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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현대경제학 거장 추모 열기 뜨겁다

떠나간 현대경제학 거장 추모 열기 뜨겁다

▎폴 새뮤얼슨

▎폴 새뮤얼슨

“경제학 서적을 읽는 것은 곧 먼지 날리고 지루한 글들의 사막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사실 대부분의 경제학 서적이 그렇다. 경제학을 배우려는 학생은 속 시원한 구절을 만날 일이 하나도 없는 긴 여행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교과서를 몇 권 독파하려면 낙타와 같은 지구력과 성자와 같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경제분야 베스트셀러 저술가로 유명한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세속의 철학자들(Worldly Philosophers)』에서 쓴 글이다. 하일브로너는 “그러나 모든 경제학 책이 다 그런 것이 아니다”며 “첫발을 들여놓는 사람에게 생생하고 자극적이며 힘이 나게 해주는 것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추천한 교과서가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이었다. 그는 “이 책은 분명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 교과서”라며 “새뮤얼슨의 교과서는 단순히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할 책”이라고 썼다.



“고슴도치·여우 있었으며, 새뮤얼슨 나왔다”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94세를 일기로 사망한 뒤 그에 대한 학계의 추모 열기가 뜨겁다. 새뮤얼슨이 교과서로 이름을 떨친 학자인 데다 학문적인 업적도 휘황찬란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학자 중 처음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요즘 경제학 교과서의 인기 저자인 하버드대 맨큐 교수(경제학)는 15일 자신의 블로그(http://gregmankiw.blogspot.com/)에 ‘폴과의 추억’이라는 글을 올렸다. “우리 세대의 대다수 학생처럼 학부 시절 프린스턴대에서 들은 경제원론 강의의 교재가 새뮤얼슨 교과서였다. 내가 경제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상당부분 그 책 덕분이었다.”

맨큐는 학부를 졸업하고 MIT 대학원으로 가서 새뮤얼슨의 몇몇 강의를 직접 듣기도 했다. 최근 10여 년 동안에도 맨큐는 보스턴연방준비은행의 자문위원 모임에서 종종 새뮤얼슨을 만날 수 있었다. 맨큐는 “연준 자문위원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새뮤얼슨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맨큐는 우연히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1948년에 나온 새뮤얼슨의 교과서 초판을 운 좋게 35달러에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난 그 몇 배라도 흔쾌히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며 “이거야말로 소비자 잉여(consumer surplus·소비자가 구매에서 얻는 이익에서 제품가격을 뺀 부분) 아니냐”고 즐거워했다.

맨큐는 그 다음 열린 보스턴 연준 모임에 그 책을 가지고 가서 저자의 친필 사인을 받았다. 맨큐는 새뮤얼슨 교과서 초판과 그의 사인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고인을 추모했다.

알아주는 골수 케인시언이자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경제학·국제관계)가 추모 대열에서 빠질 리 없다. 그는 15일 자신의 블로그에 ‘최고의 경제학자(The incomparable economist)’라는 글을 올려 고인을 상찬했다. 그 첫 문장은 이랬다.

“고슴도치가 있었고, 여우가 있었으며, (그 둘을 합친) 폴 새뮤얼슨이 세상에 나왔다.” 이는 영국의 역사가이자 자유주의 철학자인 아이자이어 벌린의 유명한 논문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에서 따온 말이다.

벌린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많은 것을 두루 아는 사람’을 여우로, 플라톤이나 단테처럼 ‘중요한 한 가지를 깊이 아는 사람’을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크루그먼은 “경제사상가로서 새뮤얼슨은 많은 것을 깊이 알았고 이를 우리에게 가르쳤다”며 “다른 어떤 경제학자도 그만큼 후학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과연 새뮤얼슨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칭송을 듣는 것일까. 그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보자. 새뮤얼슨은 1915년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다. 폴란드 이주민인 아버지가 약사로 일하던 시카고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6세 때 시카고대에 입학했다.



시카고학파 좌장 밀턴 프리드먼과 평생의 숙적

“1932년 1월 2일 오전 8시, 시카고대 강의실에서 나는 경제학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이달 초 출간된 회고록에서 밝힐 정도로 경제학과의 첫 만남은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하지만 대학과의 궁합은 썩 좋지 않았다. 새뮤얼슨은 학부 시절 시장의 자유를 신봉하는 시카고대의 학풍을 ‘정신분열증적’이라고 표현했다.

대공황으로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경제이론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는 실업(失業)에 대한 언급을 들을 수 없는 아이러니를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올해 초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새뮤얼슨은 “시카고대를 다니면서, 교실에서 배웠던 것과 창문 밖과 길거리에서 듣는 것과의 차이를 배웠다”고 말했다.

1935년에 학사를 마치고 하버드대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거쳤다. 1940년 MIT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교수가 됐다. 그가 대학원에서 가르쳤던 학생 중 로런스 클라인, 조지 애컬로프, 조셉 스티글리츠 등 3명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을 맡고 있는 로런스 서머스가 그의 조카다.

새뮤얼슨은 케인스주의와 고전파의 이론을 조합해 ‘신고전파 종합(Neoclassical Synthesis)’을 만들었다.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근접해 있을 때는 시장이 수요·공급의 힘에 의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는 고전파 혹은 신고전파의 분석을 따르지만 불황기에는 케인스의 가르침대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그가 196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존 F 케네디에게 경기 후퇴를 막기 위해 감세정책을 조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케인스 경제학의 대표주자로 불리지만 그는 케인스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지는 않았다. 케인스의 주장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취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카페테리아 케인시안’으로 부를 정도였다.

필요하면 케인시안으로 분류되는 학자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새뮤얼슨은 시카고학파의 좌장인 밀턴 프리드먼과 평생의 숙적이었다. 두 학자는 공개 토론장이나 신문 지상에서 날카롭게 서로 비판하고 격돌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친구였다. 새뮤얼슨은 “우리 둘은 거의 언제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친구 사이로 남았다”고 말했다.

요즘 미국 경제학계에서 대립하고 있는 ‘짠물(Saltwater school)’과 ‘민물(Freshwater school)’ 경제학자들은 아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짠물 경제학자’는 미국 동부 해안 지역에 몰려 있는 케인스 학파를, ‘민물 경제학자’는 시카고 등 5대 호 주변에 밀집한 시장주의적 경제 학파를 가리킨다.

새뮤얼슨은 무역·거시·공공재정·소비자행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업적을 남겼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제너럴(general) 경제학자로 불린다. 하지만 50세를 넘어서면서 그의 강점인 수학을 잘 살릴 수 있는 금융경제학에 집중했다. 가장 큰 업적으로 효율적 시장 가설과 옵션 가격설정 모형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이 꼽힌다.

말년의 새뮤얼슨은 의학 학술지를 읽어가며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을 먹고 저지방 우유를 섭취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경험적인 현실세계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그의 열정이 학문의 성취뿐만 아니라 장수의 비결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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