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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경원선 이으면 시베리아로 가는 수송로 열려

끊어진 경원선 이으면 시베리아로 가는 수송로 열려

강화도에 이어 민통선 기행의 두 번째로 선택한 곳 연천. 한국전쟁의 의미를 담은 6월의 끝자락에서 다시 펜을 든다. 반복적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DMZ와 민통선 일원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이 지역을 어떻게 관리보존하고 개발함이 마땅한가? 국내외 정치 지형 및 남북관계의 미래를 염두에 둘 때 DMZ와 민통선 일원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대전차 방해물 : 하천을 가로지른 대전차 방해물 위로 백로가 한가롭게 노닌다. 보기 드문 자연 습지 상태를 보여준다. ⓒ이상엽

연천은 내게 결코 작지 않은 의미들이 서려 있는 고장이다. 무엇보다 나의 고향 양주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연천은 어릴 적부터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고장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때 나는 의정부에서 왕십리까지 기차를 타고 통학했는데, 당시 함께 통학하던 친구들과 한탄강으로 놀러 간 적도 있었다.

기암절벽이 바라보이는 한탄강가에 텐트를 치고, 통기타 반주에 맞춰 밤새도록 당시 유행하던 김민기와 송창식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이가 들어갈수록 10대의 기억은 애틋한 것으로 남아 있다.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의정부에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던 내게 펼쳐진 서울과 의정부, 그리고 매일매일 만나곤 했던 경원선 인근의 풍경들은 기억 속에 너무도 선명히 인화돼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다. 연천과 관련한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어느 늦은 여름 날, 아버지를 모시고 형님들과 함께 태풍전망대를 찾은 적이 있었다. 동두천과 전곡을 거쳐 우리는 태풍전망대에 올라 이제 막 가을이 오고 있는 비무장지대 풍경을 지켜봤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시골에 살 때부터 가르쳐주신 것 가운데 하나는 각종 풀과 나무, 그리고 벌레들이었다.

어릴 적 벌판이나 산에 나가면 아버지는 눈에 띄는 각종 동식물들, 예를 들어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곤 했다.


상승관측소에서 본 비무장지대


철마 : 신탄리역을 향해 달리는 경원선 기차. 신탄리역은 경원선의 남한 측 최북단 종착역으로 대광리역 다음에 위치한다. 철마는 여전히 달리고 싶다. ⓒ이상엽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하듯, 추상적 지식이란 기실 삶에 큰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구체적 지식이 살아가는 데 유용한 지혜를 주며, 바로 이 점에서 아버지로부터 나는 더없이 소중한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다름 아닌 그것은 자연과 어떻게 공존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태학적 통찰과 상상력이었다.

지난 6월 초 우리 취재팀은 연천으로 향했다. 새벽 6시 국방부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강변북로와 자유로를 거쳐 파주를 지나 연천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탓인지 동행들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나라에서 드문 침식하천인 임진강 얘기가 나오고, 어느 집 장어구이가 괜찮다는 얘기가 나오고, 적성을 지날 때는 감악산에 얽힌 얘기도 나왔다.

연천군 백학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취재팀을 안내할 정훈장교를 기다리며 한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30~40대 남성들이 낯선 시골 식당에서 덤덤히 함께 하는 아침밥은 맛이 좋았다. 다방에 들어가 마신 커피 또한 남달랐다.

걸러낸 커피가 아니라 크림과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이른바 원조 ‘다방 커피’를 시골 다방에서 마시는 것은 우연히 1970~80년대 유행가를 들었을 때 갖게 되는 어떤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했다. 처음 찾은 곳은 상승관측소(OP)였다. 이 관측소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74년에 발견된 제1땅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유해 발굴 : 신탄리역에서 만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홍보하는 사병들. 내년 전쟁 60년을 맞아 군이 벌이는 사업 중 하나다. ⓒ이상엽

비무장지대 안의 제1땅굴 발견 지점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드넓은 연천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초여름 연천평야 풍경은 더없이 한가로웠지만, 시선을 철책선과 감시초소(GP) 쪽으로 돌리니 이내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실제의 제1땅굴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관측소 옆에 마련된 모형을 구경했다. 땅굴은 말 그대로 북한이 기습작전을 목적으로 비무장지대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다. 이제까지 땅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더없이 착잡하면서도 새삼 한반도의 현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을 뜻하는 경계선이며, 더욱이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기도 하다. 상승관측소를 떠나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을 가로질러 태풍전망대로 나아갔다. 창밖에는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인류가 역사를 시작한 이래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돼 왔다. 전쟁은 제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성마저도 파괴해 버리고 마는 사회의 가장 짙은 그늘이자 비극이다. 어떤 이유이든 전쟁은 정당화돼서는 안 되며,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에서 전쟁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새삼 이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은 세계와 사회를 인식하는 하나의 틀이다. 인간의 사유가 다양한 한, 이념 역시 다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념이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그것은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며 다양한 갈등을 촉발시킨다.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사회 갈등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사회를 이루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 이념과 이익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갈등의 폭발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문제는 갈등의 비용과 결과인데, 지불해야 할 비용이 지나치게 클 경우 갈등은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사회 갈등의 가장 극단적 형태가 다름 아닌 전쟁일 것이다. 이념과 갈등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자연 연천이 낳은 유학자 미수(眉 ) 허목(1595~1682) 선생을 떠올리게 됐다.

