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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길에서 벤틀리의 진면목을 보다

빙판 길에서 벤틀리의 진면목을 보다

벤틀리를 몰다 처박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럴 뻔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질퍽한 눈길 위를 달리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 차가 눈더미를 향해 돌진했다. 차는 큰 충격 없이 멈췄다. 동승자(동료 기자와 벤틀리 직원)는 다행히도 멀쩡했다. 옅은 하늘색의 벤틀리 뮬산도 이상이 없었다. 눈더미 위에 차가 얹혀 있을 동안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첫째, 진짜 사나이들이나 할 일에 문학 편집자를 보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지(집에서 교정쇄나 훑어볼걸 괜히 자동차를 몰고 시골의 빙판길로 나왔다!). 둘째, 감탄사가 절로 우러날 만큼 시트가 편안하다, 오후 내내 이렇게 편히 앉아서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그리고 이 때는 시트 마사지 기능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차가 우리를 기다렸고 시승할 자동차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의 공상은 거기서 끝났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우리 앞길에 또 다른 눈더미가 기다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차를 마시며 조금 전의 위험했던 순간을 한바탕 웃음으로 털어낸 뒤 자동차를 갈아타고 또다시 장도에 올라 악천후와의 싸움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다른 기자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동승자였다. 바꿔 탄 차는 황홀한 빨간색 바늘땀으로 내부가 장식된 매혹적인 검정색 2도어 컨티넨탈 컨버터블이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헤지펀드 매니저가 정부에게(그리고 어쩌면 아내에게도) 사줄 만한(사줘야 할) 바로 그런 자동차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안타깝게도 이 차는 운이 좋지 못했다. 코네티컷주의 그림 같은 마을 리지필드의 빙판을 만날 때까지는 차가 순조롭게 달렸다. 이 마을의 이름을 밝히는 이유는 비난할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따뜻한 날에 가는 편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어쨌든 차 뒷부분이 좌우로 미끄러지면서 주차된 배달 트럭의 옆구리를 스치고 또다시 눈더미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그렇게 가볍지 않은 사고였지만 우리는 거의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범퍼가 떨어져 너덜거리고 차 옆면이 백과사전 크기만큼 움푹 들어갔음을 볼 때 차가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말해준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우리는 겨울 중 아마도 가장 황량하고 질퍽하고 칙칙한 날에 뉴욕을 출발했다. 물기를 머금은 눈이 높이 쌓이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날 모인 사람은 동료 기자 여러 명, 벤틀리 본사에서 나온 매혹적인 여성 몇 명, 그리고 2차 사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직 경찰관 한 명이었다. 우리의 자동차 행렬이 너무 화려하고 당당해서 맨하튼을 지날 때는 우리 앞길이 자동으로 열렸다(하지만 이 차 자체에 그런 마법의 힘이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적어도 차종, 모델 또는 신호를 무시하는 뉴욕 택시 기사들 앞에서는 말이다). 몇 블럭 안 가 고급스러운 4 도어 뮬산의 진가가 발휘됐다. 앞 유리창 와이퍼는 삐걱거리는 소리나 약간의 떨림도 없이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시야를 틔워줬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현재 이 전형적인 영국 차 회사를 소유한 독일인들의 말마따나 “세부에 사물의 핵심이 있으며(God is in the details)” 벤틀리와 일반 고급 세단의 차이는 와이퍼에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컨티넨탈 GT의 부드러운 곡선.

다시 사고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길가에 서서 현지 경찰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동안 벤틀리 직원은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난다고 우리에게 쾌활한 어조로 설명했다(시승 행사에선 베이루트에서든 웨스트체스터에서든 사고가 체험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명품지 로브 리포트 최신호를 보면 된다). 여기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다른 자동차 기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적어도 환경 탓을 해도 괜찮다. 경찰관으로부터 20만5000달러 안팎이던 자동차가 이젠 어림잡아 16만 달러짜리로 변했다는 악의 없는 놀림을 들은 뒤 우리는 곧 벤틀리 직원이 몰고 온 날렵한 청색 제타(이 차와 컨티넨탈의 격차는 나와 윌리엄 왕자의 차이와 비슷하다)를 타고 현장을 벗어났다. 차는 질퍽한 빙판 길을 거의 덜컹거리지 않고 달려 우리의 점심식사 장소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기품 있는 28만400달러짜리 뮬산은 내 ‘기사’(슬프게도 지금으로선 내 거창한 환상의 산물에 불과하다)가 끌어갔고 컨버터블은 벤틀리 재활공장으로 향했다. 점심식사(요즘의 신토불이 미식가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스톤 반스의 블루 힐에서 4코스의 완벽한 진수성찬이었다는 말을 덧붙여야겠다)를 마친 뒤엔 신형 컨티넨탈 GT가 내게 맡겨졌다. 동종 모델 중 가장 빠른 자동차로 곧 미국에서 선보인다. 나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이 차를 시승했으며 최초 운전자는 다른 매체 기자다. 어떤 스릴이 느껴지는지 알려면 그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신형 컨버터블 GT는 정지상태에서 4.6초 만에 시속 96km에 도달하며, 최고속도가 시속 317km에 이르고, 550을 웃도는 마력을 자랑한다. 이 인상적인 최고 수치를 모두 실험해 봤다고 말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못했다. 하지만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 밀 파크웨이에서 모퉁이를 돌고 널따란 웅덩이를 피하며 운전하는 과정이 더없이 완벽한 즐거움이었다는 점만큼은 장담한다. 짙은 황색 안개와 증가하는 교통량 속에서도 이 차는 제 몫을 다 했다(또는 19만 달러 가까이 호가하는 차 값을 했다). 악천후에 이 정도 훌륭하다면 따뜻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건조한 날 또는 선선한 가을 날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벤틀리 관계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정말로 그 느낌이 어떨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동차 전문 평론가 입장에선 벤틀리를 타고 96km 이하의 속도로 운전한다니 정말 답답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듯이 자동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노면이 마르고 완만하게 굽은 길에서는 어떤 차라도 ‘꿈의 머신’이 되기 쉽다. 그리고 시승자는 분명 희희낙락하며 정지상태에서 시속 96km에 달하는 능력을 시험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연중 사시사철 혼잡한 도로에서, 그리고 시골 집으로 가는 길에 운전할 만한 자동차의 진정한 매력을 확인하려면 비 내리는 날 약간의 빙판길이 제격이다. 오늘의 여행은 최근 출시된 벤틀리 모델들이 평상시 이용하는 일반 승용차가 됐음을 증명했다. 적어도 몇 군데 차가 좀 찌그러져도 집을 압류당하지 않고 수리할 만한 경제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말이다.

번역·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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