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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는 없다

‘불량 국가’는 없다

▎이란-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이란-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세계 불량국가들과 관계를 재개한 지 1년, 이제 그 정책의 성적표가 나왔다. 미얀마와 북한, 베네수엘라부터 이란까지 모두 미국이 화해하자며 내민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미얀마 양곤에선 아웅산 수 치가 가택연금 상태에 있고, 평양은 미사일을 쏘아대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는 미 제국주의를 성토하고, 테헤란은 연말로 못박은 핵프로그램 협상 시한을 묵살했다. 포용정책은 실패했다. 따라서 오바마는 이제 제재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위협을 이행하려는 태세이며 또 그래야 한다.

과연 그럴까? 다시 한번 따져보자. 미국 정부는 ‘불량국가’를 낳은 세계가 사라졌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불량국가라는 용어는 1980년대 미국에서 주로 유행한 말로 냉전질서를 위협하는 비주류 국가 독재체제를 일컬었다. 곧이어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미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걸림돌은 주로 ‘역사의 종말’을 수용해서 미국의 가치를 따르려 하지 않으려는 나라들이었다.

‘불량국가’ 개념은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서구 가치와 이해의 기치 아래 뭉친 국제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 이런 국제사회는 누가 이단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합의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국제사회는 1990년대 후반 이미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일어서고, 러시아가 부흥하고, 인도·브라질·터키 등이 실질적인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저마다 나름의 이해와 가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적 가치에 따라 규정된 ‘국제사회’는 허구이며 ‘불량’이라는 용어는 미국이 고립시키려는 이단 국가뿐 아니라 미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보는 국가가 많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앞으로는 기성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그런 국가들에 맞서 미국 혼자서 당근을 내밀거나 채찍을 휘두르는 방식은 통하지 않을 듯하다. 국가나 단체가 제기하는 핵확산, 테러, 지역 불안정 위협에 대처하려면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 마지못해 움직이기보다 진정성을 지닌 국가의 연합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미국(오바마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이 자국 또는 나아가 서방의 어젠다를 위해 국제적인 지지를 끌어 모으는 일이 더는 불가능해진다. 세계는 미국으로부터 포용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원하며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기보다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기존의 미국 지도력은 버락 오바마로 바뀌었더라도 조지 W 부시만큼이나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새로 국제 공동체를 구축하지 않은 채 미국 주도 아래 기존의 불량국가들을 제재할 경우 분명 역풍을 맞게 된다. 이미 서구의 제재는 불량국가들이 결속을 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얀마는 북한과 군사장비 그리고 어쩌면 핵 비밀을 거래하며, 이란은 시리아와 유대를 강화하고, 베네수엘라는 쿠바 지원규모를 확대한다.

그런 비교적 힘이 약한 말썽 국가들 간의 밀월관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합법적인 (신흥) 강국들이 이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는 점이다. 브라질·터키·러시아·중국 등은 모두 미국의 불량국가 제재 외교정책에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낸다.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당시 더 즉각 반응하는 외교정책을 펼치면 기존의 서구 어젠다에 세계의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어조의 변화나 미국의 정책검토보다는 서방이나 동방에 치우치지 않고 전 세계에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를 두고 기준을 새로 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목표는 미얀마·북한·이란 같은 나라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강대국들과 협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의 세계 위상을 재검토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래야만 세계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 따르는 재정적·군사적 부담을 다른 강국들도 나눠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게 된다.

오늘날 대국이든 소국이든 선량한 국가든 불량한 국가든 모두 동반자를 찾지 보호자를 찾지는 않는다. 미국은 당장 행동을 바꾸게 할 요량으로 불량국가를 응징하려 들지만 라이벌 강국들은 투자와 방위계약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 존엄과 존중에 기초한 관계를 제안한다. 미얀마에서 중국이, 이란에서 러시아가, 쿠바에서 브라질이 그렇게 하며 앞으로도 그런 사례는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유엔안보리,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핵심적인 국제통치기구들이 그 새로운 강국들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회의석상의 한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제재조치를 지지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신흥 강국들은 새로운 독립적 지위에 조심스러워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자신들의 위상을 주장한다. 최근 이란을 국빈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거침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여길 권리가 없다.”

