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ST] 김소영 치즈명장 - 미국 최고 셰프도 5~6년 기다려야 내 치즈 받는다
[SPECIALIST] 김소영 치즈명장 - 미국 최고 셰프도 5~6년 기다려야 내 치즈 받는다
세계적인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하려면 최소한 두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미슐랭 스타 셰프들을 줄 세운 한국 여성이 있다. 바로 미국 최고의 치즈 명장 소영 스칸란(Soyoung Scanlan).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미국 최고의 셰프 토마스 켈러의 파트너로 함께 방한한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제가 원래 인터뷰를 안 해요.”
작은 몸집에 목소리도 들릴 듯 말 듯 느리다. 하지만 눈빛은 또렷하고 강했다. 그녀는 인터뷰하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낯설어 미국 언론의 취재 요청도 거절해왔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좀 괴짜죠.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해 보여요. 외골수로 오랜 시간 하나만 파고 겸손해야 인정받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서일 거에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겸손함이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 그녀도 치즈 얘기가 나오자 돌변했다. 얼마나 치즈를 사랑하는지 느껴졌다. 7살 된 딸 제이미는 엄마를 보고 “엄마는 다 치즈로 보이지?”라고 쏘아붙이곤 한다.
“13년간 고집스럽게 치즈만 만들었어요. 쉬지 않았죠. 치즈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15시간 이상 떨어지면 안돼요. 지속적으로 곁에서 보살펴줘야 하죠. 이번 방한을 위해 치즈를 다 처분하고 치즈공방 문을 닫아놓고 왔어요.”
휴일도 없이 일주일에 80시간 일해
그녀는 원래 한국에서 촉망 받는 과학자였다. 연세대 공대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카이스트(KAIST)에서 생물공학을 전공했다. 연세대 세브란스 암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정말로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 못했죠. 26살 되던 해 보스턴에 간지 2주 만에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인생의 격변기였죠. 정말 내가 원하는 걸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손과 오감을 이용한 일을 하고 싶었죠.”
처음에 빵을 만들까, 와인을 만들까 고민했던 그녀는 프랑스 여행 후 결심했다. 그 곳에서 맛본 치즈는 놀라웠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단다. 그 길로 미국에 돌아와 칼 폴리 대학에서 2년간 낙농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학업을 마친 후 99년 캘리포니아의 목장주들을 도우면서 치즈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치즈공방 ‘안단테 데어리(Andante Dairy)’를 창업한 것도 이 때다.
“사랑에 빠지면 그냥 좋으니까 하잖아요. 연습 삼아 치즈를 만들다가 스페셜티 스토어나 고메 스토어에 샘플을 들고 찾아간 적이 있어요. 한 셰프가 먹어보고 전화를 걸어 왔고 친구인 토마스 켈러를 소개해줬죠. 토마스는 당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레스토랑 ‘프렌치 런드리’의 오너 셰프였어요. 그는 불 같은 사람이라 먹어보고 맘에 안 들면 뱉는다고 악명이 높았죠. 하지만 나에게는 참 잘해줬어요. 제 첫 고객이 됐죠. 우리는 함께 성장했어요.”
13년의 세월을 거쳐 토마스는 미국 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3개나 거느린 거물이 됐고, 그녀 또한 미국 최고의 치즈장인이 됐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최고급 레스토랑 중 그녀의 치즈를 사용하는 곳이 많다. 특히 부촌이 밀집해있는 Bay Area(샌프란시스코·실리콘 밸리·나파밸리 등)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대부분 안단테 데어리에서 치즈를 받는다.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쿠아(Coi), 1스타인 쎄종(Sassion), 2스타 싸이러스(Coirus), 토마스 켈러의 부숑과 퍼세 등이 그녀의 클라이언트다. 일주일 생산량은 100kg 정도. 치즈를 만드는 전 과정을 혼자서 하기 때문에 물량이 달릴 수 밖에 없고 웨이팅 리스트는 쌓여갔다.