허목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남인을 대변해 서인의 영수인 우암(尤庵) 송시열과 예송 논쟁을 벌였던 정치가였다.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송시열에게 패했지만, 제2차 논쟁에서는 허목의 견해가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시대를 열었다.
예송 논쟁은 여러 코드가 담긴 논쟁이었다.

현상적으로 그것은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이 벌인 권력투쟁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이라는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국정운영 기조를 둘러싼 논쟁이기도 했다. 서인은 사대부의 위상을 중시한 반면, 남인은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다.


열쇠전망대 : 부근 초소에서 경계병들이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비무장지대의 너른 들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조우혜


연천과 미수 허목

군주가 주도하는 개혁을 강조한 허목의 사상은 이후 성호(星湖) 이익을 거쳐 다산(茶山) 정약용에게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 학파’의 주류를 형성한다. 현실정치 영역에서 정조의 개혁에 크게 기여한 채제공과 이가환의 정치도 바로 현종과 숙종 시대를 장식했던 허목의 정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청년과 장년 시절 초야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다 노년이 돼서야 예기찮게 현실 무대에 진출했던 허목의 삶은 이념과 현실, 학문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분명 유교라는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정치와 현실에 앞서서 가치와 도덕이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일깨워준 지식인이기도 했다.

허목의 묘소가 있는 왕징면에서 벗어나 중면 비끼산 수리봉에 있는 태풍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가 건립된 것은 1991년이었다. 요즘은 곳곳에 전망대가 많이 세워져 있지만, 1990년대 초반 당시 태풍전망대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검문소에서 허락을 받고 전망대로 가려면 고즈넉한 산야를 제법 지나가야 했고, 또 임진강을 건너가야 했다.

그러고 나서 제법 높은 산 위 전망대에서 돌연 펼쳐지는 풍경은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우게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비무장지대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임진강은 바로 여기서 북한 땅으로 들어가며, 지도책을 찾아보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호비령산맥 두류산의 깊은 골짜기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태풍전망대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망대 중 하나다. 전망대에서 휴전선까지의 거리는 800m, 북한군 초소까지는 1600m에 불과하다. 더없이 팽팽한 군사적 긴장과 눈앞에 펼쳐진 산야의 아름다운 풍경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곳이 태풍전망대다.
철책선 앞에서 장병들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이곳에서 근무해 보니 국가란, 나라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한밤중에는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시선을 다시 돌려 비무장지대 안을 바라보니 무성한 풀과 나무들은 어느새 성하(盛夏)의 시간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경순왕릉 : 신라에 귀부해 경주 밖에 유일하게 만들어진 신라왕의 무덤이다. 민통선 안쪽이지만 최근 안보관광 붐으로 일부 해제됐다. ⓒ조우혜


환경위기와 지속 가능한 삶

민통선을 포함한 비무장지대 일원이 갖는 생태학적 가치는 오래전부터 주목 받아 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겪게 된 환경위기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물론 생태계 위기에 대한 각종 소식을 이제는 무감각할 정도로 접하고 있다.

성장 위주의 경제발전에 따른 각종 공해와 오염의 증대는 국민의 생명 및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미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전지구적으로 보더라도 생태계 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해양오염과 산림파괴 등과 같은 환경위기는 이제 빈곤, 불평등, 그리고 전쟁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이런 환경오염이 낳은 중대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생물 다양성의 급격한 감소인데, 특히 열대우림에서의 생물종 감소는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활세계로 돌아와도 환경위기는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생활쓰레기 증가에 따른 환경오염은 대표적 경우다.

또 산업화 과정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고도화되면서 크게 늘어난 일회용품 사용도 문제다. 최근 그 사용이 자제되고는 있지만, 재생이 어려운 일회용품 사용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두말할 필요도 없이 환경보호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중요하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그리고 유해하지 않은 식품은 바로 이 환경으로부터 주어진다. 환경이 파괴돼 다른 생물들이 생존할 수 없는 생태계에서 인간 또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생태학적 시각에서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이 주목 받는 것은 지난 50여 년간 개발과 출입이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과거 경작지나 취락 지역이 습지 등으로 자연생태적 복원이 진행된 지역이라는 데 있다(환경부 ‘비무장지대 일원 생태조사결과 종합보고서’· 2003). 자연 훼손지역에 대한 생태계 복원을 시작할 경우 50년 후의 모습이 바로 이 지역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비무장지대 일원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 일원이 갖는 생태적 가치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먼저 환경부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비무장지대 일원은 50여 년 동안 군사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우수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희귀 동식물을 포함한 수천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등 생물 다양성이 뛰어난” 지역이라는 것이다(앞 책, 31쪽).