이 발언은 서방세계 밖에서는 모두 힘을 모아 불량국가를 제재하자는 외침보다 더 큰 공감을 얻는다. 그 며칠 전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초대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슬람 국가 정상회담에서 이란 총리를 포옹하고 이란의 핵프로그램은 ‘평화적’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방 언론은 룰라와 에르도안이 민주적 가치와 결속을 저해한다고 공격했지만 이는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주장이다. 룰라와 에르도안 같은 중견 민주주의자들이 이란 정부의 시위대 강경 탄압이나 비밀 핵프로그램을 지지해서 아마디네자드 편을 드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불량국가이며 그 대처방법을 정하는 문제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도(그리고 그보다 능력)를 과시하려는 목적이다.

불량국가에 관한 서방의 낡은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시아의 한 구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렇다 할 서방의 개입 없이 지정학적 각축장으로 빠르게 부각되는 미얀마다. 이란은 핵프로그램 때문에 오늘날 가장 세계안보를 위협하는 불량국가일지 모른다. 수단은 집단학살을 묵과한 전력 탓에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번번이 사회 체제의 자멸을 자초하는 짐바브웨는 가장 짜증스러운 나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로지 압제적인 정권을 차단하기 위한 서방 전략이 가장 철저하고도 뚜렷하게 실패한 나라는 미얀마인 듯하다.

20년에 걸친 미얀마 고립정책은 지금 돌아보면 그 나라의 합법적인 경제를 황폐화하고 국민의 인권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는 한편 서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중국에 문호를 개방하려고 주도면밀하게 꾸민 음모처럼 보인다.

오늘날 양곤은 시간이 정지해버린 도시다. 1950년대 고물차가 인력거와 나란히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빛바랜 식민지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듯 황폐하고 버려진 도시의 빌라들 사이를 걷는 소수의 관광객에게 맨발의 어린이들이 중국산 기념품을 판매한다. 이곳에선 서방의 정책이 거의 하나도 주효하지 않았다.

군사정부는 여전히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반체제 민주진영은 사분오열됐다. 서방의 대미얀마 정책은 전에는 주로 정권의 국내 통치행위만 대상으로 했지만 지금은 장성들이 핵협력 문제를 포함해 북한과 손잡은 의혹도 다뤄야 한다. 그렇다고 제재가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완전히 역효과를 초래했다는 뜻이다. 최근 양곤의 시민단체 지도자, 사업가, 외국 외교관들과 잇따른 대화를 통해 암담한 실상이 드러났다. 중산층은 말살되고 망명을 떠났으며, 교육시스템은 국가의 인적 자본을 전혀 양성하지 못하고, 민간부문은 공동화되어 정권의 추종자들만 천연자원을 팔아서 이익을 챙긴다.

나와 대화를 나눈 한 미얀마 사업가가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두 번 제재를 받는다”고 그는 탄식했다. “첫 번째는 정권에 의해, 둘째는 서방에 의해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최근 그런 문제를 인식한 듯 “우리가 선택한 제재조치는 미얀마 정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러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포용하려는 노력도 그들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제 미국-미얀마 관계에서 나타나는 잠재적인 해빙의 신호는 포용정책이 실효를 거둘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서방 정책입안자들의 단기적인 필요성과 극적인 양보 요구를 충족시키는 성과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불량국가들의 입장에서 신흥 강국들은 외교적인 명분과 정치·경제적 대안 모델 역할을 한다. 미얀마의 경우, 서방의 제재는 중국과 인도로 하여금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나라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란의 경우, 서방 압력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대안 연합(러시아·중국 등)을 결성하고 제재를 빠져나가는 기술을 연마할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

제재조치로 인해 이란 에너지 부문의 발전이 둔화되고 경제성장이 멈췄지만 정권은 제3국을 통해 금지품목을 밀거래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미국 달러 이외의 다른 통화로 그런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비서방 국가들을 초청해서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어 인프라·에너지·전자통신 같은 경제 핵심부문에 참여를 유도했다.

