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聖과 俗 권력 줄타며 막대한 富 쌓아

聖과 俗 권력 줄타며 막대한 富 쌓아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독일에서는 푸거 가문이, 벨기에엔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이 중세 유럽의 비즈니스를 주름잡았다. 이들 가문은 교권(敎權)과 왕권(王權) 사이를 오가며 사업권을 따냈다. 그리고 각각 은행업, 광산업, 운송업을 주축으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러나 당시는 이자와 이윤이 종교적·사회적으로 비판받던 시대였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과 타협해 교회 건축물을 짓는다. 교회 건축물을 장식하는 다양한 예술품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이재규 전 대구대 총장이 르네상스 시대 패밀리 비즈니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디치 가문의 본거지 피렌체 전경.

▎메디치 가문의 본거지 피렌체 전경.

십자군전쟁은 세계사에 여러모로 큰 획을 그었다. 상업의 역사에도 당연히 큰 의미를 던졌다. 십자군전쟁의 길목에 있었던 여러 상업도시, 예컨대 베네치아, 제노아, 피렌체 등은 물자 조달과 군대 이동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고,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부강해지게 되었다.

유럽의 상인은 동방의 물건, 즉 향수, 후추, 양탄자, 비단, 유리병 등을 싸게 구입해 유럽에서 비싸게 팔았다. 게다가 국왕도 지방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상인계급과 손을 잡음으로써 상인은 세력을 더욱더 넓혀갔다.‘물건이 국경을 넘지 못하면 총칼이 국경을 넘는다’라는 말이 있다.

싼 가격의 물건은 비싼 곳으로 팔려 나가거나, 아니면 그것을 사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대체로 전쟁은, 지도자의 이기적인 정복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발하기도 하지만, 그런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발하기도 한다.

▶르네상스를 만들어낸 메디치 가문 = 십자군원정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가 동방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시대 이후 다시 한번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특히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는 주변 여러 도시와의 경쟁을 물리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게 됐다.

이는 메디치 가문이라는 전대미문의 강력한 금융 명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피렌체 북쪽 지방의 농부에 불과했던 메디치 가문의 선조는 십자군원정 덕분에 점점 번창해 가는 상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유의 도시 피렌체로 옮겨왔다. 메디치 가문은 동방무역, 귀족을 대상으로 한 비단 제조업, 서민을 대상으로 한 의류 제조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닌 메디치 가문이 유럽 최고의 부호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은행업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은행(bank)이라는 단어는 의자(bench)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banco’에서 유래했다. 초기 이탈리아 은행의 비품이라곤 의자와 책상, 그리고 금과 은을 측정하기 위한 저울이 전부였다.

따라서 파산을 의미하는 ‘bankruptcy’는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은행의 의자를 부수었다는 의미다. 국제금융의 중심지 피렌체에는 메디치 은행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후반 피렌체에는 72개의 은행과 어음 중개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은행 중 가장 상위 격인 대은행(banchi grossi)도 33개나 있었다.

물론 그중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창했다. 당시 메디치 은행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환전 업무였다. 피렌체는 서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보석을 동방에서 생산되는 후추나 비단 등과 교환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피렌체의 화폐인 플로린은 실질적으로 세계 공용화폐로서 무역상이나 성지순례자 사이에 통용되었다.

각국 화폐의 금과 은 함유량을 기준으로 화폐교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피렌체의 은행은 자연스럽게 국제금융의 핵심인 환전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당시 한 가정의 연수입이 150플로린이면 대체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422년 피렌체의 통화량은 200만 플로린이었고, 피렌체 도시공화국의 조세 수입은 30만 플로린이었다.

피렌체의 연간 조세 수입이 150년 뒤 영국과 아일랜드가 엘리자베스 1세(1533~1602)에게 바친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4세기 말 피렌체에 정착한 조반니 디 비치(1360~1429)는 1397년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해 착실히 돈을 벌었다.

조반니가 은행가로서 크게 성공한 것은 그 당시 피렌체에서 번성한 모직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 것, 즉 교황청과의 인맥도 한몫했다. 조반니는 코시모(1389~1464)라는 아들을 두었다. 코시모는 바르디가(家)의 딸과 결혼했는데, 바르디 가문 역시 한때는 피렌체의 유력 은행가 가문이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 초상화.

