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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 21년간 제물포·서울 랜드마크 바꿨다”

“사바틴, 21년간 제물포·서울 랜드마크 바꿨다”

구(舊)러시아공사관, 독립문, 덕수궁 정관헌·중명전 등 지금도 서울 정동 일대에는 19세기 말 건립된 서양식 건축물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들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 그는 경복궁 시위대(侍衛隊: 근위대)로 복무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경위로 조선을 찾았으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21년간이나 머물렀을까?

1882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교부) 협판(차관) 겸 총세무사(국세청장)로 임명된 묄렌도르프는 이듬해 1월 해관(海關: 세관) 설립을 위한 차관 도입과 해관원 모집을 위해 청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 13년 동안 청국 해관과 독일 영사관에서 천덕꾸러기로 전전했던 묄렌도르프는 제물포항에 발을 디디자마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권한과 그 어떤 외교관보다도 더 많은 보수와 그 어떤 대신(大臣)보다도 고귀한 지위”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코리안 드림’을 이룬 묄렌도르프가 상하이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만국조계(萬國租界: 유럽인 거주지)에 퍼지자, 동아시아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에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유럽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묄렌도르프는 보좌관 하스(Joseph Haas)에게 해관원 모집 업무를 맡기고, 자신은 차관 도입 협상에 집중했다.

상하이 주재 오스트리아 영사관 직원이었던 하스는 묄렌도르프가 조선 해관의 2인자 자리를 제안하자 주저 없이 영사관을 박차고 나와 조선으로 건너왔다. 하스는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등 다양한 국적의 청년 20여 명을 해관원으로 선발했다.

23세 러시아 청년 사바틴(A. I. Seredin Sabatin)도 외국 조계 측량과 궁궐 건축을 담당할 영조교사(營造敎士)로 선발돼 그해 9월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했다.



러시아 공병에서 해관 토목사로

조선으로 건너오기 전 사바틴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860년 태어나 러시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건축 분야의 2급 자격증을 획득해 러시아 육군 공병(工兵)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추정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이력으로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이 각축을 벌이던 상하이에서 괜찮은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 정부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을 예산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일천한 경력으로 조선에서 자리를 얻고자 한 그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사바틴은 궁정 건축가로 일할 것으로 기대하고 조선으로 건너왔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인천해관 토목사(土木師)였다.

인천해관 소속 14명의 해관원 가운데 해관장, 항장(港長)에 이은 세 번째 직위였고, 연봉도 250달러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서울과 인천을 오가면서 서양식 궁궐 도면을 작성하고, 인천해관 청사를 설계했다. 하지만 그가 제안한 벽돌제조공장 설립안이 비용 문제로 폐기되자 서양식 궁궐 건축 계획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후 사바틴은 15~16명의 조선인 인부를 인솔해 인천 부두축조공사를 지휘했다. 해관 일은 그다지 분주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사바틴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세창양행(E. Meyer & Co.) 사옥 설계를 맡았다. 독일인 마이어가 설립한 세창양행은 같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지원을 업고 무역, 선박운송, 금광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사바틴이 설계한 세창양행 사옥은 6·25전쟁의 포화로 사라질 때까지 60여 년간 인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맡았다. 1885년 조·러 수교 이후에는 러시아공사관 설계를 맡았다. 덕수궁을 굽어보는 정동 언덕바지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은 규모 면에서나 건축미 면에서 다른 나라의 공관을 압도했다.

사바틴이 설계하고 시공한 인천해관 청사와 부두. 왼쪽에 보이는 2층 건물이 인천해관 청사고,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세관 창고.

만일 사바틴이 상하이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맡을 수 없었을, 경험 없는 20대 청년 건축가가 맡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이후 1888년 사바틴은 경복궁 건천궁 뒤편에 신축되는 관문각 공사에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벽돌과 유리가 자재로 들어가고, 증기보일러가 설치된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서양의 군사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친군영의 청사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사바틴은 관문각 공사를 감독하면서 ‘대조선 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지 지도’를 작성했다. 상하이에서 하스가 제안한 외국 조계 측량과 궁궐 건축이라는 임무를 5년 후에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 사바틴은 궁정 건축가로서 최초의 작품인 관문각 공사에 최선을 다했고, 그렇듯 열성인 그에게 고종은 설계·시공에서 재정 집행까지 전권을 부여했다.



궁정 건축가로 고종의 신임을 얻다

하지만 공사가 2년을 넘기면서 엉뚱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애초 재정 집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 관리 현응택이 야금야금 사바틴의 권한을 잠식하더니 결국엔 사바틴을 일개 기술자 역할로 밀어내고 자신이 재정 집행의 전권을 행사했다. 현응택은 공사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불량자재를 들여오고, 비용이 적게 드는 공법을 사용하라는 월권도 서슴지 않았다.