제재 조치가 이란의 핵농축 프로그램, 그리고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지역의 꼭두각시 단체를 통한 무력행사를 저지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실패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당초 오바마 정부는 (자신과 세계에) 솔직하게 제재조치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대신 포용정책을 펼쳐서 이란의 합법적인 안보이해를 배려하면 핵프로그램의 무기화를 중단하도록 이란 정권을 설득할 수 있을지 타진했다.

그러나 이제 협상진전을 위한 연말 시한을 넘기면서 오바마는 대이란 무역의 보험과 재보험을 포함해서 에너지·운송·금융 부문에 대한 ‘더 지능적인’ 종합 제재 방안을 추진하리라 예상된다. 그 목표는 다름아닌 이란 경제의 숨통을 조여 현 정권이 표면상 견디기 어려운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취지다.

그러나 금수조치가 주효하려면 다른 강국들도 동참해야 한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오바마 정부는 당초부터 미국의 포용정책이 이란 정부에 통하지 않더라도 그 정책이 대단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강력한 유엔 제재의 이행에 러시아와 중국이 동참하리라고 가정했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더 타협적인 미국을 선호할지도 모른다(미국이 또 다른 중동 사태에 휘말려 수십 년 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고 비싼 대가를 치르는 꼴을 양국이 가장 보고 싶어할 가능성은 당장은 제쳐두더라도). 그러나 미국의 타협적인 정책이 러시아나 중국과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바꿔놓을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란과 통상관계를 원하고, 중국은 석유와 가스를 원한다. 그리고 양국 모두 페르시아만에 전략적인 입지를 확보해서 미국의 지배를 견제하고자 한다. 미국은 이란을 바라보는 시야를 좁혀서 오로지 핵에만 초점을 맞추는 반면 다른 신흥 강국들은 핵 문제를 이란 관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미얀마나 이란의 경우 다른 불량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에 걸친 서방 제재는 국민들을 헐벗게 만들고, 지배자들에게는 재산과 정권 안정을 주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비난에 꿈적하지 않는 정부에 전략적 영향력을 안겨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

실제로 억압적인 정권을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노력이 오히려 그 정권의 눈엣가시인 개혁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에게 외세개입에 맞서 단합하도록 촉구하는 명분을 주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실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불량국가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을 실현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완전히 끝내고, 전통적인 상업계층과 통상을 개방하고 자유화하며, 학생들을 교환하고, 일반 대중의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방법 등이다. 무기금수와 집권 지도층의 비자 제한은 유지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정책은 신흥강국과 라이벌 강국(불량국가 국민들뿐 아니라)들의 지지를 얻고 일련의 변화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어 세계의 안전과 책임 있는 정부를 낳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런 규모의 정책변화에는 물론 미국 정계의 반발이 가장 심할 듯하다. 미국 보수파들은 오바마가 ‘악의 축’ 국가들과 ‘타협’하려는 증거라며 들고일어날지 모른다. 진보파들은 인권 어젠다를 외면한다며 비난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오바마가 다른 어느 미국 지도자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진실은 불량국가를 고립시키는 미국의 정책이 명백히 실패했으며 오늘날 비중 있는 강국들과 다시, 그리고 진정으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야 불량국가들의 안정과 인권상황을 개선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런 접근법이 단시일 내에 우고 차베스의 독설이나 로버트 무가베의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김정일의 피해망상을 완화하거나, 아마디네드의 철권통치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저항을 촉구하는 그들의 외침에 덜 민감하고 그들이 (나라 안팎으로) 정통성 시비에 더 취약해지도록 글로벌 환경을 바꿀 수는 있다.

정통성 시비는 시간이 지나면 어떤 정권에나 아킬레스건이 된다. 끝으로, 오바마의 포용정책이 단순히 말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21세기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필자는 1997~2003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이었으며 런던에 있는 국제전략연구소의 자문 선임 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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