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연결...와인 한 잔에 담긴 의미 [와인인문학]
- 현대 기술로 빚어낸 욕망 결정체
취기를 넘어선 황홀한 경험 선사

와인에는 수천 년을 이어온 신화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황홀한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가 와인을 마시는 행위는 고대 신을 기리던 제의(祭儀)의 현대적 변주이며, 오늘날의 와인 마케팅은 그 오래된 신화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풍요·광기·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가 있다.
피와 눈물로 빚은 최초의 브랜드 스토리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여성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라의 질투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다시 태어나 '두 번 태어난 자'라는 의미가 있는 디오니소스는 탄생 서사부터가 이미 비극과 기적을 품고 있다. 박해를 피해 세상을 떠돌던 디오니소스는 가장 아끼던 동료 암펠로스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그의 피가 흐른 자리에서 최초의 포도나무가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이의 피와 눈물로 태어난 열매로 만든 와인은 죽음과 부활, 슬픔과 구원의 서사를 지닌 신의 선물이라는 강력한 '최초의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했다.
와인의 붉은빛은 생명의 피를, 그 취기는 신과의 합일을 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벌였던 축제 ‘바카날리아’(Bacchanalia)는 사회적 규범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춤과 음악, 와인에 취해 신과 하나가 되는 일종의 종교 의식이었다. 와인은 태생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심리, 즉 억압된 자아를 해방하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신성한 매개체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와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철학자들이 진리를 논하던 ‘심포지움’(Symposium)의 중심에는 항상 와인이 있었다. ‘함께’(Sym)와 ‘마신다'(posium)의 합성어인 심포지움은 원래 ‘밤새도록 마시는 와인 파티’였던 것이다. 연회의 주최자인 ‘심포시아르크’(Symposiarch)가 와인과 물의 희석 비율을 결정했는데 그는 그날의 분위기와 대화의 주제에 맞춰 취기의 강도를 조절하며 모임 전체를 지휘했다. 원액 그대로를 마시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로 치부됐기에, 와인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문명인의 세련된 교양과 절제를 증명하는 사회적 장치였던 셈이다.
로마의 거대한 와인 소비량은 로마 시내에 있는 ‘몬테 테스타치오’ 언덕이 증명한다. 이 언덕은 깨진 와인 항아리 ‘암포라’ 조각 수천만 개가 쌓여 만들어진 인공 언덕이다. 제국 전역에서 로마로 흘러 들어온 와인의 양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암포라 손잡이에는 생산지와 연도, 등급을 증명하는 인장이 찍혔다. 이는 품질과 브랜드를 식별하는 ‘레이블’ 역할을 했다. 이렇듯 고대 사회에서 와인은 종교적 성물이자 사교의 촉매제였다. 경제를 움직이는 화폐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신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와인에 불어넣은 신화적 유산은 현대 마케팅 전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현대의 와인 마케터들은 영리하게도 고대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첫째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강화’다. 칠레 와인 ‘1865’가 골프 애호가들 사이에서 ‘18홀을 65타에 친다’는 행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나 호주의 ‘19 크라임스’(19 Crimes)가 범죄자들의 이미지를 증강현실(AR) 레이블에 담아 와인에 반항적인 서사를 입힌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디오니소스 신화가 와인에 극적인 탄생과 구원의 스토리를 부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비자는 와인에 담긴 ‘이야기’를 구매하고 싶어 한다.
둘째 ‘럭셔리 이미지와 신비주의의 구축’이다. VIP 고객을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열고 귀한 와인을 선보이는 전략은 고대 심포지움의 현대적 재현이다. 와이너리들은 한정된 생산량, 어려운 접근성 그리고 제임스 서클링과 같은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가 부여한 높은 점수를 통해 신비주의를 구축한다. 보르도의 ‘앙 프리뫼르’(En Primeur)처럼 병에 담기기도 전에 선물(先物)로 거래되는 와인 시장은 이런 신비주의의 절정이다.
셋째 ‘떼루아(Terroir)라는 이름의 현대적 신화 창조’다. 토양 및 기후 등 포도밭의 자연환경을 의미하는 떼루아는 이제 과학적 용어를 넘어 마케팅의 핵심 신화가 됐다. 특정 지역의 흙과 햇빛이 포도에 특별한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믿음은 고대인들이 특정 영토를 신성시하며 그곳에서 난 산물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과 같다. ‘나파 밸리’나 ‘몽라쉐’라는 지명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가 되는 현상은 떼루아가 와인의 품질을 넘어 소비자의 심리적 만족감을 채우는 신화로 기능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소비자가 고가의 와인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유는 무엇일까. 와인은 구매해서 마셔 보기 전에는 맛과 풍미를 알 수 없는 대표적인 ‘경험재’다. 따라서 소비자는 레이블의 디자인·브랜드 스토리·원산지의 명성·가격표와 같은 외부적 단서인 ‘사회적 신호’에 크게 의존한다.
특별한 와인을 오픈하는 행위는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나의 안목과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작은 의식이 된다. 브랜드 스토리에 감화되고 떼루아의 신화를 음미하며 한 모금의 와인에서 역사를 느끼는 것. 이는 과거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이 광란의 축제를 통해 황홀경에 빠져들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와인의 가격표는 그 황홀경을 경험하는 데 필요한 입장료인 셈이다.
오늘날 비즈니스 테이블에 오른 한 병의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의 신화를 품고 현대의 기술로 빚어낸 욕망의 결정체다. 와인 마케터들은 디오니소스의 후예들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취기를 넘어선 황홀한 ‘경험’을 팔고 있다. 우리가 마실 다음 와인잔에는 과연 어떤 신화가 담겨 있을지 한 번쯤 음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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