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영화 속으로 - 중년 남자의 로망, 그리고 지질한 일상
Culture 영화 속으로 - 중년 남자의 로망, 그리고 지질한 일상
조폭의 카리스마, 충성을 다 바치는 부하, 까칠한 듯 귀여운 젊은 여자와 나누는 속 깊은 사랑, 총칼이 난무하는 액션, 따뜻한 남국에서 직접 낚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노후…. 남자라면, 특히 팍팍한 현실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중년 남자라면 한번쯤 꿈꿔볼 만한 인생 아닌가?
<푸른 소금> 에는 이런 남자의 로망이 다 들어 있다. 그것도 한껏 멋진 색조와 분위기로 ‘폼’나게. 조폭 후계자로 촉망받던 윤두헌(송강호)은 이제 건달 생활을 접고 어머니 고향인 바닷가 도시로 내려와 요리학원을 다니며 조용히 지낸다. 학원에서는 실수 연발의 어벙한 아저씨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몹시 쓸쓸해 보인다. 어느 날 그가 몸담았던 조직의 두목이 의문의 사고로 죽게 되자 후계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이 그에게 감시를 붙인다. 그 감시자는 같은 요리학원에 다니는 젊은 처자 조세빈(신세경)이다. 세빈은 뛰어난 사격 선수였으나 사고로 선수생활을 포기하고 건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산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상대로 전개된다. 감시자와 감시 당하는 자로 만난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정을 쌓지만, 조세빈은 윤두헌을 죽여야 하는 입장에 점점 내몰리게 된다. 갈등하는 세빈을 대신해 살인청부 조직의 여두목(윤여정)은 킬러 K(김민준)를 보내고, 윤두헌은 부하 ‘애꾸’(천정명)를 통해 세빈이 암살지령을 받은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세빈을 알뜰하게 돌본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후반부를 채우는데, 사실 스릴러의 긴박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액션이 화끈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뜨거운 정사신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건달과 마약, 총격, 액션, 스나이퍼, 살인청부업자에다 가죽점퍼를 걸치고 오토바이를 모는 섹시한 젊은 여자까지 등장하지만 딱히 무슨 장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영화는 이현승 감독의 말마따나 ‘복합장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포장이야 어떻든 이 영화의 속내는 사랑이고 감상이다. 그래서 수시로 흐르는 비장한 선율을 배경으로 “눈물로도 염전을 만들 수 있을까요?”라든지 “네가 끓여준 북엇국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네가 북엇국을 끓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라는 낯간지러운 대사가 심심찮게 등장하며, “너와 나의 차이점은 네겐 너 같은 친구가 없다는 거야” 또는 “세상에 중요한 금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소금, 둘째는 황금, 셋째는 지금” “바보야, 나를 쏘았어야지” 등 상투적인 멘트나 장면이 튀어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장면과 대사가 다소 부담스럽지만 송강호의 천연덕스런 연기에 힘입어 두 시간을 꽉 채우는 상영시간이 별반 지루하지는 않다. 또 쓸쓸한 남자의 내면은 푸른색으로, 나이 차를 뛰어넘는 두 남녀의 따뜻한 감정은 북엇국의 노란색으로 표현해 내는 등 스타일리스트 감독이 만들어낸 멋진 색감과 구도를 감상하는 재미도 적지 않다.
다만 이 영화를 볼 때 유의할 점이 있다. 사고를 당했다지만 저렇게 총을 잘 쏘는데 선수생활을 왜 포기했는데? 에이, 우리나라에 저런 총기류가? 암살범은 꼭 저렇게 긴 머리로 눈을 가려야 하나? 죽은 두목의 복수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더니 복수는 어디로 가고 연애만 하나?…. 이런 질문은 하면 안 된다. 그저 사랑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다는 것,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사랑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 이중적인 성격의 푸른 빛깔 소금 같은 사랑이라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푸른>
‘찌질’하다고? 그래도 괜찮아!이제 현실의 중년남자를 보자. 지방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는 감독 성준(유준상)은 오랜만에 서울을 찾는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얌전하고 조용하게 있다 가겠어.’ 그는 오직 선배(김상중)만 만나고 가겠다며 속으로 다짐한다.
그러나 도착한 첫날 혼자 마시러 들어간 술집에서 그를 알아본 영화학도들을 만나는 바람에 취하게 되고, 술 힘을 빌려 옛 애인(김보경) 집을 찾는다. “난 너 아니면 안 돼”라며 여자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인 그는 그날 밤 여자 곁에 머무는 데 성공하고, 다음날 여자 집을 나올 때는 “너만 행복하면 돼” “우리는 다시 만나면 안 돼”라는 말로 여자를 달랜다.
이제 북촌에서 선배를 만나고, 선배는 영화학과 교수인 보람(송선미)을 불러내 세 사람은 한정식집 ‘다정’에서 밥 먹고 ‘소설’이라는 카페에서 술을 마신다. 성준은 카페 여주인(김보경)이 옛 여자와 꼭 닮은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다음날은 베트남에서 사업하다 빈손으로 돌아온 왕년의 영화배우(김의성)까지 합석해 또 ‘다정’에서 밥 먹고 역시 ‘소설’에서 술을 마신다. 보람은 성준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표하고, 성준은 카페 여주인을 의식하고, 왕년의 영화배우는 예전에 성준이 쫀쫀하고 비겁했다고 타박하며, 선배는 분위기가 심각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익숙한 장면 아닌가? 사람들은 만날 가는 곳에 또 가고,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대화 내용조차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보람이 성준에게 “선생님은 너무 위엄이 있어요”라고 말하거나 카페 여주인이 성준과 키스한 뒤 갑자기 성준을 “오빠”라고 부를 때 관객은 웃고, 남자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우리는 다시 안 만나는 게 좋다’고 설득할 때면 관객은 실소를 흘리지만 그런 상황, 이런 등장인물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도 언젠가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아 웃으면서도 움찔한다.
성준이 북촌을 배회하다 우연히 동료감독, 영화음악가, 제작자, 아직 뜨지 못한 배우와 만나는 장면에서도 관객들은 낯을 붉힐지 모른다. 동료감독과 그는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며, 음악담당자는 감독인 성준을 아주 반갑게 대하지만 정작 성준은 그 음악담당자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 뜨지 못한 여배우에게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던 성준이 제작자를 만났을 때는 아주 반갑게, 성의를 다해 인사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거북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관객은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이 ‘찌질’해서 싫어하고, 여자관객은 영화 속 여자들이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워 싫어한다. 그의 영화는 냉정한 관찰자의 보고서나 내밀한 일기처럼 우리가 얼마나 볼품없고 얄팍한지, 그리고 얼마나 가식적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어 보고 나면 우리 자신의 치부를 본 듯 언짢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가 좀 변한 걸까? 등장인물은 여전히 한심하고 얄팍하지만 왠지 연민을 느끼게 하고 귀엽기도 하다. <북촌방향> 에서 성준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우연이나 별난 조화를 호들갑 떨며 분석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여전히 실수하지만 이제 자신의 실수를 웃으며 인정하는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성숙한 태도다. 그래서 성준은 더 젊고 신선해 보인다. 북촌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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