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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시장 위협하는 ‘비뚤어진 자본주의’

신흥시장 위협하는 ‘비뚤어진 자본주의’



멕시코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 헬루는 현재 세계 최고의 갑부다. 재산이 600억 달러가 넘고 멕시코 벤치마크 지수 산정의 기준이 되는 회사 중 42%가 그의 소유다. 그가 운영하는 휴대전화 회사 아메리카 모빌은 내수 시장의 70% 이상을 지배한다. 멕시코는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복 속도가 매우 빠른 나라 중 하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2010년 멕시코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4.5%(미국보다 1.5% 포인트 높은 수준이다)로 상향조정 했다. 수출도 꾸준히 늘어 지난 5월에는 44%나 증가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슬림의 성공이 멕시코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사업에 불법적인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기업계의 부와 권력이 극소수에게 편중되는 현상 자체가 우려를 자아낸다. IMF 수석 경제학자를 지낸 라구람 라잔은 “그런 편중 현상은 경제학자들의 멕시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몇 % 포인트 깎아내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은 업계의 독점 탓에 멕시코인들이 일상용품과 서비스를 40%나 더 비싼 값에 구입한다고 말했다. 또 소비자들과 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출은 매우 빈약해 성장을 가로막는다. 반면 슬림의 회사들과 소수의 다른 거물급 기업인이 운영하는 회사들(예를 들면 라카르도 살리나스의 그루포 살리나스나 아즈카라가 가문의 미디어 제국 등)은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다시 말해 슬림은 대단한 기업인이지만 멕시코에 그렇게 거물급 기업인밖에 없다면 좋지 않다는 의미다.

요즘 신흥시장에서는 이런 ‘슬림 증후군’(Slim syndrome: 부의 편중 현상을 일컫는다)이 개발도상국의 경제에 가장 위협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1990년대에 테크놀로지 붐이 경제성장에 불을 지폈듯 지난 10년 동안은 신흥시장이 세계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평균 성장률 6%). 하지만 이들 국가의 사업관행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속성장이 조만간 멈출지도 모른다. 15년 전 거물급 기업인들에게 비밀리에 특혜를 주는 사업관행은 ‘정실(情實)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불렸다. 이는 일부 아시아 호랑이 국가의 몰락을 가져왔다. 오늘날은 상황이 좀 다르다. 신흥시장에 관여하는 경제학자와 금융업계 간부, 컨설턴트 20여 명을 인터뷰한 결과 요즘은 ‘비뚤어진 자본주의(crooked capitalism)’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흥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투자처지만 대다수 국가의 경제가 매우 불균형하며 일부는 부패했다.

독점과 수뢰, 막대한 정부지출 유입은 기업 간 경쟁을 위축시키고 지속 불가능한 수익을 낳았다. 게다가 강압적인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장기화시킨다. 모건 스탠리의 신흥시장 책임자 루치르 샤르마는 “멕시코와 인도, 중국,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 개도국들은 지금 갈림길에 섰다”고 말했다. “과거 호황의 원동력이 됐던 수출 중심의 성장전략은 저렴한 자본비용(기업이 조달·운용하는 자본과 관련해 부담하는 비용)의 덕을 톡톡히 봤다.” 투자자들의 집중적인 투자와 값싼 노동력 덕분에 제조업이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슬림 같은 새로운 계층의 과두재벌은 정부 자산을 헐값에 사들여 부를 쌓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비용과 임금이 상승하고, 미국과 유럽 등 소비 대국들이 저조한 성장으로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수년간 지속될 듯하다. 신흥시장의 주역들이 이런 장기적인 어려움을 견뎌내려면 내수시장의 경쟁력을 키우고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하지만 “성공은 개혁의지보다 자기만족을 부른다는 점이 문제”라고 샤르마는 말했다.

