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도 등용할 안목 있는가?
천민도 등용할 안목 있는가?
국제경영원에서 ‘역사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2기 과정을 개설했다. 동서양의 사건과 군주부터 장군을 넘나드는 역사 속의 인물을 통해 새로운 역사관과 리더십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사계(史界) 전문가와 경영학의 만남이 중심을 이룬다. 개강 첫날인 지난 4월 1일에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성공한 군주, 실패한 군주’라는 강의에 30명의 수강생이 눈과 귀를 모았다. 다음은 강의 요약.
조선의 왕 27명 중 성공한 왕은 손에 꼽힌다. 참모사(史)라고 불리는 중국사에 비해 한국사에서 참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에서 왕사나 국사는 보통 승려 차지였고, 현실에 지친 왕에게 정신적으로 힘이 돼주던 존재였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했다. 바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선조와 유성룡의 관계다.
어떤 참모를 쓰느냐에 미래 좌우된다고려의 관료였던 정도전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 회진의 천민 부락에 유배됐다. 천민과 함께 생활하며 그의 세계관에 농민의 시각이 담긴다. 고려는 60~70명에 불과한 권문세족이 모든 토지를 차지하고 나머지 백성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농업국가에선 자영농이 몰락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가 뜻을 전했다. 조선의 건국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정도전의 혁명사상 결합이었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머릿속에서 나온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일어났다. 1388년 조정은 위화도 회군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이때 정도전은 조준에게 토지개혁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해 토지개혁으로 관심을 옮겼다.
어젠다를 이끄는 쪽이 세상을 지배한다. 정도전은 동양사회에서 가장 이상으로 삼는 정전제를 실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건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만 한 나라를 세우는 데는 이념과 사상이 필요하다. 정도전이란 좋은 참모는 변방의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를 개국 시조로 만들었다.
반대로 참모를 활용하지 못한 왕도 있었다. 선조는 평화 시기에는 그럭저럭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위기 시기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외침이 예상됐지만 제대로 된 준비가 없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제승방략 체제(한 지역에 모든 군사를 결집해 일거에 적을 격퇴하는 전략)를 고수한 조선은 군사 8000명으로 왜적을 일거에 물리치려다가 일거에 패전한다.
위기가 왔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도전의 의도와 달리 양반은 병역의무가 면제됐다는 것이다. 실록에 “적병들 중 반이 백성들이라던데 사실이냐?”라고 선조가 묻는 대목이 있다. 실제 피란으로 텅 빈 형조와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장예원에 불을 지른 건 백성이었다.
가난한 백성에게 강제로 병역의무 대신 포를 납부케 하니, 나라를 지켜야 할 백성은 적의 편이었다. 임진왜란의 반전은 유성룡이란 탁월한 참모의 머리에서 나왔다. 유성룡은 적의 머리 하나를 베면 양인으로 신분상승을, 셋을 베면 벼슬을 준다는 면천법을 만들었다. 마을별, 가구 수별로 할당돼 부담이 컸던 공납을 토지별로 부과하는 작미법을 실시했다.
백성이 마음을 돌린 계기가 됐다. 전쟁 통에 굶어 죽는 백성을 위해 압록강의 중강진에 중강개시란 국제자유무역시장을 열었다. 조선에서 쌀 한 말 값이었던 포 한 필을 중국에 팔아 쌀 스무 말을 얻었다. 그리고 소금이 모자라자 염호(소금 생산자)에게 소금의 반을 주는 정책을 폈다.
유성룡은 정책을 바꿨을 뿐이었지만 망해 가는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다. 정치적 위기를 느낀 선조는 전후 유성룡을 제거한다. 그 뒤 전시의 개혁안은 모두 폐지되고 조선 후기 지루한 역사가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 조선이 가장 꽃핀 건 세종 때라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상을 갖춘 세종은 역사서 다독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의 태평성대는 태종의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태종은 정몽주 격살부터 제1, 2차 왕자의 난 등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피를 흘렸다. 국가가 건설된 후에는 법치가 확립돼야 한다. 태종은 가족적인 사고를 버렸다. 태종이 왕이 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공신인 이숙번마저 귀향 보낸다.
법이 바로 세워졌으니 아무도 감히 왕권에 도전하지 못했다. 개국한 뒤 법치를 통해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거스르는 경우가 있다. 세조가 그렇다. 세조는 무뢰배를 끌어들여 왕이 됐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학은 충과 효를 최우선시했다. 단종에게 충을 바친 신하들은 당연히 사육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조는 한마디로 조선의 건국이념을 뒤집은 쿠데타를 실행한 것이다. 이후 100년간 네 번의 사화가 일어난 뒤에야 사림파의 집권으로 마무리됐다. 정권에 맞서 싸울 줄 알았지만 정권을 맡아 안정시킬 줄 몰랐던 사림은 동서로 나뉘어 붕당정치를 시작했다.조선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인조의 즉위다.
충효를 목숨처럼 여겨야 할 유학자들이 인조반정을 꾀했다. 유교국가에서 신하들이 왕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서인들은 교묘한 논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진정한 임금은 광해군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명을 배신한 광해군을 내쫓은 건 불충이 아닌 충이라 생각했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대주의다.
인조반정이 문제인 것은 이로 인해 두 번의 호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을 부정하고 다 쓰러져가는 명을 숭상하는 조선을 당시 강대국인 청이 가만둘 리 있겠나? 반정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백성이 고생한 것이다.
정조가 5년만 더 살았더라면…노론과 소론의 붕당정치 격정 속에 왕위에 등극한 정조는 가장 먼저 자신이 호적상 효장세자의 아들일지 모르나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정조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되,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 남인을 중용해 일당 전제를 다당제로 전환했다. 성리학 유일사상 체계에서 이단시되던 양명학과 서학을 받아들여 사상의 다원화를 추구했다.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박제가 등 서자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했다. 사회를 가로막는 요인이었던 강고한 신분제를 흔들었다.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을 시작했던 건 정치적이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고 화성을 만들었다. 화성 건설에는 거중기와 임금 노동의 효율성이 더해졌다.
화성 근처에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국영 시범 농장인 대유둔을 건설해 농업 혁명을 선도했다. 정조는 화성 앞에 십자로를 만들어 인위적으로 상권을 조성했다. 농산물 증가를 바탕으로 상업 혁명도 이룰 수 있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한 수원 화성은 농·상업의 전진기지로, 미국의 테네시강 개발사업과 맞먹는 성공을 거뒀다.
당대 최고의 과학지식자였던 정조가 단 5년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실학 개혁 정책이 이어져 조선의 미래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정조의 승하 뒤 대규모 민란이 많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공한 군주는 시대정신을 읽고 철저한 자기 혁신과 독서를 통한 지식경영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반면 실패한 왕은 시대정신에 반해 과거 지향적 태도를 가졌으며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했다. 세종이 역사서에서 배운 것을 국가 경영에 응용했듯이 경영자 여러분도 성공과 실패를 겪은 왕들의 역사를 통해 사업 경영에 응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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