“생산량이 많지 않아 보통 웨이팅 리스트에서 5~6년 대기해요. 셰프들은 치즈를 받기 위해 저를 식사에 초대하죠. 저는 셰프를 직접 만나보고 음식을 먹어본 후 마음에 들어야 파트너를 맺거든요. 셰프가 싫으면 제아무리 유명한 레스토랑일지라도 치즈를 주지 않죠. 치즈를 써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치즈에 조예가 깊은지 알 수 있어요. 최고로 많이 기다린 사람은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그래머시 태번(Gramercy Tavern)의 셰프였고, 그는 최근 치즈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소영 스칸란의 치즈가 최고 대우를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워커 홀릭을 넘어서 치즈가 곧 삶이다. 치즈 메이킹을 시작한 후 8년간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3시 반에 우유를 짰다. 휴일도 없이 일주일에 80시간을 일했다. 이제는 60시간 이상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후계자를 찾지 못해 여전히 혼자 모든 걸 다한다.
“치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얼마 못 버텨요. 보통 사흘 안에 떠나고, 최장기간 버틴 사람이 일주일이죠. 치즈를 만드는 것은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라서 적어도 1년을 배워야 하고 계절의 변화와 우유의 상태 등을 민감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위크엔드는 상상할 수 없죠. ‘주말 휴일이 없냐’고 물어오는 직원에게 ‘주말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거라는 걸 모르니?’라고 말해주죠. 대부분 멍해지면서 곧 떠납니다. 치즈를 만들 때는 항상 깨어있어야 해요. 생각 없이 일하는 거 못 봅니다.”
한식 요리책과 치즈 레퍼런스 북 만들 터그녀는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항상 행복하다. 매번 똑같은 시간에 안단테 데어리가 소유한 농장에서 밀크 머신으로 직접 염소 젖을 짜내고, 일주일에 세 번 신선한 우유(양젖과 소젖)를 50kg들이 밀크 캔에 가져온다.
“일을 하려고 신선한 우유를 큰 그릇에 담으면 아직도 가슴이 뛰어요. 13년간 매일 백만 번쯤 해왔지만 치즈를 만지고 있으면 행복하죠. 이외의 일은 관심 없어요. 수공업 해서 큰 돈은 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힘들지 않아요.”
그녀의 치즈 중에는 ‘치즈 종주국’ 프랑스에서 들여와 숙성만 시키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치즈를 숙성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배울 수 있어요. 치즈 자체는 물론 다른 치즈장인의 생각이나 숙련도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죠. 내 치즈를 만드는 과정이 독주(獨奏) 같다면, 숙성 작업은 작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연주하는 셈이죠.”
그녀는 숙성을 위한 치즈도 까다롭게 선택한다. 초창기 치즈 메이킹을 배우기 위해 찾았던 프랑스 치즈 공방의 치즈만 사용한다. 그 곳 치즈 메이커들과 같이 일해봐 잘 알기 때문에 믿고 받는 것이다.
“프랑스 치즈장인들은 ‘미국에서 치즈를 만들다니 힘들겠다’고 말해요. 미국인들이 아직 진정한 치즈를 잘 모르기 때문이죠. 프랑스에서 치즈 메이커로 활동하면서 치즈와 와인을 대접받고는 미국 치즈가 바닥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지금 제가 더 열심히 연구하고 일하는 이유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 잘하는 그녀는 요리도 즐긴다. 그녀의 미국 친구들이 요리를 맛보고는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질 정도다.
“미국에서 한국 요리의 위상이 올라가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책이 없어 곤란한 때가 허다했죠. 그래서 한국 요리책을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에요. 또 한국에서도 치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치즈에 관한 책은 거의 없더군요. 치즈에 대한 한국어 레퍼런스 북을 만들고 싶어요.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서 일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문화가 먼저 형성돼야겠죠.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녀는 치즈공방 간판을 ‘안단테(걸음걸이 빠르기, 천천히라는 음악 용어)’로 지을 만큼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다.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그녀는 한 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을 정도다.
“음식과 음악은 닮았어요. 식재료나 오선지 등 무엇을 가지고 시작해도 음식과 음악으로 만들어지면 사람들 기억 속에만 남을 뿐 곧 사라지죠. 먹고 듣고 영향을 주고 기쁨을 준다는 점도 통해요. 어제 신라호텔의 디너가 끝난 뒤 토마스 켈러 셰프에게 말했죠. ‘사람들이 먹고 일어나는 것을 위해 이렇게 애쓰는 것이 우리에게 패러독스 같지 않아?’ 토마스도 동의하며 활짝 웃더군요.”
과학자의 지식과 날카로움, 요리사의 감성, 음악가의 섬세함이 버무려진 그녀의 치즈는 오늘도 안단테의 속도로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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