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넌의 또 다른 유산
존 레넌의 또 다른 유산
요즘 존 레넌 추모 열기가 뜨겁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레넌은 1980년 12월 8일 암살당했다. 40회 생일이 지난 지 불과 몇 주 만이었다. 올해는 레넌의 탄생 70주년과 사망 30주기가 되는 특별한 해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이 전설적인 팝스타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와 음반, 전기영화, 전시회 등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이런 추모 작품들이 레넌의 음악과 관련해 새로운 뭔가를 밝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이 추모 열기의 핵심 요소는 ‘Imagine’ 등 대표곡의 리마스터링(remastering) 음반이 아닌 레넌의 명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 명성은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지금도 이렇게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이끌어낼 만큼 여전히 대단하며 돈벌이가 된다.
이 추모 열기는 지난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뮤지션 중 한 명인 레넌이 명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준다. 그는 명성을 얻으려 애썼고 그에 관해 논평했다. 또 그것을 이용했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으며 결국 자신이 쌓은 엄청난 명성에 희생됐다. 그러면서 그는 스타라는 자리가 의미하는 바와 그 영향력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레넌과 그의 부인 오노 요코는 레넌이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대중음악 전문잡지 롤링스톤지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예술이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 생겨나기 전이었던 그 시기엔 참신한 생각이었다.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판치는 요즘 레넌의 명성이 주는 교훈을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비틀스 초창기에 레넌은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구중중한 지하 분장실에서 동료들과 미래의 희망을 주고받으며 기분을 북돋우곤 했다. 그가 “우린 어디로 가지, 친구들?”이라고 물으면 폴(매카트니)과 조지(해리슨), 링고(스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팝 음악계의 최정상이지, 조니!” 그들은 2년도 안 돼 그 자리에 올랐다. 문제는 그 ‘최정상(toppermost: 엘비스 프레슬리가 올랐던 자리보다 더 높은 곳으로 정의된다)’이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고 쾌적한 자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레넌은 미국 시카고에서 공연하던 도중 객석에서 날아온 신발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선 비틀스 공연을 보려고 몰려든 팬들 사이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경찰이 곤봉을 들고 진압했다. 링고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반(反)유대 세력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비틀스가 워싱턴의 주미 영국대사관을 방문했을 땐 한 외교관이 기념으로 가지겠다면서 링고의 머리카락 일부를 잘랐다. 이들의 공연이 열릴 때마다 기적의 치유를 바라는 신체장애자들이 휠체어에 타거나 산소 텐트를 쓴 채 무대 뒤로 몰려왔다. 호주 멜버른에선 리버풀에서 온 한 남자가 비틀스가 체류하던 호텔의 배수관을 타고 8층까지 기어올라 레넌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레넌은 그 남자를 방안으로 들어오도록 해 술 한잔을 대접했지만 그의 지나친 행동을 섬뜩하게 생각했다. 레넌은 1965년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거나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의 총에 맞아 죽을 것 같다.” 이들이 느끼는 신변의 위협은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캐나다 출신의 팝 가수 저스틴 비버(16)의 경우보다 훨씬 더 근거가 있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레넌은 빈정대는 듯한 말투와 태도를 자신의 방어수단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레넌은 처음부터 자신의 명성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을 재미있는 듯 지켜봤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형태의 광적인 명성을 분석하고 조롱했다. 비틀스는 1963년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영국 왕실의 연례 문화행사)에서 여왕 모후(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를 위해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레넌은 그 요청에 응했지만 왕실 일가를 향해 과장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으며 관객에게 박수 대신 “몸에 치장한 보석을 흔들어 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했다. 1964년 뉴욕을 방문한 비틀스는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레넌이 이끄는 자기홍보 풍자극이었다고 할까?
기자: 노래 한 곡 불러주시겠습니까?레넌: 돈부터 내면 부르죠.
기자: 비틀스의 음악은 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레넌: 우리가 그걸 알면 또 다른 그룹을 결성해 매니저 노릇을 하겠죠.
다른 멤버들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말 한두 마디 던지는 데서 그쳤지만 레넌의 경우는 좀 더 심각했다. 그는 비틀스를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비판 세력과 그들의 모습만 봐도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팬들을 동시에 조롱했다. 레넌은 호텔 발코니에서 히틀러를 흉내내기도 하고(콧수염을 쓰다듬고 오른손을 위로 쭉 뻗으며 인사했다), 비틀스가 “예수보다 더 인기가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동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명성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난 그것이 왜 우스운지 잘 안다”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레넌 이전의 대스타들은 대중문화가 그들에게 맡긴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레넌은 그 역할에서 자주 벗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타로서의 레넌과 개인으로서의 레넌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레넌은 유명하다는 사실 자체로 유명한 최초의 스타였다.
