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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에서 만난 블랙컨슈머 _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더니…

구치소에서 만난 블랙컨슈머 _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더니…

블랙컨슈머 김영훈(31·가명)씨. 2010년 1월 13일부터 올해 5월 11일까지 134회에 걸쳐 식품회사 100여 곳을 협박해 1600여만원을 뜯었다. 주로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치료비를 주지 않으면 식품의약품안전청·한국소비자원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5월 19일 구속된 김씨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5월 25일 그를 만나기 위해 성동구치소로 향했다. 강변역에서 택시를 탄 지 20여 분 만에 성동구치소 면회실에 도착했다.



수사 중에도 “돈 보내겠다”는 전화40여 분 만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이 작다. 중학생 체격으로 보인다. 낯빛은 입고 있던 황토색 옷보다 어둡다. “안녕하세요.” 첫인사를 건넸다. 아무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 “왜 식품기업을 협박했느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교도관이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일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막아섰다. 그는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면서 입을 열지 못했다. 교도관이 면회를 중지하면서 김씨를 데리고 들어갔다. 10여 분 후 이런 답이 왔다. “김씨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직업이 없다고 했다. 매달 70여만원을 받는 기초수급대상자다. 가족과 떨어져 수원의 한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치료가 어려운 병을 앓고 있다. 그는 “치료비를 위해 기업을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인터넷 게임 머니를 사는 데 돈을 사용한 증거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가 기업을 협박해 금품을 받기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지난해 초 빵을 사먹었는데, 플라스틱 이물질이 나와 이빨이 깨졌다. 해당 업체로 전화를 걸었더니 치료비를 준다고 했다. 돈벌이가 없던 그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치료비를 받은 후 그는 고시원 근처 편의점과 수퍼를 돌아다니면서 식품을 사들였다. 멀쩡한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 있다며 식품회사를 협박했다. 보상금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식품에서 이물질만 찾으면 돈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그가 살던 고시원 방에선 갖가지 식품이 담긴 쓰레기 봉투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범행은 점점 체계를 갖췄다. 그는 다른 사람 명의로 휴대전화 6대를 만들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름도 김성훈 등으로 바꿔가며 전화를 걸었다. 적게는 위세척 명목으로 2만원, 많게는 30만원을 요구했다. 통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렇게 1년간 1600여만원을 받아냈다.

식품업체들은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사실관계를 떠나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실례로 ‘쥐 새우깡’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제조업체 농심은 한동안 ‘부도덕 업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식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없다”며 “사실관계를 믿으려 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씨와 같은 블랙컨슈머의 활동을 막기 위해선 무조건 돈으로 무마하려는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 김씨는 경찰 진술에서 “해당 업체에 전화해 이물질이 나왔다고 말하면 고발 등 별다른 협박을 하지 않아도 순순히 돈을 보내는 기업이 많았다”고 말했다. 기업의 주먹구구식 대응이 되레 화를 불렀다는 얘기다. 블랙컨슈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구체적인 고객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그에 맞춰 행동하면 된다. 김씨의 검거 과정은 기업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그는 올해 1월 C식품회사로 전화를 걸어 회사에서 제조한 훈제 닭다리바에서 이쑤시개가 나와 입 안이 찢어졌다며 치료비 30만원을 요구했다. C사는 증거자료를 요구했다. 김씨는 “30만원 받자고 제가 증거자료를 보내겠습니까? 차라리 그냥 식약청 쪽에다 알려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라고 맞대응했다. 여느 회사 같으면 돈을 줬을 법한 상황.



돈으로 해결하려는 기업도 문제C사는 달랐다. 돈으로 막지 않았다. “제품·이물질·치료내역 등을 보내주면 치료비를 지급하겠다”고 대응했다. 그러면서 C사는 김씨를 고객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같은 건으로 5~6번 전화를 걸어오는 것을 일일이 기록했다. 직접 만날 것을 요구하면서 그의 소재 파악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를 검거한 성남중원경찰서 조천용 강력5팀장은 “기업은 무조건적으로 돈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일단 증거자료를 요구하는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해결해야 블랙컨슈머를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립식품 김세은(소비자보호팀) 대리는 “블랙컨슈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증거자료는 보내주지 않으면서 돈부터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비자보호법에 명시된 대로 보상하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일단 돈을 보내라는 소비자의 요구에 대해선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만난 식품회사 관계자들은 블랙컨슈머를 뿌리 뽑기 위해선 국가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예를 들어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 있다고 사진을 보내오는 경우 기업이 자체적으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또 금속검출기를 통과한 제품에서 금속이 발견됐다는 민원도 수차례 제기된다.

제과업계 관계자는 “이런 기업의 애로를 반영해 식약청 등이 소비자의 피해신고가 사실인지 밝혀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관계를 떠나 일단 쓰고 보는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익명을 원한 식품업체 한 관계자는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언론은 무조건 쓰고 본다”며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돼도 이를 정정해주는 곳은 드물다”고 말했다.

조천용 팀장은 “김씨가 경찰 수사를 받는 동안 ‘돈을 보내겠다’는 기업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고 말했다. 민원을 제기한 김씨는 블랙컨슈머로 붙잡혔는데, 기업은 돈을 주겠다며 아우성이다? 블랙컨슈머의 불편한 진실이다.



■ 블랙컨슈머 김영훈씨 기업 협박 일지



2010년 9월 30일소보루 빵에서 개미 발견됐다며 위세척 치료비 2만원 요구

소견서와 영수증 요청했으나 회신 없음



2010년 10월 12일햄버거에서 나무조각으로 추정되는 이물질 발견됐다며 치료비 1만원 요구

식품 제조일자와 음식을 먹은 날짜가 달라 의문을 제기하자 화를 내며 자리를 피한 뒤 다시 연락하지 않음



2010년 12월 30일쿠키에서 금속으로 추정되는 이물질 발견됐다며 치료비 6만~7만원 요구

소비자 편한 시간에 방문할 것을 권고했으나 화를 내며 식약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



2011년 1월 14일닭다리바를 먹다 이쑤시개로 추정되는 이물질에 찔렸다며 치료비 20만7000원요구

치료비를 입금한 후 해당 제품과 영수증을 택배로 발송하기로 약속했으나 송금 후 연락두절



2011년 3월 28일피자에서 이물질 발견됐다며 치료비 7만원 요구

방문할 것은 권했으나 식약청에 신고하겠다며 전화 끊음

김혜민 기자 has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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