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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과‘의적’ 사이

‘도둑놈’과‘의적’ 사이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던 과거에는 ‘도둑놈’이란 말이 큰 욕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살인귀’ ‘살인마’라 해 인간이 아니라 아예 ‘귀신’ ‘악마’ 취급을 받았다. 인간의 기본 도리인 인륜을 저버린 이런 범죄자는 보통 사람과 달리 ‘더러운 피’가 그 자손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믿었다.

죄가 없는데도 그 자손을 처벌하거나 배척하는 ‘연좌제’의 전통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도둑 중엔 부패하고 민중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감을 대리 만족시킨 ‘의적’도 있었다. 임꺽정, 홍길동, 일지매 등은 남의 물건을 훔쳤지만 부자에게서 물건을 훔쳐 가난한 이들을 도와 ‘반영웅’으로 떠올랐다.

백성들의 분노는 부자와 관가를 공격하고 물건을 훔치는 의적들에게 투사(投射)됐고 백성은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따랐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에는 범죄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이 존재하는 듯하다. 한동안 사회적으로 사형제도 폐지 바람이 일었지만 범죄자의 영구퇴출을 요구하는 국민의 성난 목소리에 밀려 좌절됐다.

한편에선, 사회적으로 악명을 얻은 범죄자는 ‘네티즌 추격대’가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신상까지 낱낱이 찾아내 공개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현대판 연좌제’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부자와 고관대작의 집을 털었던 조세형과 김강용은 ‘대도’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대중의 동정을 샀다.

조세형은 오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 한 기업의 고문으로 초빙됐고, 유명 전도사와 강사로 대접받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그가 일본에 건너가 또다시 절도행각을 벌이다 경찰의 총을 맞고 체포되기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탈옥범 신창원이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2년 넘게 도피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인터넷에는 그의 팬 카페가 생겼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도 나왔다.

오늘날에도 대중은 체제에 대항하고 지배세력을 유린하는 ‘반영웅 범죄자’의 출현에 환호하기도 한다. 교도소를 무장 탈옥해 한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장시간 경찰과 대치극을 벌였던 지강헌 역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사회적으로 유행시키며 영화(‘홀리데이’) 속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단순히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공개 수배된 여자 강도 용의자를 ‘얼짱 강도’라고 부르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악명 높은 범죄자의 옷차림 등을 흉내 내는 ‘블레임 룩’이 유행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범죄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깃거리다.

그런데 근대 이전 한국의 전설이나 설화, 문학에서는 범죄 이야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탐욕과 부도덕, 불륜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그 결말은 피해자의 원혼이나 저승사자 등 초월적 존재에 의해 응징되는 식이다. 이른바 ‘일벌백계’와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범죄를 억누르려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히는 이해조의 ‘쌍옥적’은 유교 조선의 강한 통치력이 와해돼 가던 구한말(1908)에야 등장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과 더불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한국 사회도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23년 12월 30일 한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사건 소식이 실렸다.

‘만취한 승려가 잠자던 동네 남자의 목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씹어 먹다가 이웃사람에게 들키자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다 체포됐다.’ 이듬해 2월에도 충격적인 범죄사건의 기사가 등장했다. ‘두 살짜리 아이의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깨서 골을 꺼낸 후 팔, 다리와 생식기를 잘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1927년에 창간된 ‘변태 심리’라는 잡지는 엽기적인 범죄사건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웅변한다. 당시는 외세 침략과 조선왕조의 붕괴, 일제 강점으로 인해 기존의 이념과 윤리, 규범이 무너지고 극도의 혼란에 빠진 ‘아노미 상태’였다고 하겠다.

8·15 해방 이후엔 좌우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 군사 쿠데타와 독재 등 정치적 격변과 억압의 시대가 이어져 범죄마저도 얼어붙은 듯하다. 하지만 1963년 고재봉이라는 전직 군인이 일가족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살인귀’에 대한 사회적 공포심이 되살아났다.

그 후로 사회를 경악시킨 사건이 잇따랐다. 1975년엔 전국을 순회하며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김대두 사건, 1981년엔 체육교사 주영형이 초등학생 이윤상 군을 유괴 살해한 사건, 1982년엔 경남 의령에서 마을 주민 56명을 살해한 경찰관 우범곤의 무차별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살인귀’ 공포는 한동안 계속됐다.

그 정점은 아마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6년 동안 계속 발생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일 듯하다. 10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잔혹하게 살해됐지만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영국의 ‘살인마 잭(Jack the Ripper)’을 연상케 하면서 영화와 연극으로도 재연돼 사회적 공포를 확대 재생산했다.

