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가 꿈틀거린다
벤처가 꿈틀거린다
# 장면1 1990년대 중순,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닷컴 열풍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의 사업 기반이었던 ‘인터넷’은 그간 통용되던 시장의 룰을 단번에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야후·이베이·아마존 등 닷컴 기업은 20세기 경제정글의 마지막 주역으로 등장했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8년 국내에 상륙한 벤처 열풍은 장밋빛 청사진을 그렸다. 창업 깃발만 꽂으면 누구나 성공할 것 같았고, 벤처 투자가 곧 ‘돈 버는 지름길’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열풍은 금세 막을 내렸다. 미국의 수많은 닷컴 기업은 ‘수입원 없는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면서 휘청댔다.
글로벌 IT경기는 싸늘하게 식었고, 닷컴 기업의 주가는 연일 곤두박질쳤다. 한국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벤처 투자는 한 방을 노린 ‘묻지마 투자’로 전락했다. 벤처 열풍에 명성을 얻은 적지 않은 CEO가 스캔들 또는 게이트에 얽히면서 고구마 줄기 엮이듯 줄줄이 쓰러졌다.
청사진은 신기루에 그쳤고, 벤처업계는 끝 모를 추락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벤처기업의 짧은 전성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때는 2001년이었다. # 장면2 칠흑 같은 침체 터널 속에서 와신상담하던 벤처기업이 10년 만에 다시 날개를 편다.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엔진을 돌린 몇몇 벤처기업은 한국 경제의 핵으로 떠올랐다.
NHN 등 매출 1000억원 이상 벤처기업은 200곳이 넘는다.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웹젠·그라비티)도 있다. 세계 일류 상품을 생산하는 벤처기업은 112곳에 달한다. 여기에 스마트폰·3D·에너지·의료·녹색바이오 등 첨단산업의 주가가 한껏 오르면서 벤처업계에 활력이 돈다. 벤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 ‘제2의’ 벤처 열풍이 분다. 1998~2000년 한국경제를 강타했던 벤처 열풍에 비할 만하다. 숫자가 잘 보여준다. 일단 벤처기업 수가 날로 증가한다. 2009년에만 3492곳(설립+재인증)이 늘었다. 전년보다 2.5배 많은 수다.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 한 해 벤처기업 증가 수(3864곳)에 육박한다.
증가 추세는 올해도 여전하다. 벤처기업협회 자료를 보면 올 3월 200곳이 늘어난 데 이어 4월엔 557곳, 5월엔 812곳이 증가했다. 5월 기록은 역대 월 최고다. 고공행진의 연속이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업계를 떠났다가 지난해 복귀한 한 ‘벤처 1세대’ CEO는 “벤처 열풍이 다시 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말을 이었다.
“정부가 벤처 관련 정책에 드라이브를 건 것도 이유지만 애플의 앱(애플리케이션) 비즈니스가 잠잠하던 벤처업계를 깨운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벤처 패자부활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신생 벤처기업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전직 CEO도 늘어나고 있죠.”
애플의 앱, 잠자는 벤처 깨워
올해엔 ‘1조원’ 벽을 무너뜨릴 기세다. 올 1분기 벤처 신규 투자는 1678억원. 단순 계산으론 올해 6712억원이 신규 투자된다. 연 1조원 신규 투자 목표가 무모해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전년 투자 현황을 결산하고 새 투자처를 찾는 1분기엔 통상 신규 투자가 많이 이뤄지지 않는다. 2분기 이후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올 1분기 신규 투자금액은 전년비 78%나 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엔 1조원 신규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는 게 중소기업청의 분석이다. 중소기업청 김영태 벤처투자과장은 “2008년엔 1조918억원, 2009년엔 1조4163억원에 해당하는 벤처투자조합이 결성됐다”며 “각 벤처캐피털이 투자할 수 있는 충분한 실탄(자금)이 확보된 만큼 올해 투자는 이전보다 더욱 확대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신규 투자 분위기는 또 있다.
창업기업, 녹색·부품·3D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벤처투자조합이 결성된다. 모태펀드(개별 기업에 투자하지 않고 벤처기업 투자를 목적으로 결성된 각종 벤처투자조합에 투자하는 것) 운용기관인 한국벤처투자는 올 상반기 2120억원 규모의 벤처 투자자금을 조성한다. 주요 출자 분야는 창업·M&A(인수합병)·3D산업 등이다.
한국벤처투자 김형기 대표는 “미래 먹을거리 분야의 출자 비중을 높여 벤처업계의 성장 촉진에 일조하겠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은 한국경제의 주춧돌이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이끄는 대표 기업군이기도 하다. GDP(국내총생산)의 8%, 수출 비중의 3%는 벤처기업의 몫이다. 고용 비중도 3.2%에 이른다.
더 두드러진 것은 분야별 증가율이다. 벤처기업의 1998~2009년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15%로 대기업(10%)의 1.5배다. 1998~2007년 고용증가율은 연평균 20%로 대기업(5%)의 4배에 이른다. 벤처기업협회 김영수 벤처정책본부장은 “1997년 시작된 외환위기 시절 벤처 붐은 한국경제의 빠른 회복에 큰 기여를 했다”며 “제2의 벤처 열풍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돌파하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업계가 다시 꿈틀대는 것은 한국경제에 큰 득(得)이다. 더구나 이번 열풍은 2000년 당시보다 탄탄한 기반 위에서 불고 있다. 벤처기업협회 이미순 책임연구원은 이를 ‘성숙한 열풍’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실무경험을 쌓은 창업자가 늘어났다.