스타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레넌의 태도는 1967년 자기지시적인(self-referential) 경향이 두드러지는 노래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I Am the Walrus’의 가사에선 그보다 불과 3개월 앞서 발표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언급된다. 또 ‘Glass Onion’은 곡 전체가 거의 비틀스의 다른 노래들에 대한 암시로 이뤄졌다.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선 자신과 오노의 신혼여행을 예수의 시련과 환난에 비유했다. 또 비틀스 해체 직후 발표된 ‘God’(팝송 사상 뮤지션의 자만심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곡인 듯하다)에서 레넌은 비틀스의 “꿈 제조기”였던 자신이 “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비틀스의 해체를 슬퍼하는 팬들에게 “꿈은 끝났다”, “그냥 그런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사에서 뮤지션의 자만심이 자주 드러나는 팝송에서도 이렇게 이기적인 경우는 보기 드물다. 만약 레넌이 아닌 다른 가수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다면 참아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넌의 명성은 그 규모와 범위가 남달랐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이다. 명성이 레넌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의 예술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삶을 예술에, 또 예술을 삶에 녹아들게 했던 레넌은 선견지명이 뛰어났던 듯하다. 요즘은 그런 방식이 스타의 필수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린지 로한은 한때 훌륭한 배우를 꿈꿨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스크린 밖의 현실 속에 있었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끊임없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소재를 제공하는 스캔들 메이커가 그 역할이다. 요즘 대중을 사로잡는 스타 중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알려졌거나,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해 더 유명해진 경우가 많다. 제시카 심슨과 ‘아메리칸 아이돌’이 배출해낸 스타들, 수전 보일 등이 그 예다. 최근 MTV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 ‘더 힐스(The Hills)’는 이 프로에 출연해 유명해진 로스앤젤레스 젊은이들의 시끌벅적한 일상을 보여주는 리얼리티쇼다.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칸예 웨스트도 트위터에 자신의 명성에 대한 논평을 끊임없이 올린다.
레넌을 당대의 패리스 힐튼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명성을 작품 소재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패리스 힐튼 같은 인물이 탄생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듯하다. 레넌은 솔로 앨범 ‘Two Virgins’의 커버에 자신과 오노의 누드 사진을 실었고, 자신의 얼굴을 슬로 모션으로 찍은 52분짜리 영화 ‘Film No. 5’를 발표했다. 또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선 부부가 함께 커다란 가방 안에 몸을 숨긴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패리스 힐튼이 리얼리티쇼 ‘심플 라이프(The Simple Life)’에서 보여준 행동과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자신의 명성을 홍보 수단 겸 작품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레넌과 오노의 기이한 행동 중 단연 기지가 돋보이는 사례가 하나 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올에서 자신들의 신혼여행 호텔 방에 기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2주일 동안 평화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들의 행동은 곧 매스 미디어 시대에 유명인사가 주도하는 행동주의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어차피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해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앤절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딸 샤일로를 낳았다. 당연히 파파라치가 모여들었고 졸리 부부는 갓 태어난 딸의 사진을 판매한 수익금을 그 지역의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레넌과 오노 부부를 연상케 하는 행동이었다.
레넌은 1975년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만든 노래 ‘Fame’에서 명성의 부작용을 경고한 직후 유명인사가 아닌 보통사람처럼(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살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레넌이 명성과 함께 해온 긴 세월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뉴욕 맨해튼의 다코타 아파트에서 오노와 갓 태어난 아들 션과 함께 조용히 살았다. 평론가 데이비드 헤이두는 그 시절 레넌의 생활을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성인의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레넌은 바깥일을 오노에게 맡긴 채 집에서 빵을 굽고 아들을 데리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다. 심지어 빙 크로스비의 음반을 듣기도 했다.
당시 레넌은 자신이 ‘하워드 가르보와 그레타 휴스’(하워드 휴스와 그레타 가르보를 익살 맞게 표현한 말)의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농담했다. 가르보와 휴스는 노이로제 때문에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레넌은 스스로 그런 생활을 택했다. 그것은 가정생활에 전념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남성 록스타의 전형으로 간주되던 그의 이미지와 너무도 동떨어졌기 때문에 놀라웠다. 1980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다운 로큰롤 가수로서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난 최근 전업주부 남편으로 살았고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레넌은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진 않았다. 회전목마처럼 돌고 도는 명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노래(‘Watching the Wheels’)를 작곡했고, 그 곡이 담긴 컴백 앨범(‘Double Fantasy’)을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발표했다. 존 레넌에게 은퇴란 자신과 명성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또 다른 시도였을 뿐이다.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 컴백 앨범은 그의 유작이 됐다. 레넌은 명성 추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결국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매스 미디어가 사람을 얼마나 유명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 채프먼은 지난 9월 가석방 청문회에서 “존 레넌을 죽이면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간의 주목을 끌어 한순간에 명성(또는 악명)을 얻고자 했다. 이런 종류의 명성은 바로 레넌에게서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볼 때 수많은 기념비적 노래 이외에 레넌이 남긴 가장 두드러진 유산은 그가 쌓은 엄청난 명성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새로운 형태의 엄청난 명성을 분석하고 지배했으며 그것을 기능화했다. 레넌 이전에 명성은 음반 판매나 영화 흥행에 성공한 스타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하지만 레넌 이후에 명성은 하나의 도구가 됐다. 마치 연주자가 재량대로 연주하는 악기 같은 존재가 됐다. 1968년 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명성이라는 훌륭한 도구를 얻었다. 앞으로 그 도구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요즘은 생활과 예술의 경계선이 매우 모호하고, 대중의 눈과 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열려 있다. 그래서 너도나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레넌의 삶과 죽음은 그가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까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던 한 가지 질문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명성의 의미와 목적은 과연 뭘까?”
번역·정경희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자본시장연구원 신임 원장에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 내정
2“‘元’ 하나 잘못 보고”…中 여성, ‘1박 5만원’ 제주도 숙소에 1100만원 냈다
3'40세' 솔비, 결정사서 들은 말 충격 "2세 생각은…"
4"나 말고 딴 남자를"…前 여친 갈비뼈 부러뜨려
5다채로운 신작 출시로 반등 노리는 카카오게임즈
6"강제로 입맞춤" 신인 걸그룹 멤버에 대표가 성추행
7‘찬 바람 불면 배당주’라던데…배당수익률 가장 높을 기업은
8수험생도 학부모도 고생한 수능…마음 트고 다독이길
9‘동양의 하와이’中 하이난 싼야…휴양·레저 도시서 ‘완전체’ 마이스 도시로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