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르게’보다 ‘바르게’ 성장하겠다”
세계 최대 중장비 업체인 미국의 캐터필러. 뉴욕 증시의 대표 종목 중 하나인 이 회사는 제조만 할 뿐 직접 판매를 하지 않는다. 대신 전 세계에 딜러(총판 회사)를 둔다.
이 회사의 딜러가 된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고 품질 좋은 중장비 브랜드를 팔 수 있다는 얘기다. 나라별로 차이가 있지만 기본 매출이 보장된다.
계약 조건은 까다롭다. 더 정확히 말하면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캐터필러는 웬만하면 다년간 계약을 하지 않는다. 혹여 총판 회사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재무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 계약 연장은 물 건너간다. 캐터필러 브랜드에 조금이라도 불명예를 끼치면 바로 ‘아웃(out)’이다. 이 회사가 딜러와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이유다.
50년간 캐터필러 한국 독점총판파트너는 많이 두지 않는다. 동남아시아에는 통틀어 10곳 남짓이다. 우리나라에는 한 곳뿐이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혜인이다. 혜인은 불도저·굴착기 같은 건설기계 장비를 수입해 공급하는 것이 주력 사업이다. 혜인은 지난 50년간 캐터필러의 독점(exclucive) 한국 파트너였다.
계약은 매년 갱신됐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혜인이 걸어온 반백 년을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상장(유가증권시장)한 혜인은 지난해 14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은 54억원(순이익 32억원)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98년 이 회사 매출은 1200억원이었다.
이후 연간 매출은 최소 750억원, 최대 1400억원 범위에서 움직였다. 순이익은 외환위기 여파로 2000년에 딱 한 번 적자를 봤다. 최근 15년간 순이익 범위는 5억~116억원이었다. 이를 두고 증시에서는 “안정적인 수익구조”라고 하고, 일부에선 “혜인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영을 한다”고 본다.
원경희 회장은 “성장은 사이즈(size)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는 선대 회장 때부터 이어져 온 경영원칙이다. 혜인은 박정희 정부 때 경제기획원 장관, 농림부 장관을 지낸 후 한국타이어 사장, 전경련 부회장, 한국경제신문 사장을 지낸 고 원용석 전 회장이 1960년 설립했다.
원 전 회장의 차남인 원경희 회장은 1973년 사원으로 입사해 20년 만에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선친께서 인생, 경영에 대해 자주 말씀을 주셨어요. 가족과 직원이 평생 대대로 편안하게 먹고살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회사가 크든 작든 임직원이 잘 화합해 평화롭게 먹고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실 있게 역량을 발휘해 수익을 올리면 되는 것이죠.”
회사 관계자는 “회장님의 올 신년사 메시지가 ‘빠르게 성장하기보다는 바르게 성장하자’였다”고 귀띔했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50년간 건설 중장비를 공급해 오면서 자기 브랜드를 갖고 싶지 않았을까? 장비를 자체 개발할 생각은 안 해 봤을까? 원 회장은 “많이 고민했고 추진도 해봤다”고 말했다.
적대적 M&A 몰리기도
대신 혜인은 다른 면에서 강점을 살려 나갔다. 원 회장은 “예전에는 캐터필러를 보고 혜인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혜인을 보고 캐터필러 제품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천안에 있는 국내 최대의 중장비 정비공장, 전국 15개 지역의 고객센터, 토목·건설 현장에 필요한 거의 모든 완제품과 부품이 완비된 공급망은 경쟁사가 쉽게 따라오기 힘든 혜인의 경쟁력이다. 현재 이 회사는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중공업, 볼보건설기계코리아 등과 경쟁하면서 대형 건설기계 시장 국내 1위, 중소형 제품까지 포함하면 3~4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사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특히 지난 2년간 원 회장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2008년 말에는 적대적 인수합병(M&A) 위기에 몰렸다. 한 건설업체가 대대적인 공개매수에 나섰고, 대주주인 원 회장은 물론 노조까지 자사주 매입 운동을 펼치며 방어에 성공했다. 원 회장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당황했지만 이후 회사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영상 취약한 부분이 보완됐고, 노조가 손해를 감수하며 자사주 매입 운동을 벌이면서 회사가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치솟는 환율과 건설경기 급랭도 악재였다. 수입 업체인 혜인은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앉아서 손해를 본다. 지난해 초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1500원대까지 떨어졌다. 나름대로 환 헤지를 해왔지만, 환차손이 불가피했다.
원 회장은 이 위기를 캐터필러와의 오랜 신뢰로 풀었다. “캐터필러에 3000만 달러 정도를 보내야 했는데, 환율이 너무 올라 6개월만 유예해 달라고 정식 요청했어요. 물건을 팔아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다행히 캐터필러가 받아줬습니다.” 다시 반전이 왔다. 국내 외환시장은 지난해 중반 이후 원화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수출업체는 입술이 마르겠지만, 원 회장은 “요즘은 1100원대니까”라며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4대강 사업은 호재 중의 호재였다. 혜인은 토목공사가 많이 벌어질수록 돈을 버는 회사다. 원 회장은 “4대강 사업을 포함해 향후 3~4년간 대규모 공사가 이어진다”며 “회사 전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역으로 환율이 다시 오르고 건설경기가 급랭하면 혜인은 또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많은 기업이 그렇지만, 지난 50년간 혜인은 환율과 건설경기 변동에서 단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원 회장의 장남인 원종식 기획조정본부장이 냈다. 원 본부장은 “4대강 사업으로 지난해 4분기 매출이 급등하면서 3분기까지의 누적 손실을 다 털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얘기를 했다. “상승한 매출이 다시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4대강 사업이 단발성 실적으로 끝나지 않게 하겠다는 얘기다. 원 본부장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는 전제를 달면서 “4대강 사업을 비롯한 전국 토목공사에 총동원된 장비를 활용해 향후 렌털 사업을 벌이고, 혜인이 갖고 있는 토건공사 노하우와 솔루션을 통해 토건회사의 중장비 운영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혜인은 2012년 매출 목표를 5000억원으로 잡고 있다. 혜인은 신재생에너지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이미 태양광과 풍력발전 시장에 진출한 혜인은 ‘열병합 발전장치’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일 계획이다. 원경희 회장은 “열병합 장치 엔진 분야의 세계적 선도업체가 캐터필러의 독일 딜러”라며 “이 분야 진출을 위해 사내에 에너지팀을 발족해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원경희 회장은 “혜인의 미래 50년은 사람에 달렸다”고 했다. 그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첫째도 사람, 백 번째도 사람”이라며 “훌륭하고 참신한 인재를 키우는 데 365일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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