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 윤송이의 반란
엔씨소프트 윤송이의 반란
그는 천재소녀로 불렸다.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했고, KAIST를 수석으로 나왔다. 미디어랩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3년6개월만에 MIT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나이 24세, 최연소 여성 박사였다. 28세가 되던 2004년 3월엔 SK텔레콤 임원에 올랐다. 이 역시 최연소 기록. 단기속성의 달인 같다. 국내에서만 각광 받았던 건 아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를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2004)’으로 꼽았다. 2006년엔 WEF(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됐다. 이 대단한 이력의 주인공은? 윤송이(35) 엔씨소프트 부사장이다.
그는 화양연화(花樣年華·꽃처럼 아름다운 때)를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보냈다. 스스로 원했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그를 양지로 끌어냈다. 정치권도 ‘금배지’를 달아주겠다며 연일 손짓했다. 그의 앞길엔 장애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냉정한 법. 한번 띄웠다 싶으면 보란 듯이 내친다. 윤 부사장도 그걸 피하지 못했던 것 같다. SK텔레콤 시절 그가 추진한 프로젝트(1㎜)가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세상은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천재소녀의 명성에 흠집만 낸 프로젝트’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리 원하지도 않았는데 붙여진 별명이 되레 부메랑처럼 그의 가슴을 쳤을지 모른다.
2007년 말, 그는 SK텔레콤에 사표를 던졌다. 32번째 생일을 꼭 일주일 앞둔 때였다. 스포트라이트는 꺼졌고, ‘왜 떠날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납득하기 힘든 소문도 돌았다. 그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언론과의 접촉도 끊겼다. 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건 사표를 낸 지 1년 여가 흐른 2008년 11월. 남편(김택진)이 이끄는 엔씨소프트 부사장에 취임한 직후였다. 물론 취임 소식이 전부였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엔씨소프트도 ‘윤 부사장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방침이 그렇다고 했다.
올 7월 둘째 아들 출산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2년여. 천재소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윤 부사장을 8월 9일 롯데호텔월드강남에서 만났다. 갈색 원피스에 굽이 높지 않은 구두. 생머리에 웃는 인상. 머리를 조금 길렀을 뿐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겉보기에 달라진 점은 딱 하나. 치아 교정기를 낀 것뿐이다. “교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라고 묻자 “필요했어요”라며 살포시 웃는다.
윤 부사장을 이제 천재소녀라고 부르기엔 어색하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 두 아들의 엄마다. 첫째는 언론에 알려졌듯 2008년생이다. 둘째는 올 7월 태어났다. 윤 부사장을 만난 건 그의 출산휴가 때였다. 첫째는 자연분만했는데 둘째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유독 심한 산고 끝에 둘째를 봐서일까. 그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렵게 세상에 나오고 길러졌는지 새삼 절감해요. 사람이 소중하다는 걸 더 느끼게 됐어요.” 두 아이 중 누가 예쁘냐고 물었다. “두 아이 모두 똑같이 예뻐요.” 한때 천재소녀로 불렸던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궁금했는데, 대한민국 엄마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윤 부사장의 이미지는 별명을 분리하면 금세 나온다. 천재 그리고 소녀다. 그를 소개한 글을 읽어보면 늘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천재지만 ‘하하 호호’하면서 웃는 영락없는 소녀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인 것 같다. 별명과 그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윤 부사장은 단 한 번도 소녀 같은 웃음을 짓지 않았다. 질문이 이해되지 않으면 입을 쉬이 열지 않았다. 인터뷰 후 주고받은 e-메일에서도 그랬다.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엔 답을 하지 않거나 주석을 달았다. 이런 식으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답을 하기 어렵고 모호하지만…” “지향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아서 모호한 듯합니다만…” 치밀한 그의 성격이 읽히는 대목이다.
“현장에서 발로 뛰고 싶었다”다음은 천재 이미지. KAIST를 다니면서도 동아리 4곳에서 활동하고, 그림·운동(테니스)·음악에 능숙. 이게 윤 부사장의 이미지다. 그야말로 천재적이다. 정작 윤 부사장은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재소녀란 별명에 대해서도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공부든 운동이든 즐기면서 했다고 말했다. 특별한 걸 배우고 싶어서 KAIST 1학년 때 2학년 전공과목을 들었고, 예술활동을 열심히 할 요량으로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이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고등학생, 대학생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론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변함없는 듯하다. 윤 부사장이 출산한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엔씨소프트 내부 관계자도 “임신 중인 줄 알았는데”라고 했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출산하기 바로 전날에도 그는 회사 자료를 훑어보고 e-메일로 회신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 출산 사실을 모를 수밖에….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윤 부사장은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한다. 천재형이라기보단 노력파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MIT 미디어랩의 박사학위를 땄을 무렵,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특히 연구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대학교수도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새 길을 가고 싶었다. “학교에 있다 보니까 시야가 한군데로 고정되는 것 같았어요. 많은 가설을 현장에서 풀어보고 싶었죠. MIT에서 배운 걸 기업에서 적용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어요.”
