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토 확대’에 社運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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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아시아 예선 경기가 벌어진 2009년 6월 17일 밤. 후반 32분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은 바로 그 순간, 주점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가 골든벨을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리고 그 골든벨이 테이블마다 소주 한 병씩을 공짜로 돌리는 ‘소심한 골든벨’이었다면? 십중팔구 ‘드라이(dry) 샘플링’에 운 좋게 걸려든 것이다.
드라이 샘플링이란 소주회사 영업사원들이 한 주점의 모든 테이블에 자사의 제품을 한 병씩 구입해 돌리는 것을 말한다. ‘웨트(wet) 샘플링’은 영업사원이 직접 경쟁사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만을 공략하는 것을 말한다. 초짜 영업사원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도 이때다.
6월 18일 오후 7시 종로구 관철동의 한 보쌈집. 이 지역을 담당하는 롯데주류의 2년 차 영업사원이 진로의 참이슬을 마시는 70대 노인 3명에게 자사의 처음처럼 한 병을 들고 주저 없이 접근한다. 올해 스물아홉인 그는 어르신들에게 기어이 처음처럼 한 잔씩을 맛보게 한다.
이런 자리라면 반말은 기본이다. 결국 그는 “앞으로는 이눔만 먹을란다”는 말을 듣고서야 테이블을 떠난다. 어색해 보이는 젊은 커플도, 20대 직장여성들의 소주 파티에서도 그는 결코 쭈뼛거리지 않았다. 처음처럼 한 잔을 비운 사람들은 그에게 명함까지 준다. 롯데제과의 과자를 보내준다는 선물공세에 넘어간 것. 롯
데의 영업사원 박씨는 지금 웨트 샘플링을 하고 있다. 같은 날 오후 7시 30분 종로구 청진동. 진로 영업사원 유현승 주임은 벌써 두 가게째 웨트 샘플링에 실패했다. 가게 한 곳은 얼마 전에 유 주임이 메뉴판과 현수막을 제공해 준 곳. 그래서인지 어느 테이블에서도 처음처럼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한 등갈비집 추풍령에서도 유 주임은 처음처럼이 놓인 테이블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샘플링 대신 등갈비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모님이 직접 하시느냐”며 한참 수다를 떤다. 기자가 몇 차례고 평소 동선을 따라 움직여 달라고 주문했고 실제로 처음처럼 포스터가 붙은 가게도 있었지만 그가 웨트 샘플링을 보여줄 수 없었던 건 진로와 롯데의 시장 점유율 차이 때문이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서울에서 롯데의 처음처럼은 지난해보다 4.2%포인트 오른 24.5%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 시장의 75%는 진로가 차지하고 있다. 유 주임은 “샘플링은 고객들에게 우리 브랜드를 알리는 게 목적인데 오후 8시가 넘어가면 손님들이 취기가 올라 효과를 못 본다”고 말했다.
소주회사 마케팅이 샘플링처럼 일상의 기쁨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독점에 가깝던 진로의 점유율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지키려는 진로와 도전하는 롯데의 마케팅 대결은 이제 정규전을 넘어 게릴라전 수준에 이르고 있다. 과거 리베이트, 간판 달아주기 등 단순했던 소매점 마케팅은 이제 세밀한 전략과 아이디어, 소비자 심리까지 고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쟁사 술병 놓인 테이블에 공짜 공세
소주시장은 전형적인 과점시장이다. 서울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부산시장에서 C1으로 유명한 대선주조의 점유율은 최근까지 80% 이상이었다. 제품 종류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직도 업체마다 대표상품은 하나다. 진로는 참이슬, 롯데는 처음처럼, 보해는 금복주다.
일반 산업처럼 타깃별, 가격대별 생산과 마케팅이 이뤄지기 힘들다. 진로가 제이를, 대선이 봄봄을 내놓는 등 라인을 세분화하고 있지만 아직 시장은 나뉘지 않았다. 한상완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는 “전형적인 과점시장의 특성을 보이는 게 소주시장”이라며 “통신시장도 3개 과점업체가 유사한 상품 하나로 경쟁하면서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업체들이 저도주를 상품라인에 포함시키면서 시장 세분화에 나서는 것은 이런 치열한 출혈경쟁에서 빠져나오려는 자구책이다. 진로는 도수를 끌어내리면서 참이슬, 참이슬 후레쉬, 제이로 상품을 나누고 있다. 롯데는 처음처럼 자체가 저도주의 상징이었고 지방 소주회사도 저마다 2~3개씩의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마케팅 타깃도 도수에 따라 30~40대 남성, 20대 여성 등 세분화하는 추세다. 한상완 교수는 “소주시장이 세분화되면 극도로 치열한 마케팅 경쟁도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소주시장 마케팅을 경쟁, 전쟁 심지어 복마전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수도권 시장 점유율을 지난해보다 큰 폭 키운 처음처럼의 저력 ▶롯데그룹의 등장 ▶올가을 상장을 앞두고 있는 진로 ▶불황에 잘 팔린다는 소주의 올 1분기 판매가 처음으로 전년보다 3%나 줄어들었다는 점을 든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올해 3월 롯데주류가 두산주류를 인수하면서 처음처럼의 올 4월까지 전국 누적 판매량은 437만 상자로 지난해보다 5.8% 증가했다.
점유율은 12.4%로 전년 동기 대비 1.4%포인트 높아졌다. 서울 지역 점유율은 지난해보다 4.2%포인트 상승한 24.5%를 4개월 동안 유지하고 있다. 반면 진로는 올 4월까지 누적 판매량이 1709만 상자로 지난해보다 10.2% 감소했다. 같은 기간 시장점유율은 48.6%로 2.4%포인트 낮아졌다.
