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트렉’에서 워싱턴 정치 엿보기
열한 살 때인 1974년 2월 어느 주말 ‘국제 스타트렉 집회’에 참가했다. 내겐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행사는 뉴욕시 아메리카나 호텔의 여러 연회장에서 동시에 열렸다. 밀린 인파로 불안감을 느낀 호텔의 방화 책임자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소방 통로를 마련하려고 축제를 수 차례 중단시켰다.
그래도 재미있고 아마추어적이면서 동료애가 저절로 느껴지는 행사였다(이 축제를 기화로 그 후 몇 년간 스타트렉 집회가 봇물을 이뤘다). 나는 형, 아버지와 함께 갔다. 한 사람당 5달러를 내고 모인 인파가 대략 1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모두 흘러간 명물 TV 드라마의 열혈 팬이었다.
‘스타트렉’. 당시를 기준으로 5년 전에 지상파 방송에서 종영된 드라마였다. 우리는 각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편이 상영되는 방을 찾아가 다시 한번 환상의 세계에 빠졌다. 등장인물의 차림을 한 사람들의 퍼레이드도 구경했다. 출연 배우들의 체험담도 육성으로 들었다.
미스터 스폭 역을 맡았던 레너드 니모이도 직접 나와 깜짝 쇼를 연출했다(커크 선장으로 열연한 윌리엄 새트너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흥행 쇼를 외면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시엔 호텔에서 담배를 피워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딜러 바’라고 불리던 곳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그곳에선 만화, 수퍼8 홈 무비, 공상과학 서적과 잡지를 비롯해 다양한 ‘스타트렉’ 기념품이 거래됐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담배 연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마음을 지닌 ‘트레키(Trekkies)’들에 둘러싸였다[그 용어는 나중에 경멸적인 의미를 띠게 되면서 대신 ‘트레커(Trekkers)’라는 표현이 사용됐지만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는 대개 창백한 얼굴을 한 범생이 집단이었다. 대다수가 두껍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치렁치렁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그런데도 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로지 내가 속한 종족을 발견한 기쁨뿐이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이동광선을 쏴서 우주선으로 올려줘(Beam me up)”
“워프 속도 계수 10(Warp factor 10)” “페이저를 기절시킴에 설정하라(Set phasers on stun)”, 또는 의사 매코이 박사의 영원한 선언 “그는 죽었네, 짐(He’s dead, Jim)” 등의 유행어를 맘껏 사용했다. 무엇보다 인기를 끌었던 말은 수석 엔지니어 스콧의 “선장, 난 물리학의 법칙을 바꿀 순 없어요”였다.
그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보다 우리가 ‘스타트렉’에 관해 더 많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한때 유행에 그칠 뻔한 영화 장르(공상과학물, 판타지, 특별한 의상을 입은 초영웅 이야기)를 우리가 주류로 편입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엔 생각도 못했지만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구현한 ‘기술광 엘리트 사회’의 선구자였다.
새로운 팬 문화를 잉태하면서, 괴짜 기술광을 멋쟁이로 바꿔가는 과정이었다. ‘스타트렉’은 1966년 9월 NBC 방송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드라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B-17 폭격기를 몰았고 나중에 조종사와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TV 대본작가로 변신한 진 로든베리의 작품이었다.
‘스타트렉’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군대의 옛 이야기를 가장 낙관적인 공상과학 시나리오에 접목한 드라마였다. 지옥향을 그리거나 훈계조가 아니라 마냥 재미 있고 즐거운 이야기였다. 핵폭탄에 의한 최후의 결전이나 우주의 파멸에 관한 피해망상적인 이야기(1950년대부터 조금씩 나오다가 60년대 초에 대거 쏟아져 나왔다)와는 정반대였다.
‘스타트렉’은 23세기가 되면 인류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인류가 서로 힘을 합쳐 은하계 ‘연합’을 구성해 스타십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운반체(우주선)를 타고 행성들을 탐사하며 인도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스타십의 승무원들은 사실상 평화봉사단이다.
