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들의 변신은 무죄?
중견기업들의 변신은 무죄?
“이제야 와인과 음식의 조화에 약간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가벼운 음식엔 가벼운 와인, 무거운 음식엔 무거운 와인이 맞아요. 단순하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죠.”
4월 12일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와인전문 교육기관 아카데미 듀뱅에서 만난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은 와인 애호가를 넘어 전문가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유명 와인 산지를 수없이 다녀왔다”며 “와인과 음식이 어우러질 때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엔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 산지로 꼽히는 북부 피에몬테에 다녀왔다. 그는 “피에몬테는 프랑스 부르고뉴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국내 와인 시장도 이젠 나라나 품종이 아닌 산지별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만큼 성숙했다”고 말했다.
이날 김 회장이 찾은 아카데미 듀뱅은 매일유업의 와인 수입사 레뱅드매일이 선보인 와인전문 아카데미. 1972년 와인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어에 의해 파리에 설립된 아카데미 듀뱅은 현재 일본에만 5개 지점을 두고 있는 글로벌 와인 교육기관이다.
국내엔 지난 1월 법인 등록을 마쳤고, 4월 21일 문을 열었다. 아카데미 듀뱅 관계자는 “현재 매일유업에선 와인 수입뿐만 아니라 레스토랑도 20여 곳을 운영하고 있다”며 “아카데미를 거점으로 와인과 외식업에 필요한 내부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나아가 국내 와인전문가들을 양성하는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매일유업은 2002년 와인 수입·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레뱅드매일을 설립하고 와인 사업에 진출했다. 이후 치즈회사 상하, 유아복 전문회사 제로투세븐 등을 론칭해 꾸준히 다각화에 나섰다.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외식사업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요리 전문점 ‘달’과 이탈리안요리 전문점 ‘더 키친 살바토레 쿠오모’, 샌드위치카페 ‘부첼라’, 중식당 ‘크리스탈 제이드’, 일본양식 브랜드 ‘만텐보시’, 커피전문점 ‘커피스테이션 폴바셋’ 등 10개 외식 브랜드를 거느리며 국내 20여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소리 소문 없이 외식사업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유업 외식업의 새 강자‘더 키친 살바토레 쿠오모’의 경우 최근 열애설이 불거진 정용진 부회장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된 레스토랑.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커피전문점 폴바셋은 항상 줄을 서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최근엔 을지로에 2호점을 오픈했다. 매일유업의 외식사업은 김 회장이 경영을 맡으며 본격화됐다. 김 회장은 창업주 고(故) 김복용 회장의 3남1녀 중 장남. 경희대와 미국 NC웨슬리언대 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1986년 매일유업에 입사, 경영지원본부 등을 거쳤다.
2008년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은 데 이어 지난해엔 회장으로 승진했다. 김 회장은 와인 애호가로 유명한 아버지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소 와인과 외식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미식가로 유명해 먹기 싫은 음식도 일부러 먹어 보고 맛을 평가하는 것이 취미라고 한다. 12일에 아카데미 듀뱅을 찾았을 때도 지하에 마련된 간단한 카나페들을 일일이 맛본 후 직원들에게 피드백을 남겼다.
최근 매일유업은 수입맥주와 카레시장에도 진출했다. 일본 MCC고베식당과 손잡고 냉장카레를 선보였고, 레뱅드매일을 통해선 일본 삿포로맥주 수입권도 따냈다. 김 회장이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매일유업의 외식·와인 사업은 궤도에 올랐다는 게 업계 평가다. 레뱅드매일 역시 최근 와인업계의 전반적인 부진에도 불구하고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매일유업의 변신은 수 년간 저출산이 지속되며 우유·분유 시장이 정체된 것과 무관치 않다. 우유 총 소비량은 2006년 307만t에서 계속 줄다가 2009년부터 다소 늘었지만, 1인당 소비량은 63.6㎏이었던 2006년 수준을 밑돌고 있다. 업계의 총 매출도 몇 년째 1조9000억원 안팎 수준이다. 분유 소비량 역시 1만4000t 안팎에서 큰 변화가 없고, 매출은 3100억원에서 3400억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주요 업체들은 전통적인 우유·분유시장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한창이다. 남양유업의 경우 커피믹스 시장과 함께 비타민 시장을 신사업 영역으로 상정했다. 지난해 말 선보인 ‘프렌치카페 카페믹스’는 출시 3개월 만에 올해 매출 목표액 100억원을 넘기면서 동서식품이 30여 년간 사실상 독점해온 커피믹스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정체되고 있는 제과와 식품업계 회사들도 신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빙그레는 일본 실비식 배달 1위 업체인 엑스빈(X-vinn)과 손잡고 노인 전용 식사배달 서비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오뚜기는 지난해 스노밸리라는 국내 냉동식품 시장에 진출한 데 이어 차(茶)시장 진출을 위해 국내 차생산 업체를 인수했다. 샘표식품은 최근 고무장갑용 콜라겐과 천연조미료 대체재 개발 등 발효 기술을 활용한 신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식품기업들의 신사업은 대부분 2세로 경영권 승계가 이뤄지면서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오뚜기의 경우 함태호 창업주의 아들인 함영준 회장이, 샘표는 박승복 회장의 아들인 박진선 대표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신사업에 탄력이 붙고 있다.
