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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그 후 25년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그 후 25년

속리산 자락 구구산방(龜龜山房)에 사는 도종환 시인.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삶을 즐기며 산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애통한 마음을 눈물 속에 한 자 한 자 담아낸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 세상에 나온 지 2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현재까지 120만 부가 팔렸다.

그가 올해 여러 권의 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출시 25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접시꽃 당신> 을 시작으로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와 2000년 발간한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을 다시 손질해 개정판 <도종환의 삶 이야기> 와 <도종환의 교육 이야기> 로 펴냈다. 7월 18일엔 새 시집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를 냈다. 2003년 교직에서 물러난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텃밭을 일구며 글을 쓰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7월 8일 충북 보은군 법주리로 향했다. 그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에도 잘 잡히지 않는 속리산 자락에 살고 있다. 며칠간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나 싶더니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쏟아진다. 차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집 <접시꽃 당신> 을 찬찬히 읽었다. 시집을 다 읽을 무렵 산 중턱에 안개가 걸려 있는 그림 같은 곳이 나왔다. 속리산이다. 동네 어귀에서 막걸리 4병을 샀다. 빈손으로 가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비 오는 날 시를 읽으니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났다.

계곡을 지나 산속으로 향하자 길은 더 좁아지고 구불구불 험난하다. 비를 흠뻑 맞고 서 있는 옥수수 길을 지나자 차 한 대가 길을 막았다. 외길인지라 앞뒤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앞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장마에 어울리지 않는 연보랏빛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다. 반갑게도 도종환 시인이다. 혹시나 산속에서 길을 잃을까 봐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는 능숙하게 차를 빼더니 길을 안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새 옷도 꺼내 입었다고 한다.

차가 멈춰 선 곳 아래에 집 한 채가 보였다. 울타리가 없다. 산비탈 돌계단을 내려가니 푸른 잔디밭 위에 흙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널따란 거실에 동쪽으로 커다란 창문 세 개가 있다. 통유리에 비친 빗속의 숲은 싱그럽고 생기가 넘친다. 유명 화가의 그림이 필요 없었다. 집 옆을 흐르는 계곡에선 물소리가 들려오고 흙집 지붕과 푸른 잔디밭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흥겨운 음악 같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들으며 시인이 내준 차를 마셨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마친 후 글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어느덧 시계가 오후 4시를 향한다. 그의 새 시집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가 떠올랐다. 작가는 왜 시간에 주목하게 됐을까?

“산으로 들어온 지 올해로 9년째예요. ‘내 인생이 어디쯤 와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루로 따져보니 분명 정오는 지났고요. 오후 세 시에서 네 시를 지나 다섯 시로 가는 거 같아요. 이제 해가 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지더군요. 생각을 바꿔 아직도 내겐 몇 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동안 12시에서 한 시는 치열했고 그 뒤로 갈수록 아팠고, 고독하기도 했고, 약해지기도 했어요. 이게 인생이죠. 시간이 갈수록 더 마음이 약해질 수 있지만 몇 시간 남았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제겐 아직 아름다운 노을 속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중에서




이 얘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자는 건가요.“아니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거예요. 이번에 발표된 시 중 ‘발치’가 있어요. 어느 날 이가 아파 손으로 건드려보니 쏙 빠지겠더군요. 놀라서 다음날 치과에 갔더니 빼자고 하는 거예요. 벌써 ‘내 나이가 손만 건드려도 치아가 빠지는 나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심란한 마음으로 돌아올 때였어요. 초가을이었는데 길가에 진보라색 과꽃이 예쁘게 피었더군요. 자세히 보니 이파리 몇 개는 군데군데 구멍도 나고 벌레도 먹었어요. 그날따라 달라 보이더군요. ‘벌레 먹고 구멍이 있어도 저렇게 예쁘게 꽃을 피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로서의 삶에 만족하나요.“직장생활을 안 하니 시간에 자유롭죠. 작가는 은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죽어도 은퇴라는 게 없죠. 윤동주 시인은 죽었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실제로 저작권법에 따르면 사후 50년간은 저작권료가 나옵니다. 행복하죠. 그래서 제겐 글 쓰는 게 일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한 후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는 상황에서 글을 쓰죠. 그 시간에 감사합니다.”



작가에겐 나이가 중요하지 않겠네요.“오히려 위대한 예술가를 보면 큰 업적을 남기는 게 인생의 후반부예요. 인생의 깊은 지혜를 담아 만년작을 내는 겁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가 대표적이죠. 시인 신경림 선생님의 유명한 시집 <농무> 는 젊을 때 쓰셨죠. 그분이 60세를 향해 갈 때 <길> 을 출간했습니다. 좋더군요.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었죠. 5년 간격으로 계속 <어머니> <쓰러진 자의 꿈> 등을 내놓으셨어요. 보통 그 나이가 되면 기력이 떨어지고 열정도 가라앉게 마련이죠. 하지만 선생님은 만년작을 계속 내놨지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저도 선생님처럼 하고 싶습니다. 육십을 넘어서도 칠십이 되어서도 몇 년 단위로 좋은 시집을 내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자

인터뷰 중간 무렵 동네 어귀에서 사온 막걸리를 꺼냈다. 시인이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두부를 튀기고 김치, 멸치 등 안주를 챙긴다. 두부가 익을 동안 잠시 집 구경에 나섰다. 방 한 칸은 서재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한가운데에는 소박한 나무 걸상이 있다.

