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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으로 <도가니> - 성폭행보다 더 무서운 사회부조리

영화 속으로 <도가니> - 성폭행보다 더 무서운 사회부조리

‘도가니’ 포스터에 적힌 문구처럼 이 영화는 ‘알리기 위한’ 영화다. 주연을 맡은 공유는 소설 『도가니』를 읽고 영화로 만들자고 결심해 마침내 결실을 거뒀다.

영화 ‘도가니’를 본 사람들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특히 원작인 소설을 읽지 않고 본다면 충격과 분노, 당혹감을 더 심하게 느끼게 될 터다. 소설과 영화 속 등장인물도,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도 “어떻게 이럴 수가!” “도대체 상식이라는 게 없는 세상!”이라고 통탄한다. 관객들 분통이 터지는 것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보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가상의 이야기라면, 비록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지구가 멸망하고 외계인이 침략하고 세계대전 같은 더 심각한 사건이 터져도, 또 끔찍한 살인과 학살이 일어나도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미나게 잘만 본다.

이 영화의 실제 배경이 된 2005년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은 이미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로도 많이 읽혔으므로 영화의 줄거리는 굳이 스포일러를 조심할 필요도 없이 만천하에 공개돼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가상의 인물 강인호(공유)와 함께 우리는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사건의 내막을 하나 둘씩 알아가면서 끔찍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중년의 가장인 강인호는 밥벌이를 위해 지방도시인 무진으로 내려와 청각장애아 특수학교인 자애학원에 교사로 취직한다. 그것도 학교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거금 5000만원을 내고 잡은 일자리다. 자애학원은 설립자의 아들 이강석(장광)이 교장이고, 쌍둥이 동생이 행정실장이며, 설립자의 수양딸이자 교장의 연인이라는 윤자애(김주령)가 생활지도 교사로 있다. 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과 인척으로 이루어진 운영진에다 장애아학교라 더욱 폐쇄적인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강인호가 눈치 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정착하려고 노력하는 강인호지만 아이들을 학대하는 현실에 눈감을 수 없어 결국 학교에 맞서 싸우는 입장이 되고 만다. 영특한 연두, 지적장애를 겸한 유리, 늘 박 선생에게 맞는 민수가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온 것을 알게 된 강인호는 무진 인권센터에서 일하는 서유진(정유미)과 함께 이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법정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사회구조와 싸우는 게 더 힘들어교장과 행정실장 쌍둥이형제와 박보현 교사가 체포되는 걸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단지 끔찍한 성폭행 사건을 우리에게 고발하는 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짜로 흥미롭게 전개되는 것은 가해자들이 체포된 이후부터다. 자애학원에서 정기적으로 용돈을 타온 장형사(엄효섭)의 조언대로 가해자 측은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판사 출신 변호사를 물색하고, 검사와 강인호에게 달콤한 미끼를 던지는 한편, 피해자 아이들 가족을 찾아가 합의서를 받아내려고 한다.

이제 영화는 성폭행이라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와 벌이는 싸움을 다루게 된다. 실상 이 영화가 끔찍한 것은, 이 사회구조가 몇몇 개인 힘으로 깨뜨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순진한 아이들은 가해자들이 집행유예로 다시 세상을 활보하게 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민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민수 이야기와 강인호의 마지막 선택은 소설 『도가니』와 다르다. 소설은 안개가 자욱한 무진이라는 가상도시를 김승호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따왔고, 강인호의 선택 역시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무진에서 겪는 불편한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강인호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또 아내는 죽은 걸로 처리하고 애 딸린 이혼녀 서유진도 상큼한 처녀로 캐릭터를 바꾸는 등 소설의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배경묘사를 생략해 영화로서 집중도를 높인 것이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다.

또한 시종 침울한 색조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요소요소 작은 사건을 집어넣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소설에서 강인호는 어두운 과거에 발목 잡히지만 영화에서 강인호는 달콤하면서도 더러운 제안을 받는다. 이 사회의 부조리를 돋보이게 하고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도록 각본을 꾸민 감독의 센스가 뛰어나다.

그러나 허점도 눈에 띈다.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는 데 초점을 맞춘 탓인지, 등장인물이 착한 편과 나쁜 편으로 갈리고 그 가운데 아무도 의미 있는 변화를 겪지 않으므로 감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원작 소설 역시 선인 대 악인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악당 묘사는 영화 쪽이 훨씬 리얼하다. 쌍둥이라는 상황을 매우 그로테스크하게 처리했고 악당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 관객의 분노를 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나쁜 편 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 있는 데 반해 착한 편의 캐릭터가 약한 게 흠이다. 여주인공 서유진은 너무 가벼워 보이고 개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강인호의 어머니 역을 맡은 김지영은 짧은 출현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변화를 보여주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일 아쉬운 점은 피해자인 아이들의 상황이 매우 피상적으로 묘사된 점이다. 김현수, 백승환 등 세 아역배우의 연기력에 힘입어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은 충분히 강조되지만, 그런 상황을 오래 겪은 이들이 보이는 혼란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는 순수하고, 다른 아이들은 안쓰럽긴 해도 꿋꿋하고 현명하기까지 하다. 관객 입장에서야 마음 편하지만, 아이들이 참 잘 극복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큰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실제 사건 다시 조사하라는 탄원 이어져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올해 초 개봉된 외화 ‘그을린 사랑’과 ‘비밀의 눈동자’ ‘인 어 베러 월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 세 영화는 각각 전쟁과 성폭력 살인사건, 그리고 폭력과 복수 과정에서 벌어지는 피해자와 가해자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는데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이끌어냈다. 입양아의 실제 현실을 담은 영화 ‘마이 파더’를 연출했던 황동혁 감독은 ‘도가니’를 만들 때 ‘등장인물은 우는데 관객은 울지 않는’ 상황을 피하고자 등장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데 주력했다고 하는데, 반쯤만 성공한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인호는 물대포를 맞으며 그동안 참아온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버리고 만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가해자가 세 사람, 피해자도 세 명이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형법상 공소시효가 지난 것까지 합해 가해자가 무려 여섯 명에다 피해자는 열두 명이라고 한다. 이 영화에 힘입어 인화학교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 있으니 과연 영화의 힘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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