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학 질병 퇴치에 희망의 빛
후성유전학 질병 퇴치에 희망의 빛
멘델의 유전 법칙? 이젠 거론할 거리도 못 된다. 왓슨과 크릭이 발견한 DNA 이중나선 구조? 이미 한물간 이야기다. 수십억 달러를 들여 완성한 인간 지놈 프로젝트? 한때 떠들썩했던 쾌거였지만 요즘은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인 생명 구조의 융단 아래 깔린, 값비싼 바닥 깔개에 불과해 보인다.
지금 새로운 혁명이 생물학계를 휩쓴다. 일부 생물학자는 못마땅해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과학자가 수긍하는 현상이다. 이 혁명은 유전자가 작동하고 질병이 생기는 과정, 특히 암처럼 가장 끔찍한 질병들이 진단되고 치료되는 방식을 보는 과학적 사고를 뒤바꿨다. 이름하여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인간 지놈 프로젝트로 인해 더욱 오리무중에 빠진 생명의 수수께끼를 일부 설명해준다. 아울러 불치병에 걸린 환자의 삶도 연장해준다. 대중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지난 수년 동안 의사들은 후성유전학적 치료로 혈액 관련 암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심지어 폐암 같은 고형 악성 종양(solid malignant tumors)에도 어느 정도 치료효과가 있다는 보고도 나왔다. 물론 그런 사례들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며, 지금도 수십 건의 임상시험이 진행된다. 그러나 미국 암연구협회(AACR)의 마거릿 포티 대표는 최근 후성유전학이 이미 암 진단과 치료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후성유전학은 이제 확실한 치료법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미 국립보건원(NIH)도 지난해 가을 후성유전학을 최첨단 ‘로드맵’ 프로그램 중 하나로 발표했다. “인간 유전체가 완전히 분석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록펠러대의 과학자 C 데이비드 앨리스는 말했다(그의 1990년대 연구는 후성유전학 열풍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유전체 분석이 끝났을 때도 몇몇 과학자는 ‘이게 전부일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바로 그런 궁금증이 유전체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믿음을 낳았다.” 후성유전학은 분자 생물학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한다. 과학자들은 DNA가 생명의 기본 ‘텍스트’이긴 하지만 전체 각본은 개략적으로 말해 DNA를 감싸는 생화학 물질 층에 깊숙이 파묻힌 ‘지문(무대 지시)’이 좌우하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후성변이(epimutation)’라고 불리는 이 변화는 종종 적절치 않은 시점에 유전자를 발현시키거나 침묵하게 만든다. 후성유전학은 ‘생명의 책(DNA)’도 중요하지만 그 책이 어떻게 포장되느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충격적인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더 높은 차원의 제어가 당연히 필요하다. 오래전부터 생물학자들은 성장하는 유기체(인간 포함)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유전자 전부가 필요하지만 배아가 성장하면서 그중 많은 유전자가 새롭게 발현하거나 활동을 정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의 경우는 평생 동안 그 과정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태아의 헤모글로빈(혈색소)에 필요한 유전자가 있고, 출생 후 발현되는 성인 헤모글로빈 유전자가 따로 있다. 어느 발육 단계에 이르면 태아의 유전자는 후성유전학적인 제어 때문에 영구히 활동을 중지하고 대신 성인의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인간의 경우 수정난에서 출발해 발달하면서 초기 배아의 줄기세포가 뇌세포, 간세포, 그리고 수백 가지의 특화된 세포와 조직으로 분화한다.
그런 성숙 과정의 각 단계에서 DNA가 변한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도 동면하던 유전자들이 갑자기 활성화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이전의 경험이 준 충격이 우리 DNA의 활동을 규정하는 듯하다. 대부분은 아니어도 그런 변화의 상당 부분은 성질상 후성유전학적이다.
DNA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포장이 크게 교란되는 경우다. 동물 대상의 실험 결과로 유추해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먹는 음식, 어머니의 보살핌,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이 우리의 기본 DNA 하드웨어에 후성유전학적인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후성유전학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지난 10년 동안 확고한 추진력을 얻었다.
종종 ‘생물학의 달 탐사선 발사’라고 선전되는 인간 지놈 프로젝트는 생명의 기본 ‘텍스트’를 제공했다. 유전체 전체의 염기서열을 말한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특정한 유전학적 원인을 흔한 질병과 연결 짓는 일이 불가능했다.