이를 두고 진로는 지난해 12월 말 참이슬의 출고가가 5.9% 인상됐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사둔 물량이 많아 착시현상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처음처럼도 올해 1월 출고가를 6.1% 인상했지만 판매실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진로의 한 중간 간부는 “진로가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게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며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진로가 상장을 앞두고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도매상에 물건을 채워 넣는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하지만 진로의 유현승 주임은 “오히려 상장을 앞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도매상 수가 많아지고 불황으로 모두 힘든 상황인데 어떤 도매상이 물건을 받아주겠느냐”며 부인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주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도매상이나 군납 등 1차 거래선 영업보다는 일반 주점을 커버하는 2차 거래선 영업에서 신경전이 늘고 있다. 2차 거래선은 매출목표가 없어 편해 보이지만 경쟁사와 항상 마주쳐야 하는 최전선이다.
종로나 강남역 등 소주업체들의 주요 공략지에는 두께가 5㎝는 넘어 보이는 소주 광고 포스터가 붙은 업소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진로와 롯데가 상대방의 포스터에 자사 것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종로구 관철동에서 롯데 영업사원과 거리를 걷던 중 마주친 진로 영업사원은 롯데 측의 인사를 받고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영업현장의 치열함만큼 마케팅 컨셉트 경쟁도 치열하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디어 도용이다. 상품라인이 많은 산업에서는 2위 업체가 1위 업체의 제품과 마케팅을 카피한다. 과자나 음료수가 그렇다. 기생전략이다.
하지만 소주시장은 단일 제품으로 승부를 보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 급한 2위 업체의 아이디어를 1위 업체가 카피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마케팅 전략이라면 브랜드 명칭은 곧 지워지기 때문이다.
진로의 상장, 롯데의 전략 주목
롯데주류 백승선 과장은 소주 마케팅업계에서 알아주는 아이디어 뱅크다. 걸어 다니는 소주인형은 백 과장의 대표적인 히트작. 하지만 소주병 색깔과 모양이 비슷하니 불과 몇 주 만에 경쟁사에서도 소주인형을 만들었다. 소주병 입구에 은박지를 씌워서 마시는 아이디어도 백 과장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백 과장은 “시장 특성상 획기적인 프로모션 기법을 만들어도 서로 금세 따라 하게 된다”며 “차라리 차별화된 유행은 저도주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소주 도수 20도가 붕괴된 것이 가장 큰 트렌드였다는 말이다.
소주시장의 마케팅을 심지어 ‘막장 마케팅’이라고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업체들이 기술과 품질 차이까지 포기하기 때문이다. 소주업계 한 관계자는 “소주는 기본적으로 정제주라서 도수가 높을수록 기술의 차이, 즉 맛의 차이가 크다”며 “도수가 낮은 소주에는 첨가물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맛의 차이를 잘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유행에 밀려 제대로 된 기술이 있어도 발휘하지 못하는 업체가 있고 이 업체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순한 소주가 유행이라지만 그 유행은 결국 마케팅 차별화를 위해 업체가 만들어낸 것”이라며 “지금이야 웰빙 시대에 맞고 현대인의 음주문화와 맞아떨어졌지만 순한 소주의 기원은 결국 마케팅의 부산물”이라고 꼬집었다.
소주시장의 마케팅이 항상 단순하지는 않다. 때로는 소비자의 뜻에 맞춰 기껏 만들어낸 마케팅 전략을 포기하기도 한다. 소비자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효리주’ ‘민아주’ 스티커다. 지난해 12월 여의도 직장인들의 회식에서 시작됐다는 효리주는 투명한 소주잔 바닥에 처음처럼 라벨에 있는 이효리의 얼굴을 떼어내 붙여 만든다.
롯데주류 홍보실 김윤종 부장은 “효리주는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소비자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유행을 탄 음주 문화”라고 말했다. 롯데는 효리주 유행이 지속되자 지난 4월 한 달간 광고 모델 이효리 얼굴을 스티커로 만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대거 뿌렸다. 영업사원들은 술집을 돌면서 고객들 술잔에 스티커를 붙여줬다.
진로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역시 지난 4월 2주 동안 광고 모델 신민아의 얼굴을 스티커로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나 둘 다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만에 스티커 제작과 판촉을 그만뒀다. 소비자들이 직접 오려 붙여 만드는 맛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일부 스티커가 요즘도 시중에 나돌지만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배포하고 있다.
이유재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은 자신을 조작하려는 데 반감을 갖고 스스로 하는 데 더 가치를 부여한다”며 “회사가 직접 멍석을 깔아주면 하기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누군가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하고 그 반대면 오히려 하고 싶어 하는 ‘반발 이론’에 따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휴대전화도 회사가 만든 공식적인 명칭보다 효리폰 김태희폰 등 소비자가 직접 만든 애칭을 마케팅에 활용할 때 더 효과적”이라며 “웹2.0 시대 소비자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소주시장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마케팅 전쟁은 연말에 2라운드를 맞이한다.
업계는 진로가 상장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어디에 투입하는지, 또 롯데가 계열사 직원들을 동원해 조직적 영업을 벌일지 여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우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지금보다 더 혼탁한 경쟁이 있을 수도 있고, 예상 외로 수출 등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상완 교수는 “남들이 사용하는 것을 자신도 따라 쓰려는 네트워크 효과는 결국 소비자 인식에 관련된 문제”라며 “소주시장은 과점이라는 시장 특이성 때문에 결국 소비자의 인식과 인지도를 놓고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자릿수 이하의 점유율을 놓고 신경전을 펼쳐왔던 시장에서 ‘소비자의 인식’이라는 문제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소주시장을 지금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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