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만화의 부활] 해외서 각광…종이만화도 한류 대열에

인터넷 문화가 확산되면서 종이만화의 인기가 추락했다. 한때 ‘10만 부는 거뜬하다’던 단행본 만화는 2000년대 중반부터 1만 부를 팔기조차 어려워졌다. 만화 부흥기를 이끌던 주간 만화잡지는 같은 시기 20여 종에서 7종으로 줄었다. 그나마 격주간이나 월간으로 바꿔 명맥을 유지하는 잡지가 많았다. 국내 만화시장은 긴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실력 있는 만화작가는 일본으로 떠났다.
이런 종이만화가 최근 되살아나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성공하는 종이만화가 증가하는 한편 일부 종이만화는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 종이만화의 부활을 이끄는 원동력은 탄탄한 스토리와 교육 콘텐트다.
만화작가 형민우씨의 『프리스트』(총 18권)는 50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언뜻 보면 많이 팔린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50만 권은 7년 동안 팔렸다. 국내 만화시장이 협소한 탓에 50만 권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형민우씨는 “『프리스트』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영광이지만 수입은 많지 않았다”며 “좁아터진 한국 만화시장에서 작가의 형편이 나아지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더 넓고 안정적인 시장을 원했다. 2007년 미국의 만화 수입업체 ‘도쿄팝’에서 계약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해외에 진출한 『프리스트』는 반응이 뜨거웠다. 세계 33개국에 수출됐고 미국 진출 1년 만에 100만 권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국내 만화가 미국시장에서 인정받은 첫 사례다.
올 5월 영화사 소니픽처스는 『프리스트』를 영화로 제작했다. 개봉 3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고 세계 각국 박스오피스에서 상위권에 랭크됐다. 형씨는 “오래전부터 해외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때마침 도쿄팝에서 제의가 들어왔다”며 “도쿄팝은 식상해진 일본만화를 대체할 만한 콘텐트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만화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잔인하고 선정적인 일본만화 특유의 콘텐트에 싫증 내는 독자가 늘어서다. 『프리스트』는 이런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해외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한국 만화기획사 코믹팝엔터테인먼트 선정우 대표는 ‘서구적 그림체와 동양적이면서도 흥미 있는 스토리’를 『프리스트』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프리스트』뿐만이 아니다. 탄탄한 스토리로 해외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종이만화는 많다. 허영만씨의 『타짜』 『식객』이 영화로 제작돼 성공을 거뒀고 해외로 진출했다. 박소희씨의 『궁』과 원수연씨의 『풀하우스』는 드라마로 제작돼 한류 열풍의 중심에 섰다. ‘대한민국은 왕조국가’라는 설정으로 만든 『궁』은 독특한 스토리에 한국의 고전문화가 녹아들면서 해외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아직도 왕이 존재하는 일본(100만 부)·태국(20만 부)에서 그랬다.
학습만화도 세계시장에서 인기종이만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드라마 등 영상물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원작 만화의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시너지 효과다. 만화 『궁』을 수출한 서울문화사 유재옥 국장은 “드라마 방영 전 40만 부가량 팔렸던 『궁』은 3년이 흐른 현재 200만 부 넘게 판매됐다”며 “최근엔 만화 제작 초기 단계부터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이 가능하도록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주대 백준기 만화학과 교수는 “젊은 작가들의 개성 넘치면서도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은 한국만화의 힘이자 경쟁력”이라고 전했다.

