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내 제안제도 잘 되십니까?

# “화장실 소변기 센서기에 비싼 3.9V 건전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9V 건전지는 개당 1만9000원으로 1.5V 3개를 사용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롯데마트 첨단점 직원이 사내제안 시스템에 올린 내용이다. 롯데마트 첨단점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중순부터 소변기 센서기에 소형 건전지를 사용한다. 회사는 연간 30만원의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안정성도 검증돼 4월부터 전점으로 확대 운영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 적은 액수지만 이런 제안이 계속 쌓인다면?
# 농심은 1981년 출시했다가 10년 만에 단종된 과자 ‘비29’를 지난해 재출시했다. 사연이 재미있다. 2007년 인터넷에는 카레 맛이 나는 비29 재생산을 바라는 카페가 개설됐다. 비29를 추억하는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를 본 농심 마케팅팀 직원은 사내제안 시스템인 ‘무병장수농원’에 “비29를 다시 출시하자”고 제안했다. 회사 측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요구와 직원 제안을 바탕으로 시장을 분석해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지난해 7월 이 제품을 재출시했다.
# 2008년 11월 LG생명과학 이지훈 대리는 사내제안 게시판인 ‘와우! 팩토리’에 제안을 올렸다. “LG의학상을 제정해 의학계와 관계를 강화하자.” 앞서 김지원 과장은 “청년의사 그룹과 함께할 수 있는 행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지난해 처음 수상자를 배출한 ‘제1회 LG 미래의학자상’이다.
이 행사는 의학 전문 매체인 ‘청년의사’가 주관하고 LG생명과학이 후원해 지난해 9월 박정열 서울아산병원 임상조교수, 이상원 중앙대병원 진료조교수 등 다섯 명이 수상했다.
# 요즘은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LED 전자현수막. LG CNS가 서초구에 처음 설치한 ‘U-플래카드’는 LED 영상 시스템을 통해 콘텐트를 실시간으로 바꾸고 동영상은 물론 다양한 광고물이 게시되도록 제작된 전자현수막이다. U-플래카드는 LG CNS 직원이 ‘신사업제안’ 게시판에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전자현수막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이후 전자종이와 LED를 놓고 게시판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 끝에 사내 전략마케팅팀의 검토를 거쳐 LED 전자현수막이 실제 사업으로 결정됐다.
# LG전자 창원공장의 세탁기 생산 라인에는 세탁기에서 물이 새는 현상을 찾아내는 공정이 있다. 그동안 창원공장은 이 작업을 위해 직원이 손전등을 이용해 살펴야 했다. 검사 자체도 어렵고 능률도 떨어졌다. 이를 유심히 지켜봤던 한 직원이 사내 게시판에 “내시경을 사용해 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비쌌다. 대당 700만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차량용 내시경을 사용하면 경비를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LG전자 관계자는 “이를 통해 기존 공정에 비해 비용을 절반 정도 줄였다”고 말했다.
# 지난해 LS전선의 한 직원은 사내 게시판인 ‘상상 아일랜드’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올렸다. “GH 바닥재를 개발하자.” 계열사인 LS네트웍스의 히트 상품인 ‘GH 운동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 운동화는 성장호른몬 분비를 촉진하는 기능이 있다.
회사 측은 제안을 받아들여 어린이집 또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생활하고 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는 컨셉트로 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회사 관계자는 “제안 게시판 오픈 1년 만에 2000건이 넘는 제안이 올라왔다”며 “이 중 40%가 채택돼 경영에 반영됐다”고 밝혔다.
# 올 3월 현대·기아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아산KD센터의 최재혁 대리는 자동차 부품을 포장할 때 기존 플라스틱 끈처럼 생긴 슬리브로 고정하던 방식을 래핑 형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간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효과는 만만치 않다.
회사 측은 이 제안을 검토한 결과 대당 1130원의 포장 자재비 절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올해 생산계획에 반영했다. 회사 관계자는 “연간 1억7000만원 정도 절감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사내제안제도에 눈을 뜨는 기업이 늘고 있다. 형식적으로 제안제도를 운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직원의 사소한 의견까지 경청하고 경영에 반영하는 문화가 확산 중이다.
회사의 핵심 홍보 포인트를 아예 제안제도로 설정한 곳도 있다. 사내제안제도는 근자에 유행하는 경영 트렌드의 집합체다. 지식경영, 창조경영, 감성경영, 소통경영, 서번트 경영…. 직원의 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소통경영이자 감성경영이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은 지식경영이자 창조경영이다.