▎코시모 데 메디치 초상화.

한때라고 과거 일처럼 말하는 것은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이 경영하던 은행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1337~1453)을 치르던 영국의 에드워드 3세(1312~1377)에게 무려 136만5000플로린을 공동으로 대출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전투에서 지고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결국 파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대출이 은행 경영의 가장 큰 변수다. 메디치 은행은 확고한 공신력과 각국에 퍼져 있는 지점망을 바탕으로 상인들에게 금과 은 같은 금속 화폐가 아닌 환어음을 유통시켰다. 무역상들이 금이나 은 같은 화폐를 들고 다니면서 무역을 할 경우 무겁기도 하거니와 해적이나 도적에게 약탈당할 위험이 많았는데, 은행이 발행한 교환증서인 환어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권력을 등에 업고 법률상 문제가 많았던 은행업을 이끌어 나갔는데, 메디치 은행이 고안한 환어음도 사실은 대출 이자를 명시적으로 받을 수 없어 편법을 쓴 것이다. 환어음의 속성상 환전 수수료가 붙는데, 이 수수료가 실질적인 대출이자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피렌체의 은행들은 환어음을 통해 엄청난 수수료 수입을 올렸다.

메디치 은행의 또 하나 중요 업무는 오늘날 은행 시스템의 핵심 역할인 대출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일반인들에게 보석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단순한 전당포 업무에서 시작해 모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원거리 무역상, 프랑스와 영국의 국왕, 그리고 교황에게까지 신용을 제공하는 다국적 금융자본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는 불가분의 관계다. 메디치 가문이 메디치 은행의 장기적인 독점이윤을 보장받기 위한 여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는 대출의 대가인 이자를 받는 행위를 일종의 죄악으로 취급했다. 이에 따라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은행가와 상인은 임종 때 과거 자신들이 이자를 받았던 것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야 했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단테(1265~1321)는 『신곡』에서 고리대금업자를 살인자의 옆인 일곱 번째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미켈란젤로(1475~1564)조차 “모든 은행가는 도둑”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고리대금업은 대중과 교회의 비난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고리대금업인 은행업을 주력으로 하는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을 안정적이고 무리 없이 경영하기 위해 일반 대중과 권력층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은행업 통해 유럽의 巨富로은행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교황청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수호자인 교황은 단순한 편법으로는 피해 갈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코시모와 당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 1447)와의 타협이다. 교황은 코시모가 산마르코 수도원 건축기금을 기부하면 그 대가로 모든 죄를 사한다는 교황령을 발표할 것을 제안한다.

자선이라는 방법을 통해 고리대금업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돈벌이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 것이다. 코시모는 그 방법을 맘껏 활용했다. 이러한 대타협 이후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명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수많은 교회 건축물을 짓게 된다. 이에 따라 건축물을 장식하는 다양한 예술품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는 곧 르네상스로 연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메디치 가문의 예술에 대한 투자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대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위대한 로렌초’로 불리는 그는 르네상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도자이자 시인으로서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로렌초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빠질 수 없는 예술가들, 즉 보티첼리(1445~ 1519),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했다. 그러나 로렌초가 피렌체를 통치하던 시절부터 메디치 은행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은행의 런던 지점은 장미전쟁 때 결정적으로 잘못된 편에 투자했으며, 1470년 에드워드 4세가 왕좌에서 쫓겨나고 일시적으로 헨리 6세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 때 메디치 은행 런던 지점은 파산했다.

▎우피치 박물관에 있는 ‘최후의 만찬’.

▎우피치 박물관에 있는 ‘최후의 만찬’.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는 궁전 내부 모습.푸거가는 ‘독일의 메디치가’라고 불릴 만큼 아우구스부르크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는 궁전 내부 모습.푸거가는 ‘독일의 메디치가’라고 불릴 만큼 아우구스부르크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밀라노와 브뤼지에 있던 지점들도 도산했고 리옹, 로마, 나폴리에 있던 지점들도 파산 직전에 놓였다. 이 모두가 로렌초의 잘못은 아니었다. 도