‘철자가 잘못된’ DNA(19세기 수도사 그레고어 멘델이 처음 확인한 전형적인 변이와 유전적 변화 둘 다를 말한다)의 역할은 권위 의학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 최근호에 따르면 “질병의 아주 작은 부분만” 설명해줄 뿐이다. 록펠러대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DNA 자체보다 후성유전이 유전자 발현과 질병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보한 다세포 유기체에서 특히 더 그렇다.” 한편 1990년대에 앨리스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는 기본적이지만 아주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모든 세포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효소의 여러 그룹이 DNA의 각본을 바꾸지 않고도 후성변이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기초 연구에 따르면 효소들은 적어도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유전자 정보를 바꾼다. 우선 어떤 효소가 DNA에 특정 화학물질을 부착시켜 유전자를 ‘끄고 켜는’ 스위치의 작동을 혼란케 한다. ‘DNA 메틸화’로 알려진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발현돼야 하는 유전자를 침묵시킨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효소가 DNA의 정상적인 세포 포장을 비정상적으로 교란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DNA라는 얇은 실이 히스톤이라고 불리는 단순 단백질을 느슨하게 휘감는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효소가 그 포장의 일부를 손상하면 DNA가 너무 단단하게 휘감겨 세포가 DNA의 지시 정보를 읽지 못한다.
특정 유전자라는 책의 포장이 너무도 단단한 나머지 책을 펴 텍스트를 보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현상이다. 역으로 때로는 히스톤의 묘지에 영구히 묻혀야 할 유전자가 갑자기 되살아난다. 좀비 공포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말이다.
지난 5년 동안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암세포의 형성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확고해졌다”고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소재 화이트헤드 연구소의 원로 암 연구자인 로버트 A 와인버그가 말했다. “DNA 메틸화는 종양억제 유전자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유전자 변이보다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종양억제 유전자는 초기 암을 억제하는 세포의 주요 메커니즘 중 하나다. 각각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DNA에 고유한 화학적 깃발(‘표지’)을 남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런 표지들을 모아 ‘후성유전체(epigenome)’로 분류한다. 질병의 진단, 예후, 심지어 예방의 잠재적 단서가 되는 중요한 정보를 가리킨다.
일반적인 유전자 표지(genetic marker)는 유전자 철자에서 작은 ‘인쇄상’ 변화를 보여주지만 후성유전자 표지(epigenetic markers)는 유전자의 기능이 차단당하거나 활성화된 지점 전체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에머리 의대의 폴라 버티노는 유방암과 폐암에서 비정상적으로 기능이 차단되거나 활성화되기 쉬워 보이는 DNA 조각들을 확인했다.
존스 홉킨스대의 연구자들은 뇌암 세포의 후성유전자 표지를 활용해 화학요법으로 혜택을 볼 가능성이 큰 환자들을 예측한다. 최근의 실험실 연구 결과는 유전자 제어를 변화시키는 DNA층을 해독하면 암뿐만 아니라 심장병이나 당뇨병 같이 노화와 관련한 만성 질병, 자폐증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 장애를 치료하는 데도 유용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줄기세포 생물학,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는 유전 질병의 개념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유전체는 단 하나뿐”이라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후성유전학 교수 울프 레이크는 말했다. “하지만 후성유전체는 수백 개나 된다.”
그리고 예를 들어 물리학의 끈이론(string theory: 만물의 최소 단위를 점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으로 설명한다)과 달리 후성유전학은 특이한 지적 개념이 아니며 앞으로 추가 증거가 검증해주기를 기다리는 이론도 아니다. 생물학은 현실 그대로를 말한다. 그 실용적인 효과가 이미 병상에서 나타났다.
1990년대에 존스 홉킨스대의 스티븐 베일린이 이끈 연구팀은 DNA에서 일어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암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종양억제 유전자(암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한다)의 교란은 직접적인 변이보다 후성유전학적 기능 차단으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지난 5월 베일린과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피터 존스는 3년 기한으로 910만 달러의 보조금을 받아 폐암, 대장암,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후성유전학적 치료법을 ‘가속 시험(시험 시간을 단축할 목적으로 기준 조건보다 더 엄격한 조건에서 실시된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1년 내에 중간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존스 홉킨스대의 연구진은 최근 학회에서 이미 진행된 폐암 환자들이 후성유전학적 치료제 두 가지를 혼합 복용한 결과 여러 가지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는 예비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한 건은 완전한 관해(암 크기가 1g 이하로 줄어들어 육안으로 인지되지 않는 상태) 상태였다.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라서 그 혼합약에 반응하는 환자가 10%일지 20%일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고 베일린이 말했다. “하지만 비소세포성 폐암의 원발성 종양과 전이된 종양 둘 다에서 지금까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AACR의 포티는 이런 암을 가진 환자의 경우 예후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반응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후성유전학적 치료제의 임상시험이 그처럼 많이 진행되는 이유는 적용 과정이 역으로 진행되기 때문인 듯하다. 의사들이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는 약을 이용해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낸다는 뜻이다. 현재 후성유전학적 항암제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여러 가지 약은 수십 년 전에 나왔지만 과거에는 잘못된 이유로 잘못 사용됐다.
