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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 아버지를 닮은 딸

[아버지와 딸] 아버지를 닮은 딸


최근 경영 전면에 나선 재벌가 딸들이 늘고 있다. 중견기업 오너 딸들도 외식업계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업가적 기질을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기업가 집안에서 그 기질이 양육된 것일까.
아르헨티나 와인회사 카테나 자파타의 부녀 경영자 니콜라스 카테나(왼쪽)와 로라 카테나.

로라 카테나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술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엔 스탠퍼드대에서 의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샌프란스시코 UCSF 의료센터에서 의사이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로라는 고향인 아르헨티나에서 더 유명하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대부로 불리는 니콜라스 카테나의 딸로서다. 1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와인을 생산해온 카테나 집안은 니콜라스 카테나가 양조를 맡으며 세계적 와인 회사로 발돋움했다. 그의 회사 카테나 자파타는 로버트 파커가 펴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와이너리> 에 남미에선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영국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은 “니콜라스 카테나는 아르헨티나 와인을 세계 와인 지도에 올린 인물”이라며 “드디어 아르헨티나에도 와인 왕조가 생겼다”고 극찬했다. 니콜라스 카테나는 2009년 와인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디캔터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도 뽑혔다.

니콜라스 카테나는 현재 회사 경영권을 세 명의 자녀 중 맏딸인 로라에게 넘겼다. 로라는 그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와 멘도사를 오가며 치료와 양조를 겸하고 있다. 5월 11일 한국을 찾은 그녀는 “내가 가업을 물려받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아버지의 강력한 요청으로 피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업가 집안에서 딸의 위치는 독특해요. 누구보다 아버지의 사업가 기질을 많이 물려받지만 가업을 이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즐기는 일을 찾게 되죠. 더구나 혼자서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성향을 가질 때가 많아요. 가업에 대해서는 제3자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죠. 반대로 아버지에겐 가장 가까우면서 객관적인 조언자가 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에도 아버지와 대화하면 거의 절반은 싸움이에요. 그래서 서로 더 신뢰가 쌓이는 것 같아요.”



사업가 딸은 특별한 재능이 있다?현재까지 로라의 경영 성적은 탁월하다. 그녀는 의사인 자신의 강점을 사업에 잘 활용하고 있다. 과학적 포도 재배 방법을 연구해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고산 지대에서 만들어지는 아르헨티나 와인의 장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를 마케팅에도 적극 활용한다.

로라는 이에 대한 공로로 현재 아르헨티나 와인 대사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딸로 태어나서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며 “지금은 의사와 와인회사 CEO 모두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라처럼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딸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영자적 자질을 갖추게 된다. 패션업계 거물 랄프 로렌의 딸 딜런 로렌은 듀크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연기 수업도 받았고 MTV의 비디오자키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본 적도 있다. 그녀는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자격증도 받았고 특별한 이벤트 사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사업 캔디바(Dylan’s Candy Bar)를 운영한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미국 공항과 호텔, 그리고 대형마트 안에 총 20개의 매장을 확보했을 정도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오빠들을 이기고 싶었다”며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할 것이라고 느꼈다”고 밝혔다. 지미 추의 CEO 타마라 멜론은 비달 사순의 파트너였던 톰 이어다이의 딸이다. 멜론은 지미 추를 경영하기 전 미라벨라(Mirabella) 잡지사에서 PR 일을 하고, 영국 보그(Vogue)지에서 액세서리 편집자로 일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의존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내 사업을 원했다”며 “하지만 아버지 DNA는 내가 형제 중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유다 매니지먼트의 CEO 마리아 보그도 비슷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컴퓨터 테크놀로지 어소시에이츠(CTA)의 CEO다. 마리아는 아버지 회사인 CTA에서 인력 채용, 재무, 구매 등 업무를 9년간 담당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전화 응대를 잘 못했다고 해서 해고했다. 그는 그녀가 새로 사업을 시작할 때 자금을 전혀 대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사업가적 기질이 유전자와 환경의 결합이라고 믿는다”며 “나는 언제나 사업주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이부진 사장, 이서현 부사장, 정유경 부사장, 남수정 사장.

보그와 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재벌가에서 태어나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떠나 외국인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김 회장을 버린 자식 취급했고 학비와 지원금도 끊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아버지인 고(故) 김수근 명예회장의 사업가 기질만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혼자 명품 사업을 개척해 지금 MCM을 세계적 브랜드로 올려놓았다.

한국 대기업에서도 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묵묵히 내조에만 전념하던 과거 재벌가 안방마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는 삼성가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호텔 경영에서 올린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 삼성에버랜드 경영까지 겸하고 있다. 삼성의 유통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 최초로 루이뷔통을 인천공항 면세점에 입점시켜 주목 받았다.



경영 전면에 나선 재벌가 딸들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은 전공 분야인 패션 사업에서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08년 이탈리아 복합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를 비롯해 릭 오웬스, 토리 버치, 꼼데가르송, 산타마리아 노벨라 등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잇따라 개점하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한진그룹의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와 조현민 상무보도 경영일선에서 활발하게 뛰고 있다. 조현아 전무는 지난해부터 대한항공 기내식 기판사업본부장으로 글로벌 기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 전무는 아버지 조양호 회장 곁에서 미국 LA의 월셔 그랜드호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국내 최고 여성 부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딸인 정유경 부사장도 빼놓을 수 없다. 정 부사장은 2009년 신세계 백화점 부산 센텀시티 프로젝트부터 경영 현장에 모습을 보였다. 현재 신세계 백화점과 조선호텔, 신세계 인터내셔널 등의 경영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딸 정지이 현대U&I 전무도 기대되는 차세대 여성 경영인이다. 정 전무는 28세에 현대상선에 입사해 현 회장을 따라다니며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롯데그룹에선 장선윤 블리스 대표가 돋보인다.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딸인 장 대표가 이끄는 블리스는 와인, 과자, 빵 등을 제조·수입·판매하는 식품업체다. 장 대표는 과거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을 오픈하고 안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CJ그룹의 이미경 CJ E&M 총괄부회장은 전문경영인으로서 행보가 돋보인다. 이 부회장은 식품그룹 CJ의 사업영역을 영화, 방송, 음반, 공연 등 다양한 콘텐트 사업으로 확장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이런 현상은 대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패밀리 레스토랑 ‘토니로마스’ ‘매드포갈릭’ ‘스파게띠아’ 등으로 외식업계 강자로 떠오른 선앳푸드의 남수정 사장은 남충우 전 타워호텔 회장의 장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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