사바틴은 현응택이 자재상과 결탁해 공사비를 착복한다고 의심했다. 공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 천장에서 물이 새는 하자가 발생하자, 사바틴과 현응택은 책임 소재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현응택은 “하자에 대해 왕이 당신을 심문하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라고 하지,

조선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하지 말라. 당신은 외국인이니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며 억지를 부렸고, “왕이 당신을 사퇴시키고자 했으나 내가 나서서 막았다”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4년 만에 관문각 공사가 끝나자 사바틴은 조선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체불된 임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891년 9월부터 체불되기 시작한 임금은 이듬해 11월까지 무려 15개월 동안이나 지급되지 않았다. 밀린 임금을 당장 지급하라는 고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조선 관리들은 갖은 핑계로 임금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로부터 1년 후에야 차관을 얻어 겨우 밀린 임금을 청산했다.

임금 체불 문제는 사바틴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거의 모두가 겪는 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외환 수입은 해관에서 거둬들이는 관세 수입이 사실상 전부였는데, 관세는 각종 차관의 담보로 제공된 데다 지출해야 할 곳도 워낙 많아 밀린 임금을 지불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기 10여 년 전부터 재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목격

임금이 체불된 2년 동안 사바틴은 빚을 얻어 근근이 연명했다. 빚쟁이들은 매일같이 사바틴을 찾아와 빚 독촉을 했고, 러시아공사관까지 사바틴 대신 빚을 상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뒤늦게 지급받은 임금으로 원리금을 상환하고 나니 사바틴의 수중에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 돌아갈 여비조차 남지 않았다.

사바틴은 조선 정부에 여비를 청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여비 지급을 거부하고 대신 해관에 복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서울 총세무사청에 근무하던 사바틴은 1894년 경복궁 시위대(侍衛隊)로 발탁되었다. 시위대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W. M. Dye) 장군을 대장으로 삼아 설립한 조선 최정예 근위부대였다.

사바틴은 고종의 신임을 받은 덕분에 건축가라는 본분을 버리고 ‘용병’이 되도록 강요 받은 셈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사바틴은 다이 장군과 함께 경복궁 안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하지만 새벽 5시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군인이 다급히 사바틴의 숙소에 뛰어 들어와 대궐 전체가 무장한 폭도들에게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숙소 밖으로 뛰쳐나가자 폭도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대궐 안으로 들이닥쳤다. 시위대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한 폭도들은 왕비의 숙소로 우르르 몰려갔다. 사바틴은 폭도들로부터 ‘왕비가 숨은 곳을 말하라’‘왕비가 누구인지 지목하라’는 협박을 받았고, 폭도들이 일본 군인의 지시를 받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날 새벽 폭도들은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폭도들이 물러난 후 일본 공사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은 조선 군인의 소행이라고 발뺌했지만, 사건의 전말을 목격한 사바틴과 다이 장군은 왕비를 시해한 것은 조선 군인이 아니라 일본 군인임을 전 세계에 증언했다. 그날 이후 시위대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었고, 사바틴은 신변 보호를 위해 러시아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사바틴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독립협회의 요청에 따라 사바틴은 파리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설계했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무역회사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을 설계했다. 사바틴은 선박회사 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청일전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서양식 건축물들의 설계를 맡았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덕수궁 정관헌·돈덕전·구성헌·중명전 등을 설계했고, 제물포 외국인구락부와 손탁호텔의 설계도 맡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사바틴은 21년간의 조선 생활을 청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그에게 조선은 결코 안식과 평화의 땅은 아니었지만,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땅이었고, 그를 믿고 기억해 준 이들이 사는 땅이었다. 그가 조선 생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21년 동안 조선을 떠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 서양식 숙박 영업
영욕으로 얼룩진 손탁호텔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제 손탁이 고종이 하사한 땅에다 지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A. Sontag)은 1885년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하는 형부인 베베르(K. Veber)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1854년 프랑스령 알사스에서 태어났지만 보불전쟁 이후 그곳이 독일령으로 편입되면서 독일 국적으로 바뀌었다.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중 출입을 하면서 외국인 요리 접대를 맡았고, 그를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손탁은 1898년 고종으로부터 덕수궁에서 길 하나 건너편 대지를 하사 받아 한국 최초로 서양식 호텔 영업을 시작했다.

손탁호텔은 서양 외교관들과 대한제국 고위관리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고, 정부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종종 이용되었다. 손탁은 1902년 사바틴에게 의뢰해 호텔을 2층 건물로 재건축했다. 2층은 국빈급 귀빈객실이었고, 1층은 일반객실과 식당·커피숍으로 사용되었다.

손탁호텔은 아관파천의 모의가 이루어진 곳이었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기 위해 온 이토 히로부미가 여장을 푼 곳이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서 인수해 기숙사 ·프라이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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