세계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한국의 종이만화는 또 있다. 학습만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한국 출판시장에서 학습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69%에 달한다. 학습만화는 만화 보기를 원하는 아이들과 공부를 원하는 학부모의 니즈를 동시에 만족하는 콘텐트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외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예림당의 『Why?』시리즈다.
2001년 선보인 『Why?』시리즈는 과학학습만화의 원조다. 초등학생 엄지와 꼼지 등 캐릭터가 벌이는 모험을 중심으로 과학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미생물·새·공룡 편 등 88권이 출간됐고, 10년 동안 3728만 권이 팔렸다. 이 시리즈는 현재 중국·대만·태국·러시아 등 세계 9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주로 저작권을 수출하는 방식이다. 저작권료만으로 한 해 3억~4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Why?』시리즈는 수년에 걸쳐 기획했기 때문에 내용이 알차다. 감각적 만화 기법을 도입한 것도 성공의 원인이다. 『Why?』 시리즈가 성공을 거두자 비슷한 표지의 미투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예림당 나성훈 대표는 “나이키를 키운 것은 나이스”라며 “표지는 따라 할 수 있어도 콘텐트는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공들인 만큼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이세움의 『살아남기』시리즈는 만화의 종주국 격인 일본 시장을 뚫었다. 2008년 일본 시장에 진출해 누적 판매부수 50만 부를 달성했다. 올 3월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 ‘지진에서 살아남기’ 편의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아동학습 분야 서적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에도 학습만화가 있지만 콘텐트 질이 낮고 흑백인 경우가 많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질 높은 콘텐트로 무장한 한국 학습만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아이세움 박현미 팀장은 “일본 학습만화 시장에는 마땅한 경쟁자가 없다”며 “오히려 7월 일본에서 판매를 시작한 예림당의 『Why?』 시리즈 정도가 장기적으로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한국 교육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며 “교육강국인 한국에서 만든 학습만화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해외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고 성공 이유를 밝혔다. 『살아남기』 시리즈는 현재 세계적으로 10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KOTRA에서 해외 진출 지원종이만화가 해외시장에서 성공하자 ‘종이는 죽었다’며 혹평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정부도 종이만화의 부흥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KOTRA는 올 8월부터 ‘토종 만화 세계로 나간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시범적으로 출판사 5곳과 만화작가 5명을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해외 바이어를 초청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고 ‘중국 만화대회’ 참가를 지원한다. 올 12월에는 한류 종합 전시회에 이들의 만화를 전시할 계획이다. KOTRA 지식서비스사업팀 김건영 미래사업처장은 “웹툰이 성장하지만 종이만화의 기반이 튼튼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사업 추진 이유를 밝혔다. 김 처장은 “만화 출판은 제작 비용이 10~20%밖에 되지 않아 마진율이 높은 사업”이라며 “콘텐트에 대한 적절한 지원만 있으면 높은 수익을 내는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KOTRA에서는 해마다 지원 대상을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탄탄한 스토리에 매력적인 콘텐트를 갖추면 종이만화도 세계시장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 『프리스트』의 형민우씨는 이렇게 말했다. “만화시장이 성장하려면 누구보다 만화작가가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만화의 스토리가 좋아지고 콘텐트가 탄탄해진다. 만화작가들이 혼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으면 한다. 오랜 노력과 공들여 만든 작품은 언젠가 빛을 본다.”

인터뷰 | 코믹솔로지 CEO 데이비드 스테인버거
“한국만화 발굴해 미국서 판다”
코믹솔로지는 미국 만화출판사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의 작품을 스마트 기기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애플리케이션(앱)을 생산하고 콘텐트를 유통하는 업체다. 지난해 미국 만화 출판앱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일본만화를 수입해 디지털 콘텐트로 만들어 성공을 거둔 적도 있다. 8월 17일 개막한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코믹솔로지의 CEO 데이비드 스테인버거를 만났다. 그는 “좋은 콘텐트를 가진 한국만화를 발굴해 미국 시장에서 발간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천국제만화축제를 방문한 소감은.“한국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행사장 전반을 둘러보진 못했지만 만화 도서관은 인상적이다. 보관 서적이 25만 권이라는데 미국에는 이런 게 없다.”
한국 만화 출판업계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만화 시장은 어떤가?“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만화 출판업계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만화 시장이 확대되면서 조금씩 살아날 조짐이 보인다.”
종이만화의 현주소는 어떤가.“대부분의 만화 전문가가 종이만화는 사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종이만화는 생명력이 대단하다. 자체 조사 결과 독자의 20%는 종이만화를 아직도 원한다. 이들은 만화를 수집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이런 이유로 종이만화는 보다 질 좋고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소장가치를 높여야 한다.”
디지털 만화가 등장하면서 종이만화의 인기가 더욱 추락하진 않았나?“오히려 반대다. 디지털 만화가 인기를 끌자 만화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종이만화와 디지털 만화는 시너지를 일으키며 동반 성장하고 있다.”
많은 일본만화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만화도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일본만화도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유능한 번역 전문가를 동원해도 일본식 표현을 미국식으로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일본만화를 통칭하는 ‘망가’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스시나 사무라이 같은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만화는 쉽게 정착했다. 한국만화 콘텐트를 많이 접해 보지 않아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을 얘기하기 어렵다. 좋은 유통업체와 번역 전문가를 구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고객의 요구는 까다롭다. 시장 규모와 독자 취향을 제대로 파악해 대응할 수 있는 유통업체를 만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번역 전문가는 양국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적임자다.”
한국은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미국과 달리 돈을 내고 만화를 보는 토양이 부족하다. 대책이 없을까.“간단한 결제시스템을 만들고 적절한 가격을 책정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태블릿PC용 디지털 만화 가격이 1~5달러로 책정되면 종이만화의 가격도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코믹솔로지의 성공비결은 뭔가.“만화를 쉽게 볼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과 양질의 콘텐트다. 2007년 초 회사를 설립했을 때만 해도 80% 정도를 만화 보기에 적합한 앱을 만드는 데 매진했다. 나머지 20%를 콘텐트를 만드는 데 쏟았다. 덕분에 독자들은 종이만화를 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스마트 기기에서 느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기반을 잡고 나니까 사업이 쉽게 확장됐다. 현재 12만 권의 만화책이 코믹솔로지의 앱을 통해 소비된다. 최근 들어선 양질의 콘텐트를 확보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전체의 80%는 콘텐트 만드는 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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