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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왕수컷’ 휴 헤프너의 빛과 그늘

‘20세기 왕수컷’ 휴 헤프너의 빛과 그늘

“헤프너는 행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고통과 절망을 무시한 채 인생을 마냥 화창한 봄날로 여기게 한다.”

올 상반기에 만난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행본, 그러나 독서시장에서의 반응은 뜻밖에도 미적지근한 게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 평전이다. 역사학자 스티븐 와츠가 쓴 균형 잡힌 저술 ‘미스터 플레이보이’는 숱한 논란 속의 문제적 인물이 가진 앞뒷면을 함께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휴 헤프너, 사실 인물 자체가 호기심을 자아내지 않던가? 의외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중사회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교재이기도 하다. 읽는 재미 역시 그렇다. 책으로 접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정보와 뉘앙스로 넘쳐난다.

바로 이런 게 좋은 책인데, 이번 리뷰는 일단 ‘18금’이다. 꽤 수위가 높아서 한국 상황에서는 돌팔매질을 당할 수도 있다. ‘미스터 플레이보이’에 대한 미적지근한 국내 반응도 실은 그 때문이리라. “희대의 탕아이자 도색(桃色)잡지 플레이보이 발행인을 통해 얻을 게 뭐가 있을까?”하는 도덕제일주의 심리 말이다. 그렇다면 이 평전에서 드러나는 카사노바의 나쁜 점, 비윤리적 요소부터 지적하는 게 순서다. 그래야만 리뷰어인 나도 면피가 되는데, ‘플레이보이’의 잡지 철학은 “품위있는 에로티즘”을 내세웠지만, 그게 위선이자 반(半)사기꾼의 공허한 주장이라는 비판도 무수하게 들었다.

“헤프너는 행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고통과 절망을 무시한 채 인생을 마냥 화창한 봄날로 여기게 한다.” “그는 저질스러운 여자 누드사진을 팔면서 높은 이상을 주장하고, 얼치기 같은 취향을 감추기 위해 유쾌한 이미지를 만들고, 사적 공간에서는 발끈하는 성미면서도 공적 자리에서는 매력적이고 재치있는 사람인 척하는 사기꾼이다.” “플레이보이가 내세우는 가치가 자유로운 쾌락주의이지만, 그건 온전한 인간 이해라기보다는 그저 성기에 국한된 것에 불과하다.”

그게 ‘플레이보이’가 창간된 1953년 이후 지속된 비판의 일부인데, 사실가 헤프너는 한국에서 도덕적 금치산자 정도로 몰리기에 딱 좋다. 이를테면 ‘플레이보이’ 지면은 종종 스와핑(부부가 자신의 배우자를 다른 부부의 배우자와 맞바꾸어 성관계를 갖는 일)을 종종 암시하며 은연중 찬양하지만, 헤프너 자신이 정기적으로 그룹섹스를 즐겼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제수와도 동침했다(84쪽). 많은 국내 일간지의 리뷰에서 소개된 대로 스무 살이 가깝던 자기 딸의 친구와도 성적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게 진정 놀랍지 않은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는 유명인사를 그린 평전인데도 이토록 가혹할 때는 가혹하게 묘사하는 게 ‘미스터 플레이보이’란 책이다.

그러고 보면 헤프너란 위인의 그릇도 참 만만치 않다. 저자를 위해 40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내서 인터뷰를 해줬는데도, 이 책은 저자의 빛과 그림자를 용기있게 함께 파헤친다. 더 놀라운 것은 헤프너가 많은 전기·평전 중 유독 이 책을 좋아하는 점이다. “나를 가장 나답게 그렸다”는 이유로 말이다. 사실 저자는 그의 잡지 인생 50년, 플레이보이 제국의 사실과 추문, 찬사와 혹평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저자의 관심은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에 있지 않다. 펜 끝은 전후 격동기의 미국 사회문화사의 변화 추세를 향한다.

“그가 흥미로운 사람에 그치지 않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은 개인적 꿈과 욕망이 사회적으로 폭넓은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현대 정신의 근본을 건드리면서 전형적인 미국 개인을 대표했다”는 이유다. 사실 이 잡지 창간사부터 매력적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가족 잡지가 아님을 명백히 밝혀 두고자 한다. 당신이 누군가의 아내거나 장모인데 실수로 이 잡지를 집었다면 사랑하는 남자에게 건네주고 ‘레이디스홈 컴패니언’으로 돌아가라. (…) 우리는 칵테일과 오르되브르(애피타이저)를 만들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고, 아는 여자를 불러서 피카소와 니체, 재즈, 섹스를 논한다….”

1926년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헤프너는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에 빠져 지냈다. 어린 시절 내내 스스로 창조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살았는데 이러한 기질은 평생 이어졌다. 전화도 받지 않고, 가까운 치과에도 혼자 가기 싫어하던 아이는 스스로 ‘플레이보이’란 현실을 창조해내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헤프너는 첫 결혼 상대인 밀리를 고등학교 졸업생 파티에서 만났다. 대학 시절 내내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 처음 성관계를 가진 것은 졸업을 앞둔 때였다는 게 이 책의 묘사다.

기독교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헤프너의 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1948년 출간된 ‘킨제이 보고서’였다. 출간 두 달 만에 20만 부가 팔린 이 보고서는 미국사회가 성에 대해 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새 시대를 열었지만, 그건 헤프너도 마찬가지였다. 메릴린 먼로의 천연색 나체 사진을 실은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이후 남자들에게 결혼과 가족의 의무를 벗어던질 것을 촉구한 잡지는 즉각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헤프너는 잠을 쫓고 정신을 긴장시키는 식욕 억제제 덱세드린을 복용해가며 미친 듯이 잡지를 만들었다.

잠옷만 입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은 채 펩시콜라만 스무 병씩 마셔댔다. 결국 그는 ‘기이한 은둔자’에서 ‘플레이보이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잡지로 시작한 플레이보이는 TV쇼, 클럽, 맨션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고, 헤프너는 수억 달러의 재산가가 되었고, 미국 대중사회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의 곁에는 금발 미녀들이 득시글댔다. 헤프너는 “내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선택하는 건 그 수준에 존재하는 순수함과 다정함이 좋기 때문”이라며 “내가 데이트한 여자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내가 그들에게 주체성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전보다 더 좋아진 상태로 나를 떠난다”고 호언했다.

이 책은 스캔들에 가까운 그런 사생활만 나열하는 게 아니다. 헤프너는 일종의 철인왕(哲人王)이자, 전후 미국 사회 대중의 성적 해방과 풍요로운 소비 욕구를 예견했던 사람으로 재평가한다. 이를테면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검약과 노동 윤리를 내세웠다면, 헤프너는 “너 자신을 즐기라”는 새로운 윤리를 20세기 인간들에게 불어넣어줬다. 멋진 옷과 자동차, 좋은 음식과 술, 그리고 매력적인 여자에 대한 세속주의를 가르친 것이다.

1972년 판매 부수 700만 부로 절정을 구가했던 플레이보이는 지금도 320만 부를 찍어낸다. 저자는 헤프너를 20세기 미국의 자기 충족 문화의 건축자라는 점에서 헨리 포드나 월트 디즈니의 반열에 세우는데 그렇게 균형 잡힌 평가가 돋보인다. 그 행간에서 우리는 멋진 독서체험을 할 수 있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한 방탕아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도달한 곳은 현대 문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라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그래서 ‘미스터 플레이보이’는 매력적이다.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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