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산품 제조가 애국” 온갖 역경 뚫고 설탕 공장 짓다
▎1953년 첫 생산된 설탕 시제품 앞에 삽을 들고 선 이병철 회장.
1952년, 이병철 회장은 한국 최초의 국산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전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설탕·페니실린·종이 등 세 가지로 압축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의 하나였다.
국가경제 규모가 최하였으니 국산품이라는 것은 쌀이나 채소 정도가 고작이었다. 공산품이나 소비재는 100% 수입에 의존하던 시절이다. 설탕·밀가루·섬유·비료·종이·의약품 등도 역시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물품은 인간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나 국내에 제조 기술이 없고 경험을 갖춘 인력도 없었다. 그는 세 가지 물품 중 하나를 국내에서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일본 미쓰이무역에 설탕·페니실린·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건설 비용과 설비 비용을 산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3개월 후 제당 건설에 필요한 마스터플랜이 도착했다. 이어 페니실린 생산 계획서와 제지공장 건설 계획서가 도착했다. 세 종류 중 페니실린이 가장 유망해 보이는 사업이었으나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기가 만만치 않았고, 종이 역시 그러했다. 여기서 이병철 회장은 설탕을 택했다.
설탕의 수요는 나날이 늘고 있었으나 만드는 공장은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약·제지·제당 모두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었으나 당시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매우 소중했으므로 일단 제당으로 업종을 선택하게 된다.
“조사 자료의 숫자만 가지고는 가부간의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때 문제가 되는 것이 곧 최고경영자의 직관력이다. 다만 그 직관은 평소의 치밀한 계획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직관만이 아니라 직관에 따른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수입해 팔면 돈은 벌겠지만…이병철 회장의 말이다. 그러나 설탕을 만들어 팔기로 결정하기까지 임원들의 반대가 컸다. 그들은 설탕을 직접 제조해 파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국에서 소비재를 수입해 파는 편이 안전하고 이익이 더 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그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든다.
1953년 4월 부산 대교로에 있는 삼성물산 사무실에 제당회사 설립을 위한 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6월에는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휴전협정이 성립되기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자본금은 2000만환이었다. 이 회장은 ‘무슨 일에나 제일의 기개로 임하자.
제일제당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 건설된 최초의 현대적 대규모 생산시설이다. 앞으로 항상 한국 경제의 제일 주자로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크게 기여해 나가자’는 뜻에서 회사 이름을 제일제당이라 지었다. 회사 설립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부산시내를 샅샅이 뒤져 전포동에 1500평짜리 땅을 구입했다.
당시 설탕공장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은 원심분리기 4기와 결정관 1기의 플랜트는 15만 달러, 도입에 따르는 제반 경비는 3만 달러 등 모두 합쳐 18만 달러였다. 이 회장은 원심분리기와 결정관 등을 다나카 기계회사에 발주했고, 곧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기계의 조립과 설치, 시운전 등에 필요한 일본인 기술자의 입국을 정부가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을 철저하게 싫어해 일본인의 입국은 단 한 사람도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큰일이었다. 정부 방침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일본제 플랜트의 도입을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기계가 도착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의 힘으로 기계를 설치하기로 결심한다. 한국에서 기계를 조립하고 있는 회사에 문의했더니 설계도만 있으면 가능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기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계 자체를 일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특성과 운용을 속속들이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국제전화로 다나카 기계에 문의했다. 당시 한국의 국제전화 사정은 대단히 나빴다. 국제전화를 아침에 신청하면 그날 오후나 다음 날 아침에 연결됐다. 그나마 감도가 나빠서 고함을 지르듯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상대가 알아듣지 못했다.
더구나 기계 설치에는 전문적인 기술 용어가 많았으므로 통화시간도 길어졌다. 전화로 해결되지 않을 때는 수없이 편지를 써서 상대 회사에 문의했다. 편지가 일본으로 보내지고 다시 한국에 도착하기까지는 2주일이나 걸리던 시절이다. 그 2주일 동안은 작업을 중단하고 기다려야만 했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CJ 본사 로비에 있는 이병철 회장 조각상. CJ 이재현 회장은 삼성가의 장손으로 이병철 회장의 손자다.