다만 그들은 국가를 대신해 행성들을 찾아가며 ‘페이저’라 불리는 초현대적인 총을 휴대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스타트렉’엔 수염투성이이고 가무잡잡하며 성미가 고약하고 제국주의적인 클링곤족 같은 전쟁광 외계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소련인들을 상징하는 듯해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이 주는 두려움을 계속 느끼게 해주었다).
‘스타트렉’의 시청률은 처음부터 실망스러웠다. NBC 방송사도 ‘스타트렉’ 팬들을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듯했다. 하마터면 시즌1로 막을 내릴 뻔했다. 그러나 1966년 말 시작된 편지 보내기 캠페인(로든베리가 배후 조종자 역할을 했다)으로 겨우 시즌2에 들어갈 수 있었다. NBC는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1967년 3월 9일 한 편이 끝나자 한 아나운서가 직접 등장해 이렇게 말했다. “‘스타트렉’은 올가을 다시 방영됩니다. 제발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마십시오.” 시즌2 말에도 종영 소문이 나돌자 팬들의 또다시 나섰다.
방송사 간부들에 대한 전화 공세, 10만 통 이상의 편지(일부 추산에 따르면 100만 통이 넘었다),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의 NBC 건물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 ‘미스터 스폭을 대통령으로’라는 범퍼 스티커 5000장(팬들이 NBC 직원들의 차량에 몰래 부착했다)이 이 드라마를 살렸다. 드라마 제작의 지속을 촉구하는 그런 대규모 탄원은 TV 역사에서 전무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시청률은 계속 떨어졌다. 결국 ‘스타트렉’은 79편이 방영된 뒤인 1969년 종영됐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70년대 초 ‘스타트렉’ 재방송권은 헐값에 주로 UHF 방송사에 배급됐다. 그러자 갑자기 시청률이 치솟았다. 새로 생겨난 ‘스타트렉’ 예찬론자들이 과거 네트워크 방송에서 그 드라마를 봤던 사람들과 제휴했다.
그들은 집회에서 만나 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임을 확인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지만 현대식 열혈팬 네트워크의 초보 체제(지금보다는 까다롭지 않고 선의적이었다)가 만들어졌다. 자, 이제 과거는 그만 돌이키고 그 다음 40년 뒤로 순간이동 해보자. 그동안 TV 시리즈 속편 ‘스타트렉’이 다섯 차례, 극장용 영화 10편(대다수 팬은 홀수 작품이 짝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제11편이 옛날 그대로의 무덤덤한 제목 ‘Star Trek(한국 개봉작 제목은 ‘스타트렉: 더 비기닝’)’으로 나왔다. 이번 영화는 J J 에이브럼스가 감독을 맡았다(그는 ‘미션 임파서블 3’의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TV 시리즈 ‘앨리어스’와 ‘로스트’의 공동 제작자였기 때문에 팬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말한다).
제작사 패러마운트가 그에게 ‘스타트렉’을 처음으로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로 인해 커크 선장, 스폭, 의사 매코이, 통신 담당 언어학자 우후라, 체코프 소위, 항법사 술루, 엔지니어 스콧 등 엔터프라이즈호의 최초 승무원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이 탄생했다. 이 영화는 지난 10년 동안 쏟아진 암울한 판타지 영화에 물린 관람객들에게 청량제가 될 듯하다.
음침한 분위기의 ‘매트릭스’ 시리즈, 스필버그가 만든 불만에 가득 찬 영화들(‘A.I.’,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주 전쟁’), 알폰소 쿠아론의 무자비한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심지어 어린이용 ‘해리 포터’ 시리즈까지도 선의 궁극적인 승리보다는 악의 부상을 더 부각시켰다. 물론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원전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대다수의 기본 원칙은 존중하면서도 세부 사항을 많이 뜯어고쳤다. 그래서 트레키들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대본작가 앨릭스 커츠먼과 로베르토 오르치는 연속성에서 생기는 문제를 만회하려고 블랙홀이 촉발한 시간여행이라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과거 우리가 알았던 ‘스타트렉’ 세계와 문자 그대로 대안 현실인 이번 영화의 배경에서 생기는 간극을 메우려는 의도다.
