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그대 있었음에…
호암, 그대 있었음에…
삼성은 반도체사업 초창기에 고전했다. 반도체 양산에 나선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 연속 손실을 봤다. 반도체는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뒤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암은 단호했다. 반도체가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이며 삼성은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비전은 오늘날 삼성 반도체의 초석이 됐다.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에서 호암의 집념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어느 날 호암께서 반도체와 관련되는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이 왔다. …누적적자가 1200억원이라는 것과 1메가 D램 공장 착공을 당장에 하지 않으면 출하경쟁에서 후발이 될 것이라는 걱정이 나왔다.
호암께서는 단호했다. ‘64K·256K D램이 시장 도입이 늦어 큰 고생을 했는데 1메가 D램의 공장 착공이 늦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일 아침에 착공식을 하자. 내가 기흥 공장으로 가겠다.’ …4메가 D램 이후 우리 생산이 선진 회사보다 먼저 시작되는 계기가 이런 식으로 마련됐던 것이다.”
기흥 반도체 공장 건설 책임자로 일한 성평건 전 삼성종합화학 사장은 1985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줬다.
“엄청난 적자가 쌓이는데도 호암은 흔들리지 않았다. 1메가 D램 라인을 깔기 전에 내부 반대가 컸다. 그러자 호암은 당신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기공식부터 했다. 부랴부랴 준비했다. 행사 후 호암은 일본으로 출장 갔다. 그날 하필 비가 내렸다. 그러자 몇몇이 ‘이제 삼성이 어려워질 징조’라고 수군댔다.”
1. 역작을 위한 외로운 결단
적자 누적 반도체에 과감히 투자호암은 반도체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고, 반도체는 그의 마지막 역작이 됐다. 반도체사업 추진 과정에는 기업가 호암의 면모가 모두 담겨 있다. 호암은 시대를 앞지르는 혜안을 가졌고 이를 통해 뚜렷한 비전을 만들었다.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철저하게 숙독했고 전문가들을 만났다.
그 다음엔 그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사항을 점검하고 준비했다. 일단 결정한 사업은 대규모로 과감하게 추진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0년 봄 일본 전문가에게서 “일본이 살 길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새로운 사업 착수 여부를 고려할 때 세 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국가적으로 필요한지,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지였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이 기준에 견주어 그때 과제가 반도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반도체는 난제가 산적한 사업이었다.
선진국을 추격해 기술 수준을 단기에 따라잡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금액을 투입해야 했다. 제품 주기가 짧은 위험이 있었다. 기술 두뇌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입지가 서울에서 한 시간 이내여야 했다. 그는 1982년 ‘정부의 뒷받침이 있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반도체 사업팀을 구성했다.
이듬해 2월 도쿄에서 사업 구상을 최종 마무리했다. 삼성이 반도체공장 부지로 삼은 기흥은 당초 정부의 특별용지로 예정돼 있었지만 당시 정부가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을 이해해 삼성이 활용하도록 특별히 양해해줬다. 호암은 성평건 건설본부장이 반도체산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일본 반도체 전문가를 초청해 공장 착공 전부터 현장에 상주시켰다.
성 전 사장은 “호암은 늦게 시작하는 우리가 선진국을 이기려면 출발 시기를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며 “18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된 반도체공장 건설공사를 3분의 1인 6개월에 마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기흥 부지는 원래 평지가 아니라 구릉지역이었다. 공사팀은 야산을 깎아내는 일부터 했다.
6개월 내 완공하라는 지상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24시간 무휴 작업에 돌입했다. 성 회장은 “호암이 매주 현장에 들러 ‘반도체사업의 비전과 공기 단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2. 고정관념을 깨라!
1954년 제일모직 세울 때부터 다져진 호암 경영학의 핵심이 회장의 사업 추진 방식은 삼성의 초창기 때 이미 확립됐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결론을 내렸고, 일단 결심을 세운 뒤엔 모든 난관을 돌파했다. 제일모직도 그런 과정을 거쳐 설립됐다. 호암이 제일모직 구상을 내놓았을 때 모든 임원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본, 기술, 시장 등 어느 모로 보나 위험 부담이 너무 크므로 굳이 섬유를 택할 바에는 면방이 안전하다”고들 말했다.
호암은 반대를 무릅쓰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세웠다. 경제계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산업과 경쟁한다는 발상부터 어리석다” “제당에서 요행으로 성공하더니 세상 만사를 너무 손쉽게 생각하고 있다”고들 했다. 임원들은 공장 규모를 작게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경쟁에서 손색없는 최신·최고 시설의 대규모 공장을 건설해야만 품질 좋은 상품을 낮은 원가에 생산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미국의 모직기계 제조업체 중역은 호암에게 “한국 자력으로 지은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제품이 생산된다면 내가 하늘을 날겠다”고 겁을 줬다.
그는 모직은 어려운 사업이고 입지·기상·수질 등 적어도 24개 항목에 걸쳐 우수한 전문 기술자가 동원돼야 하며 경험이 풍부한 많은 전문가의 적확한 직접 지도가 없으면 완전한 모직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호암은 그 중역에게 책상 서랍에서 메모를 꺼내 보여줬다. 그 메모에는 모직공장 건설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온도·습도 등 기상조건에서부터 전력·노동력·교통·용수·수질은 물론 종업원에 대한 기술지도 훈련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48개 항목에 걸친 문제점과 대응책이 적혀 있었다.