예를 들어 아자시티딘은 196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전통적인 화학요법 치료제로 개발됐다. 의사들은 옛날 방식으로 암세포를 죽이는 데 그 약을 사용했다. 환자가 견뎌내는 한도까지 최대한 투여했다는 뜻이다. 남아공 출신으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노리스 종합 암센터를 이끄는 피터 존스는 1980년대에 그 약에 또 다른 작동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자시티딘은 유전자를 침묵시키는 DNA 메틸화의 ‘밀봉 테이프’를 벗겨내 유전자를 발현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암을 공격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직접 암 세포를 죽이지 않고 애초에 세포를 암으로 만드는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역전시키는 방식이다. 1980년대 들어 뉴욕 마운트 사이나이 의대의 젊은 종양학자였던 루이스 실버먼은 아자시티딘을 후성유전학적 치료제로 시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기능이 차단된 유전자를 역전시키는 데 효과적이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전통적인 화학요법보다 적은 양을 투여하는 시험이었다. 그 결과 적은 양의 아자시티딘을 투여했을 때 백혈병 중 한 가지의 증상이 완화되고 환자들의 수명이 길어졌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2004년 5월 아자시티딘을 승인했으며, 현재 ‘비다자’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뉴욕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의 연구에 따라 다른 종류의 후성유전학적 치료제도 나왔다. 유전자는 DNA 메틸화만이 아니라 DNA 포장을 단단히 하거나 느슨하게 만드는 효소로도 발현되거나 기능이 차단된다. 컬럼비아대의 폴 마크스와 로널드 브레슬로는 보리노스탯(vorinostat)이라는 작은 분자를 만들어냈다.
보리노스탯은 DNA 포장을 손상하는 효소를 차단해 침묵하는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 약은 2006년 희귀한 임파종에 한정해 FDA의 승인을 받았으며, 현재 다른 암에도 임상시험된다.
그 약은 ‘졸린자’라는 이름으로 머크사가 판매한다. 특히 이런 기존의 약들과 현재 개발 중인 2세대 약의 적절한 혼합 복용이 암세포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역전시키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는 조짐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의사들의 관심이 상당히 높다. 그래도 연구자들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우선 1세대 후성유전학적 치료제가 글리벡처럼 ‘홈런’을 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글리벡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로 지속적으로 암세포를 수축시킨다. 또 당연한 일이지만 약이 더 널리 사용되면서 나쁜 부작용이 더 명백해진다. 정상세포까지 유전자 발현 기저를 바꿔놓을 잠재력을 가진 약의 경우가 특히 우려된다.
그러나 지난 한 해 동안 쏟아진 유망한 결과를 목격한 사람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앞으로 전망이 너무도 좋다”고 앨리스가 말했다. 후성유전학의 영향력은 임상 치료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었다. 실험실 연구와 역학 연구 결과 후성유전학적 변화(예컨대 흡연이나 식습관에 따른 변화)는 2대, 심지어 3대까지 전해질 가능성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바브레이엄 연구소의 부소장이기도 한 레이크는 생쥐를 대상으로 생식 세포가 만들어질 때 후성유전적 변화를 지워버리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어떻게 하면 마치 밀봉 테이프가 벗겨지듯이 모든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에 들어가는 DNA에서 제거할까?
“이제 사람들은 생식세포에서 지워지지 않는 변화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레이크는 말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2~3대까지 전달될 가능성이 있는 후성변이다. 멘델의 법칙처럼 유전자 자체의 변이가 대물림하는 게 아니라 후성변이가 전해진다.”
레이크는 신중한 언어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런 변이가 얼마나 흔히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혁명적일 가능성이 있다. 멘델의 이론뿐 아니라 잠재적으로는 다윈의 학설에 도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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