1990년대에는 ‘지존파’ ‘막가파’ 등 사회에 대한 불만을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표출한 조직적 살인 범죄집단이 등장해 충격을 주었다. 2000년대에는 유영철과 정남규, 정성현에 이어 미국의 연쇄살인범인 테드 번디(Tedd Bundy)와 비교되는 강호순까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연쇄살인(serial murder)이 냉각기를 거쳐 살인을 계속하면서 온 사회를 지뢰밭을 걷는 듯한 공포에 빠트린다면, 여러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다중살인(mass murder)은 핵폭탄 같은 충격을 불러온다.

우 순경 총기 난동 사건의 충격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갈 무렵인 2003년 2월, 김대한이라는 56세 남자가 대구 지하철에서 인화물질이 가득 든 통에 불을 붙여 198명을 살해하고 147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저지른 범죄가 2002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자축하던 한국 사회를 애도와 분노, 상실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한국인과 한국 사회 전체에 외상(trauma)을 입힌 이 사건의 악몽은 4년 2개월 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끔찍한 다중살인사건으로 되살아났다. 교수들과 학우들을 강의실에 몰아넣고 무차별 총격을 가해 32명을 살해하고 29명에게 중상을 입힌 범인이 한국계 이민자인 조승희였기 때문이다.

아홉 살 때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조승희는 인격 형성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고 그 스스로 1999년 발생했던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살인’ 범인들을 추종한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인 범행’이지만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그를 ‘한국인’으로 여겼다.

2008년 10월엔 서울 강남의 한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피해자들에게 마구 칼을 휘둘러 6명을 살해하고 7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상진의 범행이 발생해 소위 ‘묻지마 다중살인’에 대한 공포가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계속된 끔찍한 연쇄살인과 다중살인의 충격과 공포는 한국을 더 이상 ‘동방예의지국’이라 할 수 없다는 반성과 자각을 불러왔다.

이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 경쟁 지상주의가 낳은 물질만능주의 풍조와 사회적 소외자 및 낙오자의 증가, 핵가족화로 인한 전통적 대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붕괴, 그리고 빈부격차가 나은 사회갈등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대안 모색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도 커졌다.

엽기적인 강력사건이 계속 일어나면서 대중의 관심도 사실적인 범죄 이야기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졌다. 문학계에선 1980년대 김성종의 뒤를 잇는 추리소설이 뜸해지고, 방송에서는 1984년에 종영된 수사반장 이후 한국형 범죄 드라마가 한동안 방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CSI’, ‘크리미널 마인드(Criminal Mind)’ 등 미국 드라마(미드)가 시청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해외에서 수입한 이들 범죄 드라마의 범람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모두 낸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찰에 ‘미드처럼’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범죄를 수사하고, 적정한 절차를 준수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법 절차를 개선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반면, 신문과 방송뉴스는 미드 못지않은 구체성과 실감 나는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지나친 범죄보도를 불러 피의자 가족과 피해자의 사생활 노출, 범죄 수법 공개, 범죄 공포의 무차별 확산, 여론재판 현상을 불러온다. 영화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 ‘추격자’ 등 범죄 영화의 대흥행은 우리 사회에 그동안 ‘사실적 범죄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형 CSI효과’는 일반인들의 ‘범죄 수사에 대한 참여 욕구’로도 이어졌다. 경찰직과 법과학, 범죄심리학 등 관련 학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국 대학 중 ‘경찰 관련 학과’를 설치한 대학의 수가 80개를 넘어섰고, 순경 채용시험에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가 대거 몰려 남자는 30대1, 여자는 200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인다.

‘현대판 셜록 홈즈’라고 할 ‘프로파일러’가 되겠다는 청소년들이 급증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범죄 이야기 열풍’에 휩싸였다고 할 만하다. 물론 종래의 유교적 엄숙주의로 범죄 이야기를 금기시하던 관습도 문제지만 그와 반대로 지나친 ‘범죄 상품화’도 문제라고 하겠다(마치 ‘신종 플루’의 안전불감증만큼이나 지나친 공포심과 과잉대응도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범죄 문제를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부풀리기’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성숙한 노력이 필요하다. 범죄자를 괴물로 여겨 극단적인 혐오감을 쏟아내는 분위기도, ‘사회악에 저항하는 투사’로 미화시켜 숭배하는 극단적인 사회 분위기도 우리 모두가 극복할 대상이다.

[필자는 경찰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범죄심리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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