거실도 한쪽 벽 전체가 책장이다. 집 안 곳곳에 책이 없는 곳이 없다. 마치 책의 일부분이 집처럼 느껴진다. 거실과 부엌 사이엔 가늘고 긴 대나무를 실로 엮어 만든 세 장의 발이 쳐 있다. 발엔 구구산(龜龜山)이라고 적혀 있다.

시인이 속리산 자락에 든 건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병원에선 ‘신경실조’라는 진단을 내렸다. 일과 스트레스로 신경이 견디지 못하는 병이다. 감기 한번 걸리면 일 년 내내 낫지 않고 합병증까지 이어졌다. 어렵게 복직한 학교마저 그만둬야 했다. 후배 화가가 병을 앓고 있던 동생을 위해 지은 집을 시인을 위해 내줬다. 그곳이 구구산방이다. 동생이 거북이처럼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가가 지은 이름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3년 만에 툴툴 털고 일어났다. 싱그럽고 푸른 자연이 그에게 좋은 약이 됐다. 이제 그는 구구산방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삶을 즐기며 사는 곳이라고 부른다.

후배 화가가 새긴 구구산방 현판 아래 시인이 텃밭을 일굴 때 신는 장화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왼쪽) 초등학교에서 안 쓰는 의자를 가져다 놨다. 교사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까.



삶을 되돌아볼 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몇 시인가요.“제가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12시에서 한 시 사이가 아닐까요? 나 자신의 이익보다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뜨겁게 살았죠. 상처도 많이 받고요. 12시에서 한 시는 그렇게 살았고 병이 들면서 뜨겁게 사는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9년을 살았습니다. 이제야 작가의 역할을 알겠더군요. 한발 물러나서 두루두루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했던 거죠. 그것을 알라고 몸에 병이 든 거 같아요. 이제는 그토록 아픈 시간마저 고맙습니다.



올해 낸 개정판 <도종환의 삶 이야기> 의 부제가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데요. 삶에서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게 뭔가요. “모두 마음이죠.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발전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게 마음이죠.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오. 반면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버려야겠죠.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게 성숙해지는 겁니다.”



책 내용을 보면 소유하지 않을 때 풍요로움을 느낀다고 하던데요.“적게 소유할수록 행복하죠. 하지만 삶에서 무소유를 실천하기는 어렵죠. 대신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좋겠어요.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상대적인 결핍감이죠. 먹고, 입고, 쓸 때 부족한 듯 사는 게 좋습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서 오는 게 아니니까요. 전 음악 들으면서 글을 쓰는 게 삶이고 즐거움입니다.”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운 후 용기를 내 시인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인은 이거 물어보려고 막걸리 사 왔느냐며 핀잔을 준다. 시인은 즉답을 하지 않는다. 한참 후에 다시 물었다. 그는 나지막이 “모르겠다”고 말한다.

“사랑은 갈수록 모르겠어요. 친구 기다리다 우연히 (부인을) 만나서 사귀게 되었죠. 29세에 만나 서른에 결혼했습니다. 난 사람을 잴 줄 몰라요. 그냥 그 자체가 소중하고 존중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죠. 그 사람이 좋으면 푹 빠지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결혼 1년 만에 아프다는 것을 알았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엄청나게 울었죠. 울면서 쓴 시가 ‘접시꽃 당신’입니다. 고통스럽고 아팠던 시간이었죠. 그때는 사랑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죠. 이제는 모르겠어요.”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요? 남도 우리와 같을까요? 당신을 여의고 아무래도 내가 살 힘이 없어 수이 당신에게 가고저 하니 나를 데리고 가소.”

다시 말없이 막걸리 한 잔을 마신 후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원이 엄마 편지 얘기를 꺼낸다. 400년 전 한 여인이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써 남편과 함께 묻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원이 엄마처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여자와 듣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렇게만 사랑하면 되지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죠.”

도종환 시인은 앞으로도 산속에서 밭을 일구며 시를 쓸 생각이다. 그는 죽기 전에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게 소원이다.

“만해 한용운, 윤동주 시인, 김소월 시인 모두 단 한 권의 시집을 냈어요. ‘님의 침묵’ ‘서시’ ‘진달래꽃’ 등은 시간이 지나도 누구나 사랑하는 시입니다. 역사에 남는 시죠. 저도 그런 시 한 편을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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