시 경제력의 변화에 따라 피렌체가 국제금융에서 차지하던 최고의 자리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문과 메디치 은행도 쇠락해 가는 이탈리아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 조반니로부터 4대째만의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권력을 조합해 세계 최초로 국제적인 금융왕국을 건설한 메디치 가문의 전략은 이후 나타난 수많은 국제금융 자본가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주요 특징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몰락했지만 마지막 생존자였던 안나 마리아(1667~1743)는 메디치가의 소장 예술품과 수집품 모두를 국가에 헌납하고는 유언에 단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단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말기 바란다.” 그 유언 덕분에 우피치 박물관은 연간 500만 명에 가까운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비즈니스는 유한하지만 예술은 영원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독일의 메디치’ 푸거 가문 = 독일의 푸거 가문은 여러모로 메디치 가문과 비교된다.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1367년 한스 푸거(1348~1409)는 직물업 길드에 속한 장인의 딸과 결혼하고는 직물업을 시작했다.

한스 푸거의 손자인 야코프 주니어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독일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 황제(1459~1519)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 담보로 티롤 지방의 은광과 동광 채굴권을 획득했다. 야코프 주니어는 이 모험투자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 데 이어 헝가리의 광산개발에도 참여했다.

1494년 푸거 가문은 5만4385길더의 자금으로 처음으로 주식공모를 통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수익성이 좋은 향료무역 등 각종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은행 송금제도와 우편제도를 도입해 착실히 부를 쌓아갔다. 1514년 막시밀리안 황제는 그에게 백작작위를 내렸다.

야코프 주니어는 막시밀리안의 후임 황제로 카를 5세(1500~1558, 막시밀리안 황제의 손자)를 선출하는 데 재정을 지원했다. 85만2000길더의 총 선거자금 중 약 54만4000길더를 지원함으로써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1494~1547)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막았다. 야코프 주니어는 1516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1491~1547)에게도 다양한 형태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밀접한 교분을 가졌다. 이렇게 되자 “왕은 군림하고 은행은 지배한다”라는 말도 생겼다.



단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마라전성기를 맞이한 야코프 주니어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는데, 루터는 야코프 주니어의 금융정책, 이자 징수제도, 면죄부와 성직 판매에 대해 비난했다. 야코프 주니어는 자신의 사업과 가톨릭교회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자 종교개혁에 맞서 싸웠다.

위기는 내부에도 있었다. 티롤 광산을 비롯해 여러 광산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와 헝가리 귀족들의 광산 국유화 시도, 그리고 농민반란 등으로 푸거 가문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부르크 본사에서는 숙련공들이 시위를 일으켰지만, 야코프 주니어는 이 같은 위기를 침착하게 극복해 나갔다.

1522년 신성로마제국 뉘른베르크 의회는 야코프 주니어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의회의 한 위원은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대기업이 국민경제에 끼치는 해악은 노상강도와 도둑을 합한 것보다 더 크다. 따라서 푸거 가문의 구리 독점사업에 규제를 가해야 한다.” 이 말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반독점법을 추진할 때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에 대한 비난과 매우 유사하다.

이에 대해 푸거 가문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 높은 제품의 가격과 독점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폈다. “구리 가격이 높아야 기업이 구리를 채굴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만약 구리 가격이 낮으면 구리광산은 폐광되고 결국 광부들의 일자리는 없어지며, 주변의 음식점을 비롯해 숙박업소와 유흥업소 등 가게들이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구리의 독점은 구리를 생산하는 기업을 살찌울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처우와 공동체의 생활환경을 개선한다.” 푸거 가문의 승리는 변호사의 힘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이 소송은 흐지부지되었다. 야코프 주니어는 지금도 아우구스부르크에 남아 있는 푸거 가문의 웅장한 건물, 아우구스부르크 교회, 가난한 늙은 사람들을 위한 세계 최초의 빈민구제 시설인 푸거라이를 건설했다.

푸거라이는 아우구스부르크의 성벽 안에 다시 성벽을 쌓고 67채의 건물을 지어 ‘도시 안의 도시’라고 불린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 야코프 주니어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뒤를 이을 자식도 없었다. 그러나 침착하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오래전부터 회사의 방향을 미리 정해 두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자산을 현금, 공장, 상품, 토지, 귀금속 등으로 나누어 신중하게 분산 투자했다. 1525년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날 때 야코프 주니어는 미리 조카 안톤 푸거(1493~1560)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업을 물려주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 유럽의 가문들은 교황청의 규제 속에서도 타협점을 찾아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 유럽의 가문들은 교황청의 규제 속에서도 타협점을 찾아냈다.