설탕 기계에선 검은 액체만 쏟아져악전고투의 6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시운전 날이 됐다. 국내에서 가장 큰 설탕공장이 가동된다는 소문이 나자 구경꾼이 몰려 들었다. 이병철 회장도 감개무량한 심정이었다. 시운전 스위치를 넣었다. 원당이 기계에 들어가자마자 원심분리기가 크게 요동쳤다. 1분에 1800회나 회전하는 기계였다.
이상하게도 원심분리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좌우로 흔들리더니 검은 물을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검은 액체가 나오는 것도 이상했지만, 기계의 진동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됐다. 원심분리기가 부러져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사람이 다치거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기계를 세우고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다시 스위치를 넣고 기계를 작동해 보았으나 전과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기계는 굉음을 내며 요동만 칠 뿐 설탕은 안 나오고 검은 액체만 토해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나카기계 측에 국제전화를 넣어 원인을 물었다.
다나카기계 측은 직접 보지 않아 뭐라 확신할 순 없지만 설명만 들었을 때는 특별한 결함이 없다고 했다. 다음 날도 전 직원이 기계에 매달려 작동해 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나카 측에 또다시 문의해 보았으나 어제와 같은 대답이었다. 이병철 회장과 임직원들의 표정은 모두 울상으로 바뀌었다.
사흘째 되던 날 하청업체의 한 용접공이 지나가는 말투로 “아니 웬 놈의 원료를 이렇게 많이 넣는 거요.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어 기계가 균형을 잃은 거요”라고 했다. 문득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 회장은 기술자들에게 원료를 조금만 넣고 균형을 맞추면서 기계를 돌려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곧 순백색의 설탕가루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53년 11월 5일의 일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바로 그날을 제일제당의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어렵게 설탕을 만들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설탕을 담을 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엔 비닐봉지를 쓰지만 비닐이 없던 시절에는 흰 천으로 설탕부대를 만들어 썼다.
문제는 국내에서 생산된 흰 천에 설탕을 담으면 설탕가루가 줄줄 새어버리는 것이었다. 설탕을 담을 천은 공기가 통하면서도 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도 제대로 만들 기술이 없었다. 미군들이 쓰다 버린 낙하산으로 여성들의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던 시절이다. 낙하산이 옷감으로 둔갑하는 판에 설탕을 담을 부대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일본에 기술자를 보내 설탕 부대를 만들 기계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서 설탕 부대용 천은 일단 만들었지만 그 부대를 재단하고 꿰맬 수 있는 재봉틀이 또 없었다. 이번에는 재봉틀 구하기에 나섰다. 결국 설탕 부대 제작용 재봉틀은 일본에서 수소문 끝에 중고품을 구해가지고 미군 군용기에 실어 왔다.
모든 것을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던 시절이라 모든 게 처음이고 그때마다 일이 눈덩이로 불어났다. 첫날 생산된 설탕은 6300㎏이었다. 근당 100원에 부산 총판인 신일상회로 넘어갔다. 당시 수입 설탕이 근당 300원이었으므로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싼값이었다. 가격이 훨씬 싸므로 설탕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뜻밖에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외국산 설탕과 마찬가지로 순도도 99.9%며 색깔도 똑같은데 팔리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국산품은 싸고 나쁜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소비자들은 제일제당의 설탕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과 보름이 지나자 설탕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먹어본 사람들이 입소문으로 품질에 아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값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물건 달려 공장 24시간 가동물건이 달리자 공장은 24시간 돌아갔다. ‘아침에 설탕을 한 트럭 싣고 나가면 저녁에는 돈을 한 트럭 싣고 돌아온다’고 할 정도였다. 날개 돋친 듯 팔려 도무지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6.3t 생산되던 설비를 2년 만에 그 여덟 배 가까운 50t 규모로 늘렸다. 이 회장은 설탕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시설을 계속 확장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최신 기계를 도입했다.
제일제당은 당시 삼성그룹이 최초로 시도한 근대적 기업으로서 첫 성공작이다. 이후 제일제당은 한국에서 사용되는 설탕 10%를 국산화한다. 이것이 제일제당, 바로 오늘날 CJ그룹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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