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로 일했고, 7년 후에는 공사로 승진했다. 주한 미국공사로 근무한 지도 벌써 6년째였다. 한국에서 낳아 기른 자식들은 훌쩍 자라 1899년부터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 알렌은 런던에서 자식들도 만났고, 보스턴에 들러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진학하게 될 MIT도 둘러보았다.
9월에는 워싱턴에서 루스벨트(T. Roosevelt) 대통령과 만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문제를 상의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편집장과 인터뷰를 했다. 11월 20일, 알렌은 긴 휴가를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은 채 하루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6개월 동안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이라는 정체불명의 미국 여성이 주한 미국공사관을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라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외국공관들의 문의가 이어졌고, 한국 황실에 일자리를 구하려는 미국인들의 이력서가 쇄도했다.
간호사, 의사, 가정부, 가정교사, 마부, 요리사, 심지어 치과의사들까지 이력서를 보내왔다.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성이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었다는 기사를 미국의 유력 일간지들이 잇달아 게재한 탓이었다.‘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1903년 11월 29일자 기사 ‘어떻게 하나뿐인 미국인 황후는 왕관을 쓰게 되었는가?’는 미국의 ‘평민 출신’ 에밀리 브라운이 대한제국 ‘황후’에 등극하기까지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에밀리 브라운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해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한국에서 황제는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선교사의 딸에서 대한제국의 황후로
황제는 선교사의 딸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한동안 에밀리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황제가 이른 시일 내에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에밀리는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교회 일을 그만두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1903년 8월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거행된 평민 출신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알라딘과 아라비아 공주의 결혼식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했다. 책봉식이 거행되기 며칠 전부터 예행연습이 시작되었고, 책봉식 당일에는 아침부터 전국에서 축하객들이 사대문 안으로 구름처럼 밀려들어왔다. 진군 신호가 울리자, 황제의 친위대 1000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를 보무당당하게 행진했다.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리자 황궁 문이 열리고 거대한 가마 두 대가 나란히 거리로 나왔다. 한 대에는 황제가, 나머지 한 대에는 황후로 책봉될 에밀리가 타고 있었다. 에밀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실의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했다. 황후 책봉식에는 문무백관은 물론 미국공사, 일본공사, 영국영사 등 각국 외교 사절이 참석했다.
주한 미국공사관 성명서(1903) 주한 미국공사관에 더 상세한 문의사항이 있는 분께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제는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한 사실이 없다. 에밀리 브라운 양의 놀라운 결혼설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간호사, 가정부, 가정교사, 의사, 유모 등 외국인 초빙 계획을 들은 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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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는 ‘아침 여명’(Dawn of the Morning)이란 뜻을 지닌 ‘엄 황후’(Empress Om)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아들을 출산하면 언젠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아들은 역사상 최초로 미국인의 피가 흐르는 황제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일간지들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지역 신문이 보도한 기사를 인용·각색해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뉴질랜드에서 간행된 ‘이브닝 포스트’ 1903년 9월 12일자 기사는 ‘뉴욕 헤럴드’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간행된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는 식이었다.
에밀리 브라운의 나이는 24세에서 43세까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했고, 고향도 오하이오에서 위스콘신까지 제멋대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 브라운 목사가 화가 나 결혼식 참석을 거부하자 미국공사 알렌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알렌은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서로서로 베껴쓰다 보니 허무맹랑한 기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확실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 Hulbert)가 서울에서 간행한 ‘코리아 리뷰’는 1903년 11월호에서 오보의 시작이 오스트리아에서 간행된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라고 확신한 듯 “미국 신문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오보가 처음 등장한 곳이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푸념했다.
알렌은 “당시 한국에는 그런 기사의 근거가 될 만한 사건은 그림자조차 없었지만, 기사에는 실존하는 장소와 인물, 심지어 나까지 등장시켜 그럴듯하게 꾸며놓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알렌의 거듭된 항의에도 오보를 낸 미국 일간지들은 정정기사를 게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퇴위한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에밀리 브라운의 근황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소동의 기원에 대해 대한제국 궁내부 외교 고문 샌즈(W. F. Sands)는 훗날 색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당시 많은 외국 기자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쟁이 발발하지 않자, 맨손으로 귀국하게 된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위스키 잔을 부딪치며 지어낸 기사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가설이지만, 검증할 방법은 없다.