왕은 군림하고 은행은 지배한다안톤은 잉글랜드에 옷감을 수출하고 잉글랜드 국왕들에게 융자를 제공해 사업상 큰 성공을 거둔 반면, 생산량이 줄어든 티롤과 헝가리의 광산들에 대해선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광산에서의 결손을 충당하기 위해 페루 및 칠레와 무역을 개설하고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광산에 신규 투자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에 수출하는 노예무역까지 손을 댔으나 별다른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향료무역과 헝가리의 가축 수입에서는 성공했다. 안톤은 1546년까지 510만 길더를 축적해 푸거 가문 역사상 최고의 자본금 기록을 세웠다.

1540년께 건강이 쇠약해진 안톤 푸거는 아들과 조카들이 사업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기업 해체까지 고려했다. 안톤 푸거의 후손들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고 귀족 노릇을 했다.

후손들은 그들의 계급 내에서 결혼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가문의 영토에서 지내면서 도서관을 설립하고 웅장한 저택을 건립했다. 결국 푸거 가문의 회사는 신·구교도 사이에 발생한 30년전쟁(1618~1648)이 끝난 후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운송업으로 돈을 번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 = 12세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평원에서는 여러 가문이 밀라노의 지배권을 손에 넣기 위해 자주 전쟁을 했다. 그들은 각자 성을 짓고 진지로 삼았다. 그들 중 타소라는 한미한 가문은 베르가모에서 가까운 조그만 산악도시 코르넬로 데이 타소(Cornello dei Tasso)를 근거지로 삼았다.

많은 세월이 흘러 타소 가문의 프란치스코 타소(1459~1517)는 1489년 루지에로, 레오나르도, 그리고 자네토 등 3명의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사이를 오가는 우편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번성하자 프란치스코 타소는 인스브루크 사업장을 동생 자네토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름을 독일식으로 프란츠 탁시스로 바꾸고는 벨기에 브뤼셀로 가서 브뤼셀과 오스트리아 빈을 연결하는 역마차 우편사업을 벌였다. 우편사업은 합스부르크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리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1415~1493)는 1940년 프란츠 탁시스에게 우편사업 독점권을 부여했다. 게다가 황제는 프란츠 탁시스의 조상이 델라 토레의 후예라고 인정하고, 가문의 문양에 Torre(탑, Thurn)과 Tasso(오소리, Taxis)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따라서 이 가문의 명칭은 독일어로 ‘Thurn und Taxis’가 되었다.

투른 운트 탁시스의 배달의 신뢰성과 속도는 경쟁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말을 거점역에 항상 대기시키고 릴레이 방식으로 브뤼셀에서 파리까지는 2일 이내, 브뤼셀에서 인스브루크까지 5일 이내에 배달했다. 1512년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우편 관련 업무에 독점권을 주었다.

1516년 11월에 이 가문은 우편사업을 브뤼셀에 기반을 두고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해 로마, 나폴리, 스페인, 독일, 프랑스를 잇는 우편운송 사업을 벌인다. 1534년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은 카를 5세에 의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우편업무 독점권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은 1608년 남작 지위를, 1624년에는 백작 지위를 하사받는다.

대공의 지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1681년 수여했고, 1695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세가 대공 지위를 수여했다.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의 우편사업은 18세기 스페인 왕가가 이를 인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748년부터 이 가문은 레겐스부르크 센트 에머람 성에 주요 거주지를 장만하고 박물관, 맥주 양조장 등 각종 사업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나폴레옹에 의해 유럽에서의 독점적인 우편사업 위치를 위협받게 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독점권을 잃게 되었지만,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은 그 전에 이미 사업을 다각화했다.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은 6대째가 되자 독일 유력 왕가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막시밀리안(1831~1867)은 바이에른 왕국의 헬레네(1834~1890)와 결혼했다.

헬레네는 다름아닌 ‘씨씨’로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1830~1916) 황제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언니였다. 헬레네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황제비로 간택되어 있었다.

