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에서 생명력을 느낀다
한국무속학회의 학술총서 ‘한국의 굿(Korean Shamanism)’이 2005년 문화부 우수도서로 선정되면서 영문 번역작업이 추진됐다. 한국번역원이 작업을 진행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무속용어가 많아 전문 번역가라도 쉽지 않았다. 결국 무속학회는 수소문 끝에 앨런 헤이먼(78, 한국명 海義滿)에게 그 작업을 부탁했다(책은 영국의 새프런 북스사가 곧 발간할 예정이다).
번역 작업에만 꼬박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한국무속학회 회장을 지냈고 그 책의 공동 집필자인 양종승 한국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난해한 용어와 씨름하느라 번역과정에서 헤이먼과 100번도 넘게 전화통화를 했다”며 “무당들이 부르는 무가에는 고사성어에다 지방언어, 은어 등이 뒤섞여있어 전문 연구자조차 내용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헤이먼 선생의 영역은 실로 대단하다”고 그는 평가했다. 헤이먼의 해박한 무속 지식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1953년 강원도 양구·철원의 미군 야전병원(MASH)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다(그는 뉴욕 컬럼비아대 의예과를 나왔다).
휴전을 앞두고 양구·철원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고지전투에 참가했을 때 그는 얄궂게도 ‘중공군’의 태평소와 징소리를 통해 아시아 ‘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때 들었던 가락소리에 이끌려 그는 군복을 벗은 뒤 아예 전공을 바꿔 음악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컬럼비아대에서 만났던 한국인 유학생에게 물었어요. 중공군이 사용했던 악기가 한국에도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친구 대답이 ‘한국엔 그런 악기뿐만 아니라 국악의 역사가 5000년이나 된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헤이먼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1960년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한국으로 왔다. 서울 인사동에 있던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해 1963년까지 공부했다. 가야금, 장구, 북 등 모든 악기를 배우는 대신 당시 국악계에선 생소하던 5선보와 영어를 가르치는 조건이었다.
“그때 함께 배웠던 학생 중엔 사물놀이 했던 김덕수 씨와 가수 김세레나 씨도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 후 판소리 명창 김소희, 한일섭(아쟁), 지영희(피리), 성금연(가야금) 등 한 시대를 풍미하던 국악인들과 함께 교유했고 1963년에는 전주 시민극장에서 외국인 최초로 단가를 부르고 가야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4년 초에는 미국의 대학들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 야외공연에 2주 동안 참여했다. 그때 NBC-TV가 함께 공연했던 만신(유명 무당) 김금화와 그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는 김금화와 여러 국악인을 만나면서 국악의 뿌리는 무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가령 동해안의 심청굿엔 판소리 심청가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그가 국악에서 무가 쪽으로 관심을 튼 결정적 계기는 1980년대 유명한 민속학자인 임석재(1903~98)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임석재 선생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평양 다리굿, 전라도 재석굿과 손님굿, 제주도 당굿 연구에 몰두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인 동해안별신굿의 대가 김석출 선생의 굿도 여러 번 봤다”고 그가 말했다.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1990년대 강릉 단오제 때 임석재 선생과 함께 이름 난 무당의 말을 채록할 때였다. 무당이 한사코 녹취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는 복채를 좀 더 얹어주고 종이를 태우며 복을 비는 의식(소지)을 했다. 그런데 무당이 헤이먼의 출생 연월일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아맞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그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못 잊는다”고 말했다.
사실 헤이먼은 기독교 신자다. “종교와 무속이 양립 가능하냐”고 묻자 그에게서 ‘겸손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독교 신자이지만 엉터리 신자인 걸요.” 그는 1967년에 고 김희갑 씨와 함께 영화 ‘팔도강산’에 미군 역으로 출연했고, 1961년엔 ‘오발탄’에도 출연했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SK Bioscience Wins Patent Suit Against Pfizer, Eyes Global Pneumococcal Vaccine Market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일간스포츠
이데일리
이데일리
‘기타맨’ 이선정 “故김새론 이용? 소신대로 했을 뿐” [인터뷰①]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3대 이모님 가전답네”…더러운 우리집 새집 만드는 ‘이것’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백기사’로 얽힌 재계…경영권 분쟁 때 빛나는 동맹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유바이오로직스 ‘영업이익률 42.7%’, 백신기업 1위...고수익 유지 가능할까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