한·미관계사 연구의 권위자 김원모 교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알렌의 자작극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알렌이 그 신문 편집장과 인터뷰한 직후에 게재되었고, 에밀리 브라운의 고향이 알렌의 고향인 오하이오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알렌이 거짓 정보를 흘린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잔꾀를 부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원모 교수의 지적과 달리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가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것도 아니었다. ‘LA 타임스’ 1903년 7월 19일자 기사 ‘이제 보위에 오르다’는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해명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알렌은 가족과 함께 런던에 있었으니 그가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개연성은 전혀 없다. 기사 첫머리에 ‘특종’ 표시와 함께 “도쿄에 있는 미국 선교단체에서 직접 타전된 것”이라 밝혔으니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에 취재를 나간 외국기자들이 술김에 조작한 기사라 볼 수도 없다.
‘엄비’가 ‘에밀리’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위스콘신 애플턴의 산골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에밀리 브라운은 40대에 이른 지금은 대한제국의 엄(Om) 황후이자, 대한제국 황위 승계자의 어머니다. 지난 1월, 대한제국 황제는 재위 4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후궁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에밀리 브라운을 황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들을 황위 승계자로 선언했다.
황후로 책봉되기 전 에밀리 부인(Lady Emily)으로 알려졌던 그녀는 이제 ‘아침 여명’을 뜻하는 엄 황후가 되었다. 에밀리 브라운은 장로교 순회 목사 헐버트 브라운과 무척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에밀리는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약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어를 빨리 익힌 그녀는 교회의 통역으로 정부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에밀리의 미모는 황제에게 보고되었고, 황제는 그녀에게 후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에밀리는 분개해서 거부했다. 2년 후, 에밀리는 국사(國事)가 허락할 때 결혼하겠다는 황제의 진지한 약속을 믿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직후, 황제가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헐버트 목사의 믿음과 달리 오보의 진원지는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날조된 기사는 아니었다. 대한제국에 실제로 엄비가 있었다. 민비가 일본 낭인의 칼에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이후 엄비는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 엄비는 아무런 봉작이 없는 궁인이었다.
1897년 영친왕이 태어난 이후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1900년 순빈(淳嬪)으로 승격되었다. 1903년 1월, 엄비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하기로 결정되었고, 그해 12월 책봉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황귀비가 되었다. 엄비의 아들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순종이 황위에 오른 1907년이었지만, 엄비가 황귀비에 책봉되는 순간,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는 영친왕으로 승계될 것임이 확실해졌다.
이처럼 엄비의 일생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곤 에밀리 브라운과 흡사했다. 미국 기자가 기사를 날조한 것이 아니라 엄비를 에밀리로 오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엄비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남짓 거주했는데, 그때 러시아공사관에 드나들던 서양 여성을 엄비로 오인했을 수도 있고, 미국인 귀에 ‘엄비’가 ‘에밀리’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미국 언론이 ‘토종’ 한국인 엄비를 에밀리로 둔갑시킨 덕분에 애꿎은 주한 미국공사관만 ‘황제 사위’ 덕에 일자리를 구해보려는 미국인들의 등쌀에 시달렸던 셈이다.
궁인에서 출발해 황귀비에 오른 입지전적 여성 엄비는 누구? 하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엄비를 궁궐에서 내쫓는 선에서 타협했다. 엄비는 사가(私家)에서 10년을 수절하며 환궁할 날을 기다렸다.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자 고종은 닷새 만에 엄비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엄비가 찾아와 눌러앉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고종이 황후 자리를 비워둔 것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에 대한 항의표시이기도 했지만, 명성황후만큼이나 권략(權略)이 뛰어났던 엄 황귀비의 견제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왕실은 장희빈 이후 후궁을 중전으로 책봉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엄 황귀비는 황후가 될 수 없었다. 어차피 황후가 못 될 것이라면 황후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영친왕이 10년이나 연상인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엄 황귀비의 후광 덕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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