‘전인미답의 처녀지’ 걷는 어려움호암 경영의 특징은 조사와 분석, 결단과 실행계획 수립이다. 그는 삼성 초기의 어려움으로 ‘전인미답의 처녀지’라는 점을 들었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해방 후 거의 무의 상태에서 출발했다. 새로 착수해야 할 사업 내용이나 그 경영관리 방식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듣고 싶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하나하나 자문자답하면서 혼자 그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매년 새해를 도쿄에서 맞으면서 일본의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조언을 받으며 사업을 구상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모모세 다다시 미쓰이물산 고문은 “호암은 일본에서 전문가를 만났을 뿐 아니라 수많은 자료를 입수해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호암은 자신의 독서와 관련해 “독서는 다독이라기보다는 난독”이라고만 짧게 언급한 바 있다.
호암은 복잡다기한 현실에서 핵심을 집어내는 안목이 탁월했다. 자신의 근무 경험을 담아 『삼성비서실』을 쓴 박세록씨는 “회의가 끝나면 호암이 내용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렸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고 들려줬다.
3. 명품이라고 다 같은 명품 아니다
명품도 제품마다 느낌과 품질 제각각그런 안목은 타고난 분석·직관력과 부단한 훈련으로 키워진 것이었다. 호암의 취미 중 하나는 수집이었다. 그는 골동품 외에도 골프채, 시계, 만년필 등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품목을 모았다. 그냥 고가품을 사들인 게 아니었다.
그는 “파이프를 수집할 때 영국제는 왜 유명한지, 덴마크제는 모양이 좋으면서 왜 질이 떨어지는지, 던힐 파이프가 세계적인 명성을 그토록 오래 지니고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 이런 측면에 항상 관심이 쏠린다”고 회고했다. 애연가였던 그는 체질에 가장 적합한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읽고 전문가에게 묻기까지 했다.
호암이 좋아한 만년필 브랜드 가운데 프랑스의 워터맨의 품질을 분석한 얘기도 인상적이다. 그는 고가 만년필이라 하더라도 펜촉에는 각기 개성이 다르고 품질에도 다소 우열이 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좋은 것은 2~3%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고급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수집한 여러 자루의 워터맨 만년필을 직접 써 보도록 했더니 “모두들 내 말이 옳다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됐을 때엔 위암에 관한 세계의 권위 서적을 구해 공부했다. 그는 ‘이제까지 내 모든 사업을 관리해 온 방식 그대로 내 건강도 한 번 관리해 보리라’고 작정했다. 집도의도 이 조사로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집도의의 충고에 따라 40년 동안 즐긴 담배를 끊었다.
호암은 “일생의 80%를 인재 양성에 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는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인재를 키우고 이들이 조직적으로 능력을 보완하고 협력하도록 조직을 운영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모든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인재를 기용했고 그 시기가 절묘했다.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삼국지 경영학』에서 “이병철 회장은 인재를 공격형과 안정관리형으로 나눠 새 사업을 일으키거나 공장을 지을 땐 물불 안 가리는 공격형을 보내지만 그 단계가 마무리되면 안정형을 보냈다”고 예를 들었다.
4. 인재가 최고의 기업 자산
사람 소중히 여기고 따뜻하게 대해이병철 회장은 창업세대 가운데 가장 조직적으로 인재를 키웠다. 경력 관리를 체계적으로 했고 다소 벅찬 일을 맡겨 항상 도전적으로 일하게 했다. 최우석 전 부회장은 “호암은 책임자가 그 일을 해내게끔 뒷받침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이병철 회장은 누가 하는 어떤 일을 믿고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물론 주위에서도 알게 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사람과 일에 힘이 붙게 되어 사업 추진이 쉬워졌다. 성평건 전 사장은 반도체공장을 지을 때 일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외부에선 이 회장이 냉정하다고 알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내가 본부장 때 사장단과 함께 회의하고 식사하는 자리가 있으면 호암께서는 생선회 한 점, 과일 한 조각이라도 내 접시에 직접 얹어줬습니다. 그는 인간미가 있는 경영자였습니다.”
이는 속 깊은 정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사장단에 반도체 사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책임자에게 신뢰를 주는 행위로도 이해된다. 최우석 전 부회장은 호암의 인간적인 면모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일할 땐 서릿발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만 사적인 일엔 무척 자상했다. 보고를 받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꼭 밥을 먹고 가라고 붙들었다. 회장을 모시고 식사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사양하고 그냥 가려 하면 때가 되었는데 그냥 가는 게 아니라며 밥을 먹고 가게 했다. 옛날 모두 어렵게 살던 시절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여 보내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과일 같은 것도 먹으라고 한 쪽씩 집어주곤 했다.”
호암의 기일은 11월 19일이다. 성 전 사장은 기일이면 호암 묘소를 찾는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매년 갈 겁니다. 호암께서 내게 베풀어준 사랑과 가르침에 정말 감사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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