그러나 헬레네는 젊은 황제가 자신의 여동생을,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아이콘인 엘리자베트를 더 좋아하는 바람에 황제비가 될 기회를 놓치고 투른 운트 탁시스 대공비가 되었다. 엘리자베트와 헬레네 두 자매는 각각 1898년과 1890년, 그러니까 동생이 언니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기업의 흥망 이유는 = 데이비드 매클리랜드는 1961년 『성취사회』라는 저서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피렌체가 유럽의 정치, 금융,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 주민들의 성취욕구가 높았기 때문이었으며, 그 후 도시가 쇠퇴한 이유는 선조가 이룩한 도시의 유산으로 잘살 수 있게 되자 주민들의 성취욕구가 사라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점은 푸거 가문에서도,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에서도, 그리고 세계 최대 석유 그룹을 창업한 미국의 록펠러 가문, 세계 최대 화학산업 그룹인 듀폰 가문, 그리고 이탈리아 피아트 자동차의 아넬리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피터 드러커는 이 세상 기업 대부분은 가족기업인데, 가족기업이 영구적으로 번영하려면 가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기업이나 중기업의 전형적인 문제는 높은 자리는 대개 가족 구성원들에게 할애된다는 점이다. ‘사촌을 돌봐야 하니 그에게 일자리를 주어야만 해’라는 것은 가족기업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런 경우에는 일 잘하고 의욕적이고 유능한 비가족 구성원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유능한 비가족 구성원은 회사를 떠나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문능력을 발휘하지 않거나, 인정받는 만큼만 일을 한다.

소기업과 중기업 최고경영자는 시야가 좁아, 그리고 외부와의 접촉이 적어 결국 회사가 위축되기도 한다. 그 결과 그들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식이 부족하게 되고, 능력이 뒤떨어지게 돼 결국 회사의 성공에 영향을 미칠 사회적 변화를 놓치고 만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살펴본 가문들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토마스 만(1875~1955)의 소설 『부덴부르크 일가』등 기업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창업자의 비범함과 후손의 평범함종족 번식이 동물의 가장 큰 욕구이듯이 가업을 일으켜 가족에게 넘겨주려는 심리는 인간의 자유 영역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가족기업으로 출발해 거대 기업을 이룬 가문들에서 본 것처럼 세상에는 4~5대를 넘어 열정적인 기업가정신을 가진 후손들이 태어나 가업을 지속적으로 번영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하여 그 후 가문의 사업 경영권은 전문경영자의 손에 넘어가든지, 다른 회사에 합병당하든지 해체되든지 하고 만다. 그런 것을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사회가 가족기업의 영속을 위해 가족기업의 경영권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평등의 영역이 아니라 혁명의 영역이다. 혁명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원래 의도와는 달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수에게 혜택을 안겨주는 또 다른 문제를 산출하게 된다.

어찌 보면 자유 사회란 역동성 때문에, 다시 말해 창업자의 기업가정신과 후손의 평범함, 그리고 몰락과 혁신 과정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권력이든, 기업경영권이든 간에 한 가문이 수십 대를 이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할까?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hy,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미국 H마트 입점

2라이엇 게임즈, 7번째 국외소재 문화유산 ‘경복궁 선원전 편액’ 환수 성공

3로레알, 사노피 지분 4조5000억원 처분

4“중국산 AI 꼼짝 마”…챗GPT, 딥시크 3배 정확도 ‘딥 리서치’ 출시

5오름테라퓨틱, 공모가 2만원 확정...14일 코스닥 상장

6尹, 20일 첫 형사재판...‘출석 여부’는 미지수

7외국인 떠난 삼성전자, ‘5만 전자’ 위태…목표가 ‘줄하향’ 무슨 일

8"2심도 전부 무죄"... '사법 리스크' 벗은 이재용, 2심 쟁점 무엇이었나

9한국 매출 늘었는데...코스트코, 연회비 최대 15% 올린다

실시간 뉴스

1hy,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미국 H마트 입점

2라이엇 게임즈, 7번째 국외소재 문화유산 ‘경복궁 선원전 편액’ 환수 성공

3로레알, 사노피 지분 4조5000억원 처분

4“중국산 AI 꼼짝 마”…챗GPT, 딥시크 3배 정확도 ‘딥 리서치’ 출시

5오름테라퓨틱, 공모가 2만원 확정...14일 코스닥 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