정실 자본주의는 기업인과 정치인, 은행 간의 배타적 관계를 기본으로 했다. 1990년대 말 한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의 족벌경영 기업 대다수가 정부와 은행의 측근에게 두둑한 보상을 제공하고 특혜성 대출을 받아 성장했다. 이렇게 축적된 부채의 규모는 엄청났다. 계산과 추적이 불가능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체제는 1997~98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닥치자 통째로 무너졌다. 경제와 통화가 함께 붕괴했다. 당시 IMF는 1000억 달러 이상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다수의 부패 은행을 해체하고, 재벌기업들에 개혁을 요구했다. 실제로 많은 재벌기업이 개혁을 단행했다. IMF의 수석 경제학자를 지낸 사이먼 존슨은 “최근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신흥시장의 주역들은 정실주의에 물든 사업관행을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대다수가 거시경제적 정책을 향상시켜 신속한 경제 회복을 이뤘다. 존슨은 “관리 구조가 이전보다 개선되긴 했지만 정실주의적 사업관행은 여전히 심각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대형 족벌기업 중 대다수는 부채가 없으며 바람둥이 삼촌이나 망나니 아들을 고위 관리직에 앉혀놓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 덕분이다. 비뚤어진 자본주의는 금융 전문가들이 움직이는 정실 자본주의다. 따라서 정실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체제는 기업합병을 부추기고 부와 권력이 상부에 편중된 경제를 낳는다. 인도의 경우 10대 갑부의 개인 재산이 인도 전체 경제(1조2000억 달러 규모)의 10분의1을 차지한다. 앨버타대의 랜덜 모크 교수는 타타 가문과 벌라 가문이 소유한 기업의 자산이 인도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많은 신흥시장 국가의 수출 중심 성장전략은 기업합병의 증가를 초래했다. 그 결과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영향력이 더 막강해지고 국내의 경쟁업체들을 물리쳤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이자 IMF의 수석 경제학자인 케네스 로고프는 요즘 독점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번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수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기업혁신과 다른 기업의 시장 진입, 기업 간의 경쟁이 제한됐다. 이들 기업이 매우 부유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하기 때문에 막기가 쉽지 않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최근 발표한 세계 부패 보고서(민간 부문의 부패에 초점을 맞췄다)에서는 이렇게 경고했다. “개발도상국의 부패 문제는 갈수록 심각하고 복잡해진다.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이 받는 뇌물의 규모가 연간 200억~4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러시아에서는 상장기업의 약 80%가 정계와 밀착돼 있다.

중국도 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중국은 800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시행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이 경기부양자금 중 약 60%가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자금을 나눠주는 정부 관리들과 그것을 받는 업계 간부들의 결탁이 주된 요인이다[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1억 위안(약 1460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중국인 3220명 가운데 90% 이상이 공산당 고위 간부의 자제다]. 이 부동산과 주식 거품이 현재 중국의 경제 안정을 위협한다.

샤르마에 따르면 족벌기업들은 주로 정부 계약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동산과 건설, 에너지 등의 부문에 주력한다. 이는 새로운 ‘비뚤어진 거래’의 기회를 제공한다. 신흥시장 국가들은 사회기간산업에 수조 달러를 쏟아붓는다(메릴 린치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약 6조6000억 달러가 투자됐다). 그 중 많은 액수가 대규모 족벌기업들이 장악하는 산업으로 흘러 들어간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세계화된 기업연합 활동의 물결이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기간산업 프로젝트를 부패시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했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인도가 향후 5년 동안 사회기간산업에 약 1조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지출이 이 불평등한 구조를 키우는 역할을 한다. 이런 구조는 일시적으로는 성장을 부추기는 듯하지만 결국 파멸을 초래한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관행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이 거세지 않다. 신흥시장의 높은 성장률 덕분에 대규모 국제 투자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가들은 기업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행동주의 투자자(activist investor)들이 이 체제를 정화시켜주리라 기대해 왔다. 하지만 그러기엔 행동주의 투자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신흥시장의 새로운 중산층은 구미 중산층에 비해 민족주의적 성향이 더 짙으며,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국가가 국민 경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본주의)와 대형 족벌기업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자신의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불평할 이유가 없다.

독점기업을 관리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들을 해체하거나 규제로 다스리는 것이다. 분석가들은 20세기 초 미국 정부가 남북전쟁 후 대호황 시대에 성장한 대기업들을 해체할 때만 해도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독점기업 개혁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컨설팅업체 베인 앤 컴퍼니의 아시아 전략 책임자인 찰스 오미스턴은 “외국 기업의 경쟁을 허용하는 것”이 더 간단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특히 대형 수출업체가 지배하는 부문에서 외국 기업의 경쟁을 허용하면 혁신과 성장에 박차를 가할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시장의 형성이 가능하다.

몇 가지 긍정적인 조짐이 눈에 띈다. 컨설팅업체 부즈 앤 컴퍼니의 수브조이 센굽타는 인도 기업계에서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동차와 보험 부문 등의 개혁으로 기업 간 경쟁이 강화됐다. “경쟁은 정실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개선시켰다”고 센굽타는 말했다. 경쟁은 또 제품의 가격을 낮춤으로써 소비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브라질의 독점 규제 기관은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이 기관의 장을 맡은 아르투르 바딩은 기관의 영향력을 강화할 법안을 입법추진 중이다. 그는 특히 사회기간산업 부문의 예산이 집중 투자되며 대기업들이 장악하는 건설 산업의 규제를 강화할 계획이다.

진짜 문제는 신흥시장 국가들이 독점기업의 폐해로 성장의 둔화가 시작되기 전에 개혁을 감행할까 하는 점이다. 현재 이들 국가의 대규모 사회기간산업 투자는 이론상으론 수십 년 동안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경제의 발판이 되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이런 투자가 독점기업의 권력만 키우게 된다면 기업계의 부와 권력이 상부에 편중되는 ‘슬림 증후군’은 더 심각해질 듯하다.

번역·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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