이는 직원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서번트 경영이다. 사실 사내제안제도에 대해 국내 기업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1970년대 정부가 공무원 조직에 도입하면서 서서히 기업으로 흘러나온 제안제도는 ‘식스 시그마’의 큰형님뻘이다. 1980년대 초부터 기업의 제안과 개선활동을 연구해온 한국개선협회 원종진 원장은 “1983년 국내 최초로 기업 제안활동 전국대회를 개최했을 때 100명 정도를 예상한 행사장에 600여 명이 몰렸다”고 기억했다. 당시도 관심은 뜨거웠다는 얘기다. 원 원장은 “하지만 그 후 빼어난 사례로 추천할 만한 기업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CEO와 직원 ‘동상이몽’한창 붐이 일던 사내제안제도는 1980년대 후반 바람이 멈췄다.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제안은 노동자를 힘들게 하는 제도’라는 인식이 퍼졌다. 실제로 대기업 생산직 노조는 제안활동 거부운동을 벌였다. 할당제를 통해 강압적으로 제안하게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안의 긍정적 효과는 묻혀버렸다.
2000년대 들어 기업이 다시 사내제안제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생산현장에서 분임조 형태로 이뤄지던 제안제도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직원 누구나 쉽게 제안할 수 있는 환경, 거기에 지식과 창조 그리고 소통과 집단지성이 강조되면서 사내제안제도는 거의 모든 기업에 도입됐다.
이코노미스트가 취재한 결과 국내 주요 기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내제안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특히 CEO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 기업의 사내제안이 활발했다. 여전히 ‘개점 휴업’ 상태인 기업이 많았지만 사내제안제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식을 함께하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원 제안을 채택해 실행에 옮기는 기업도 늘고 있다. 분명한 변화다.
하지만 사내제안제도가 기업 전반에 정착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제도를 오해하고 있는 기업도 많다. 한 대기업이 그런 경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유독 잘 만들어진 ‘전산 시스템’을 강조했다. 사내제안제도의 핵심은 IT 시스템이 아니다. 인트라넷에 별도 제안 게시판을 구축하는 데 비싸서 못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사내제안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필요성에 대해서도 쉽게 공감한다. 운영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대로 운영되느냐고 자문할 때 자신 있게 나설 기업은 많지 않다. 사내제안제도의 사활은 ‘기업문화’에 달렸다. 여기에 CEO의 의지와 프로다운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 뒷받침돼야 한다.
직원은 이 제도가 조직과 개인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한 대기업 사내제안 전담부서 관계자는 “사내제안 실적은 전담부서의 실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기업의 관계자는 “제안 건수를 취합해 포상할 때 이 제안이 과연 회사에 어떤 이득을 줬는가를 보면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형식적으로 누적 건수에만 신경 쓰고 있다는 얘기다. 직장인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 제도와 관련된 솔직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상품을 개발하는 부서가 있는데 내가 왜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하지?” “부서장은 자꾸 제안 올리라고 독촉하는데 대체 뭘 제안해야 할지….” “제안 올리면 뭐합니까? 반응이 없는데.”
반면 CEO들은 “상금 주고 인사에도 반영한다는데 왜 제안을 하지 않느냐”고 의아해한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곳이 LG생명과학이다. 지난해 LG그룹 내에서 발표된 이 회사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면 사내제안제도가 정착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회사나 사내제안제도 하나쯤은 운영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제안제도 잘 됩니까? … 직원들은 답을 알고 있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리더를 만날 때까지, 내가 리더가 될 때까지, 내 사업을 할 때까지. 그래서 상처 치유가 관건이다. 처방은? 제안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문턱 낮추기 그리고 당신은 사랑 받고 있다는 경청과 격려다.’
핵심이 여기 있다. 문턱 낮추기, 그리고 경청과 격려. 허공에 치는 메아리라면 직원은 제 안방을 떠난다. 애써 생각해낸 제안이 번번이 무시당하면 의욕을 잃는다. 고심 끝에 돈이 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는데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직원은 그 아이템을 갖고 회사를 떠날지 모른다. 의욕적으로 제안했는데 ‘업무나 잘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빠진다.
부서장이 자신의 실적을 위해 원가 절감만을 목적으로 제안을 다그치면 역효과가 난다. 사내제안제도를 운용하는 기업 CEO라면 이 점부터 살펴야 한다.
문턱 낮추고 경청하라

▶시상하는 일을 널리 알려라. 제안상을 시상할 때는 큰 이벤트를 열고 효과를 발표하라 ▶제안 내용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겨라. 직원이 제안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만큼 경영진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다 아는 얘기라고? 원종진 원장은 “제안제도는 너무나 쉽고 누구나 알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제안왕’으로 유명한 윤생진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인재개발원장(현 창조경영연구소장)은 “사내제안제도는 CEO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진두지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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