단 한 번의 위기에 속절없이 무너지기 일쑤였던 벤처 1세대 CEO와 다른 점이다. 벤처기업협회의 ‘창업 전 CEO의 실무경험 현황’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2006년 9.7년에서 2009년 11.4년으로 늘어났다. 벤처 CEO의 ‘이전 근무지 현황’ 자료도 비슷하다. 학생 창업은 2003년 1.7%에서 2009년 0.6%로 줄어든 반면 일반 기업체 출신 CEO는 72%에서 80%로 8%포인트 늘었다.
필요한 조직을 두루 갖춘 신생 벤처기업도 많아졌다. 이미순 책임연구원은 “1998~2000년 벤처 열풍 땐 엔지니어 출신이 기술력만 믿고 무작정 창업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이런 이유로 당시 벤처기업은 영업·마케팅·판로개척 분야에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창업한 벤처기업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영업·마케팅·R&D(연구개발) 부서를 갖춘 곳이 많다는 게 이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전보다 ‘준비된’ 창업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벤처기업의 건전성도 부쩍 개선됐다. 기술보증기금 사고율이 2004년 9%에서 2009년 2%로 7%포인트 떨어진 것은 대표적 사례다. 같은 기간 일반 기업의 사고율은 3%포인트(10.7%→7.7%) 감소하는 데 그쳤다. 퇴출 대비 신규 상장 비율도 1998~2003년 평균 24%에서 2004~ 2009년 55%로 두 배 이상 올랐다.
퇴출은 감소하고 신규 상장은 늘었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청 김주식 사무관은 “2004년 벤처 평가기준이 강화된 후 벤처기업의 건전성이 개선됐다”며 “기존 벤처기업이 양적 성장만 꾀했다면 지금은 질적 성장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벤처기업의 업종이 다양화된 것도 이전과 다른 점이다. 옛 벤처 열풍은 인터넷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출혈경쟁이 판쳤고, 비리가 난무했다. 이번엔 다르다. 에너지·의료·바이오로 대표되는 녹색산업, 스마트폰·3D산업 등으로 다변화됐다. 중기청의 ‘벤처기업 4대 업종 분포 비중’ 자료를 보면 2000년엔 IT의 비중이 30%에 달했지만 2009년엔 14%로 크게 떨어졌다. 반대로 28%에 불과했던 첨단제조(에너지, 의료, 컴퓨터·반도체, 통신기기·방송기기)의 비중은 37%로 증가했다.
그만큼 벤처기업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스마트폰·3D 분야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된다. 이를 발판 삼아 ‘장고’처럼 복귀한 벤처 1세대 CEO도 많다. 노상범 홍익인터넷, 전제완 프리챌 창업자와 모션팝 김병준 대표가 대표적이다. 7년여 만에 벤처업계에 복귀한 노상범 홍익인터넷 창업자는 누구나 쉽게 앱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내놓을 예정이다.
국내 최초의 남북 합작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모션팝 김병준 대표는 기존 3D에 증강현실(增强現實) 솔루션을 신사업으로 추가했다. 증강현실은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녹색바이오 산업도 벤처기업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분야다. 바이오산업 대표 기업의 R&D 성과가 속속 가시화되면서 신규 투자가 확대되는 분위기다.
국내 최고의 바이오기업 셀트리온은 최근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으로부터 2000억원을 투자 받았다. 미국 GE(제너럴 일렉트릭)는 몇몇 국내 바이오 업체에 투자할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바이오 신약 개발 분야에 9년간 60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3개 이상의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고 세계 50위권 제약사를 육성할 방침이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공존하는 법이다. 제2의 벤처 열풍엔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도전정신이 약해진 것이 가장 큰 문제다. 20, 30대 벤처기업가의 비율은 1999년 58%에서 2009년 12%로 급감했다. 실무경험을 쌓은 창업자가 등장하는 반면 벤처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창업자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모험적 도전보단 안정적 직장을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 돌려 봐야김영수 벤처정책본부장은 “요즘 대학생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며 “옛 벤처 CEO들이 실패한 것을 눈으로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아쉬워했다. “실패했을 때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청년 창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나친 금융규제도 풀어야 할 과제라는 지적이다. 벤처업계에 돈이 돈다지만 작은 기업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신생 벤처기업이 정부 자금을 지원 받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벤처캐피털의 신규 투자금액은 2008~2009년 20%(7247억원→8671억원) 늘었지만 수혜 기업은 5%(496곳→524곳) 증가하는 데 그쳤다.
투자금이 일부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협회 박양규(정책연구팀) 과장은 “해당 기업의 기술력 및 사업화 능력을 토대로 자금 지원이 이뤄지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며 “특히 담보 및 연대보증 관행 등 각종 규제완화는 절실하다”고 말했다. 21세기 경제정글을 쥐락펴락하는 기술은 모두 청년의 머리와 도전정신에서 만들어졌다.
애플의 스티븐 잡스가 그랬고, MS의 빌 게이츠도 그랬다.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행히 벤처 바람이 다시 분다. ‘Again 2000’이라 할 만큼 제법 강력하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점이 공존한다. 준비된 창업이 많아졌지만 패기 있는 청년 창업은 도리어 줄었다.
벤처업계에 돈이 돌지만 작은 기업은 여전히 ‘투자 담장’ 밖에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기업 라떼스토리의 윤석민 대표는 “10년 전 벤처 열풍 때도 창업 환경과 인프라가 미흡했다”며 “새내기 벤처 CEO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제2의 벤처 열풍을 계속 이어가려면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해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장단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꿰뚫어봐야 한다. 동전의 양면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 것도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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