구체적으로 비무장지대 및 인접지역에는 식물 1597종(전체 식물의 34%), 어류 106종(전체 어류의 12%), 양서·파충류 29종(전체 양서·파충류의 71%), 조류 201종(전체 조류의 51%), 포유류 52종(전체 포유류의 52%) 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식물까지 고려할 때 비무장지대 일원은 <표> 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생물종을 가진 생물 다양성의 보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앞 책, 31쪽).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이러한 생태적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비무장지대는 들짐승이나 산짐승이 살 만한 터전이 적잖이 훼손됐으며, 그 안의 야생동물들은 남측의 철책선과 북측의 고압선 사이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무장지대가 생태적 보고라는 주장은 학계와 언론에 의해 과장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이해용, 『DMZ 이야기』, 눈빛, 2008). 오히려 이 점에서 비무장지대보다는 민통선 지역이 생태적 가치가 더 풍부하다고 볼 수도 있다.


1. 철책선 걷기 : 한국관광공사와 인천공항면세점 직원들이 열쇠전망대 부근 철책을 걷고 있다. 안보관광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행사였다. ⓒ조우혜

2. 미수 허목의 묘비 : 흰대리석에 전서체로 쓰여있다. 허목 본인이 생전에 쓴 비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총탄에 의해 곳곳이 깨져있다. ⓒ이상엽

3. 전방지역 풍경 : 상시적인 훈련이지만 요즘 같은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연천 시내를 지나는 전차들. ⓒ이상엽

4. 중단점 : 신탄리역 조금 지나 철도 중단점이 있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북한에 귀속됐다가 1951년 남측 지역이 됐다. 1971년 철도 중단점 표지판을 설치했다. ⓒ이상엽


신탄리역에서 꿈꾸는 유럽행 열차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할 때 비무장지대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일부 지역은 훼손됐을 수 있지만, 일부 지역은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지나온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의 관리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비무장지대 일원의 환경을 어떻게 보호하고, 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의 삶과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신서면 신탄리역이었다. 신탄리역은 끊어진 경원선의 마지막 역이다.

경원선은 일제 시대인 1914년 개통된 서울과 원산을 잇는 철도다. 그 길이가 224㎞에 달하는 경원선은 전철 구간을 포함해 현재 용산역과 신탄리역 사이의 89㎞만 운행되고 있다. 먼저 역사(驛舍)를 구경하고 역사에서 조금 북쪽에 떨어져 있는 철도 중단점까지 걸어갔다.

서울에서 의정부와 동두천을 거쳐 달려온 경원선이 여기서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초여름 긴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고대산 쪽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산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후 끊어진 경원선의 복원이 논의됐다.

경원선은 북한의 원산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모스크바는 물론 유럽 여러 도시들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사람은 물론 물류가 수송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경원선 철도 중단점에 서서 언젠가 이 길이 이어지는 날이 오면 베를린행, 파리행, 런던행 열차를 타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 중단점에서 신탄리역으로 다시 걸어오면서 지난번 강화 기행에서 생각했던 동북아 시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다. 동북아 평화체제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략들이 구사돼야 한다.

먼저, 평화와 번영의 동시병행, 동북아 공동체의 지향, 정부와 시민사회의 다층적 협력의 일반 원칙에 대한 동북아 주변 국가들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고, 우리가 이를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이끌어 내야 한다. 동시에, 기존의 이념 구도에 기반한 현실 인식을 더욱 전략적이고 유연한 현실 인식으로 변화시켜야 하며, 대립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 관계를 위한 섬세한 외교적 역량을 갖추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런 대외 전략의 방향성은 외교 및 안보 협력뿐만 아니라 경제 및 사회·문화 협력의 활성화로 구체화돼야 한다. 동북아 공동체가 진정한 지역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내 관련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공유돼야 한다. 이와 관련해선 군사적 긴장 완화와 더불어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 협력이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동북아 사회·문화적 협력에서 상당한 역할을 해 왔는데, 앞으로 이런 역할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에 대한 추억


동북아의 미래에 대한 두서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연천을 떠난 버스는 한탄강을 건너 동두천을 가로질렀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의정부를 지나고 있었다.

의정부는 내가 열 살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자연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양주에서 의정부로 이사를 나온 이후에도 아버지로부터의 학습은 끝나지 않았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버지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가곤 했다. 1970년대 초반 격렬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기에는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얘야, 이게 넓적사슴벌레고 저게 장수풍뎅이란다. 장마가 끝나면 장수풍뎅이가 나타나 넓적사슴벌레를 밀어내고 참나무를 차지하게 된단다.”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건만 너무도 익숙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버스는 의정부를 막 벗어나 동부간선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떠난 연천에로의 짧은 여행도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 연천 취재 여행을 안내해 주신 25사단 김정애 대위, 28사단 한주희 중위, 5사단 황태성 중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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