식품업계 못지않게 제분업계도 신성장동력 찾기에 분주하다. 58년 전통의 ‘곰표’ 밀가루로 유명한 대한제분은 최근 애완동물 사업에 진출했다. 대한제분이 100% 출자한 디비에스는 지난 2월 서울 청담동 구 엠넷빌딩 1~2층에 애완동물 전문 매장인 ‘이리온’을 열었다.
벤츠 딜러 따낸 교학사이리온은 동물병원, 호텔, 유치원, 트레이닝센터, 미용, 애완동물용품점 등 애완동물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곳에서 누릴 수 있는 원스톱 센터. 총 15억원을 투입해 CT, MRI 등 최신 의료시설까지 갖췄다. 트레이닝센터의 경우 삼성 에버랜드 출신의 반려동물 전문 트레이너를 영입해 기존 훈련소와는 차별되는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다.
대한제분의 신사업은 이종각 대한제분 회장의 장남인 이건영 부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연세대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에서 MBA를 마치고 경영수업을 받아오다 최근 전반적인 경영에 나섰다. 대한제분 관계자는 “제분시장이 정체된 데다 이 부회장은 40대 젊은 오너 경영인이라 그런지 신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와인 애호가인 이 부회장은 와인 수입사인 비티스를 통해 프랑스·미국·호주 등지에서 고급 와인도 수입하고 있다. 특히 최고급 피노누아 전문 수입사로 와인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제분업계의 외도는 대한제분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동아제분은 이희상 회장 주도로 나라식품·단아유통 등 와인 사업은 물론 페라리·마세라티 등 수퍼카 수입 사업에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자회사 PDP와인을 통해 신사동에 와인문화공간 ‘포도플라자’와 와인바 ‘뱅가’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스테이크 전문점 ‘더반’을 여는 등 외식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유 못지않게 제분시장도 정체 상태다. 업계에 따르면 2009년 말 기준 제분시장 규모는 1조5000억원 수준. 최근 5년 동안 판매량이 감소 추세다. 소비량도 2000년 182만t 에서 2009년 162만t으로 줄었다. 시장 구조도 대한제분, 동아원, CJ제일제당, 삼양밀맥스 등 몇몇 업체가 과점하고 있어 점유율이나 매출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제분업체 입장에선 새로운 사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의 서울 동대문 지역 신규 딜러에 낯익은 회사가 선정됐다. 참고서 출판으로 유명한 교학사였다. 출판업체가 수입차 딜러 사업에 진출하기는 처음이다. 교학사는 교과서와 학습참고서 분야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액 608억원, 영업이익 38억원, 당기순이익 1억8000만원을 기록한 출판계의 알짜 기업.
수입차 딜러 사업은 그동안 주로 대기업이 했다. 코오롱은 BMW, 효성은 도요타·렉서스, SK네트웍스는 크라이슬러와 닛산·인피니티 딜러사로 참여하고 있다. 두산과 KCC는 혼다 딜러로 영업 중이다.
수입차 사업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늘어나는 이유는 진입장벽은 높지만 꾸준한 수익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BMW 딜러권을 선점한 코오롱모터스를 운영하는 코오롱글로텍은 지난해 매출 8950억원 가운데 51%에 달하는 4580억원을 BMW 판매로 올렸다.
벤츠와 도요타, 렉서스 등을 팔고 있는 더클래스효성은 지난해 매출 3001억원, 영업이익 75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각각 70%와 120% 증가한 것이다. 사업 초기인 2004년 매출이 594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6년 만에 6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교육업계에서 사업다각화의 원조는 웅진. 교육 분야에 주력해 왔던 웅진은 89년 웅진코웨이를 설립하면서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사업에 나섰다. 지금은 섬유, 건설, 태양광 사업까지 뛰어들었다.
‘구몬학습’ ‘빨간펜’으로 유명한 교원그룹도 정수기, 비데, 기능성 속옷, 기능성 화장품 등 생활용품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대교그룹도 해양심층수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교육업계 관계자는 “저출산으로 교육 시장이 정체돼 있기 때문에 기존 방판 조직을 활용한 신사업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한국에도 중소도시의 새로운 기회가 올까
2로또 1146회 1등 당첨번호 ‘6·11·17·19·40·43’,…보너스 ‘28’
3“결혼·출산율 하락 막자”…지자체·종교계도 청춘남녀 주선 자처
4“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설 것”
550조 회사 몰락 ‘마진콜’ 사태 한국계 투자가 빌 황, 징역 21년 구형
6노르웨이 어선 그물에 낚인 '대어'가…‘7800t 美 핵잠수함’
7'트럼프의 입' 백악관 입성하는 20대 女 대변인
8주유소 기름값 5주 연속 상승…“다음주까지 오른다“
9트럼프에 뿔난 美 전기차·배터리업계…“전기차 보조금 폐지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