팬들은 그 논리를 두고 올여름 내내 논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 게시판에 우려를 표명한 트레키들은 궁극적으로 기뻐할 듯하다. 에이브럼스가 과거 스폭 역을 맡았던 니모이를 고령에도 불구하고 영화 줄거리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니모이는 ‘스폭 프라임(원조)’이라는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
바로 이 스폭의 이야기가 또다시 시대정신을 지배할지 모른다. 백악관에 스폭이 속한 벌컨족과 비슷한 인물이 들어앉았기 때문에 스폭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성격이 어느 때보다 더 흥미롭고 시의 적절해 보인다. 논객들은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내내 오바마의 침착하고 논리적인 언행과 뾰족한 귀가 미스터 스폭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이제 이번 영화에서 스폭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의 복잡한 인종적 배경이 드러나면 ‘오바마와의 비교’가 더욱 그럴싸하게 생각될 듯하다. 오바마처럼 스폭은 서로 다른 종족(인간과 벌컨) 간의 결혼으로 태어나 숱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린다.
어린 시절의 스폭(자하리 퀸토가 맡았다)은 인간인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벌컨족 아버지 사렉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동화되고 싶어한다(벌컨족은 감상적인 감정을 피한다). 어린 스폭은 벌컨족으로부터는 자신이 속으로 부적절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실제로 그는 한 장면에서 커크 선장을 목을 조르며 공격한다).
반면 인간들로부터는 감정이 너무 메말랐다며 그렇게 자신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는다. 오바마는 ‘스타트렉’의 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백악관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레키들은 지난해 유세에서 오바마가 “나는 ‘스타트렉’을 보며 자랐습니다. 나는 최후의 미개척지를 믿습니다”라고 말한 뒤로 그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만약 오바마가 이 영화를 본다면 스폭이 처한 입장에 특별히 공감할지 모른다. 요즘 논객들이 오바마에게 좀 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라고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엔 흥미로운 비유적 암시가 하나 더 있다. 어쩌면 완전히 우연일지 모른다. 패권 의지가 강했던 부시 행정부 대신 오마바 정부가 들어서면서 로든베리가 만들어낸 허구적 우주의 원칙이 현재의 미국 정책과 일치한다는 느낌을 준다.
오바마의 외교정책은 미국인들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적어도 현재로선 이문화 간의 교류를 강조하고 제국주의적 거들먹거림을 삼간다. 그런 정책은 ‘스타트렉’의 은하계 연합이 규정한 ‘프라임 디렉티브(Prime Directive: 대원칙)’와 매우 유사하다. 인간이 외계 문화를 존중해야 마땅하며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라크 침공 같은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중이 이 모든 은유적 반향을 받아들일까? 10대 관람객은 지적인 의미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옛 트레키들도 영화관 순례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들 중 일부는 최근 “이 영화는 여러분 아버지의 ‘스타트렉’과 다릅니다”라는 광고 문안에 모욕을 느꼈다는 글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다.
‘트리블(tribble: 영화에 나오는 허구적 동물)’과 ‘트리코더(tricorder: 영화에서 한 구역을 스캔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를 구별하지 못하는 비(非)트레키들과 청소년들을 유인하려는 광고다.
나 개인으로서는 옛날에 좋아했던 영화의 부활을 보고 이 작품이 현 시대와 우리 세계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고 느끼면 대만족이다. 다양성과 이해심, 희망을 찬양하는 영화는 분명 대담하다. ‘스타트렉’은 바로 이 시간 이곳 지구와 최후의 미개척지에서 우리가 수직 이륙했다고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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