그는 2002년 글로벌 컨설팅기관 맥킨지에 들어갔다. 조직생활의 원리와 1차 산업을 배웠다. 2002년 10월 최태원 회장이 출자한 SK그룹의 자회사 와이더댄닷컴 이사에 발탁됐고, 2년 후 SK텔레콤 상무에 올랐다. CI(Communication Intelligence)-TF를 총괄하면서 50여 명을 이끌었다. 그의 야심작 1㎜도 2005년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1㎜는 휴대전화를 음성통화·데이터통신의 도구에서 벗어나 ‘손안의 친구’ ‘손안의 비서’로 발전시키겠다며 선보인 신개념 서비스. 가령 사용자가 휴대전화에 날씨라고 입력하면 가상 캐릭터가 스스로 무선 인터넷에 접속해 날씨를 알려준다. 사용자가 일일이 접속할 필요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같다. 윤 부사장도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앞선 기술이었던 걸까. 성적이 기대치를 밑돌았다. 2년 동안 가입자를 22만 명 모으는 데 그쳤다. 한 달에 1만 명도 가입하지 않은 셈. 1㎜에 대해 윤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건 인정해요. 그렇다고 실패로 보진 않아요. 의미 있게 도전했는데 넘어야 할 허들이 많았어요.”
그가 말하는 허들은 이것이다. 1㎜를 서비스하려면 이 프로그램이 깔린 하드웨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SK텔레콤은 망(網)사업자. 하드웨어를 만들지 못했다. 1㎜의 실패 요인으로 단말기 부족이 꼽힌 이유다. 윤 부사장이 1㎜의 실패를 만회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자 일부 여성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윤송이는 연구소에 있었어야 했다.” 새 길을 찾아 나선 그의 자존심을 짓밟는 이야기. 그도 “신문을 통해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SK텔레콤이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SK텔레콤도 윤 부사장을 영입한 후 많이 변했다. 한 관계자는 “SK텔레콤의 전략을 음성통신에서 무선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윤 부사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엔씨소프트에서 계속된다. 김택진 대표와 결혼한 후 부사장에 취임했지만 그가 엔씨소프트와 인연을 맺은 건 2004년이다. 김 대표가 먼저 ‘사외이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윤 부사장은 왜 이 제안을 선뜻 수용했을까. “엔씨소프트의 해외 지사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창구가 아니었어요. 현지인을 채용하고, 각 나라의 문화에 맞는 제품을 공급했죠. 국내 기업 중 (규모를 막론하고) 가장 글로벌화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다. 엔씨소프트의 글로벌 비즈니스는 유명하다. 2000년 해외 진출에 뛰어든 후 미국과 유럽에 지사를, 일본·중국·대만·태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제품 판매 창구가 아닌 현지화가 이들의 목적이다. 그 결과 엔씨소프트의 국내외 매출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은 36%에 달한다.
윤 부사장의 공식직책은 CSO(최고전략책임자). 회사의 미래 밑그림을 그린다. 김 대표는 윤 부사장이 취임한 후 R&D(연구개발)에 집중한다. 부부 공동경영이 아니라 분리경영에 가깝다. 김 대표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을 것 같다. 그는 전형적인 엔지니어 출신 CEO. 서울대 전자공학과 재학 중 동아리 ‘컴퓨터 연구회’에서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등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공동 개발했다. 한글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메타자’와 ‘베네치아’ 게임도 그의 작품.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김 대표가 그간 고군분투했는데 윤 부사장이 전략을 맡으면서 한결 편해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윤 부사장이 출산 전 역점을 두고 진행한 것은 게임 포털 ‘플레이엔씨’의 정착이었다. 플레이엔씨는 게임 유저가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내에 이런 유형의 게임포털은 없다. 윤 부사장이 신경을 바짝 쓴 것으로 알려진 게임지식백과사전 ‘파워북’도 유저의 호평을 받는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플레이엔씨, 파워북 모두 김 대표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라면서도 “하지만 윤 부사장의 아이디어와 경험 그리고 추진력이 녹아들면서 정착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윤 부사장 취임 후 달라진 건 또 있다. 엔씨소프트의 매출 감소세가 보란 듯이 멎었다. 엔씨소프트는 2006~2007년 간판 게임 브랜드 리니지가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신규사업도 부진했다. 6년간 800억원을 들여 제작한 ‘리처드 게리엇의 타뷸라라사’ 게임도 흥행에 참패했다. 2005년 3388억원이었던 매출은 2007년 3297억원으로 줄었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766억원에서 495억원으로 감소했다. 회사 안팎에선 ‘게임업계 1위 자리를 뺏길 것’ ‘리처드 게리엇 형제가 먹튀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윤 부사장이 전략을 짜기 시작한 2008년 11월 이후 엔씨소프트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가 취임했을 때 선보인 롤 플레잉 게임 ‘아이온’은 그야말로 대박을 냈다. 2009년 12월 110만 장을 돌파했고, 북미 최대 게임축제(PAX)에서 최고 MMO게임상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매출은 2008년 3468억원에서 2009년 6347억원으로 83% 늘었고, 영업이익·당기순이익은 각각 4.8배(2008년 501억원→2009년 2340억원)와 7.4배(2008년 256억→2009년 1883억)가 됐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윤 부사장이 내실을 탄탄하게 만든 게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며 “김 대표도 ‘복덩어리가 들어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출산휴가 중인 윤 부사장은 지금 엔씨소프트의 새 청사진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 재미있다. 이른바 ‘엄마노믹스’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윤 부사장은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이 행복하고 가정이 안정돼야 회사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겠다는 다짐도 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윤송이의 ‘엄마노믹스’. 엔씨소프트의 성장 젖줄이 될지 모른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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