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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디자인이 아름답다

실용적인 디자인이 아름답다



사람들은 미래의 집이 어떤 모습일지 안다고 생각해 왔다. SF 영화 등을 통해 거의 100년 동안이나 그 이미지를 봐 왔기 때문이다. 매끈한 선과 길게 잡아 늘인 듯한 비정형적인 형태, 날카로운 각도, 강철과 플라스틱, 유리 등 반짝이는 표면. ‘벅 로저스’ ‘젯슨 가족’ ‘스타 트렉’ 등 TV 시리즈와 뱅&올루프슨(오디오·비디오 업체)의 광고를 통해 친숙해진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우리는 그 미래에 도달했지만 현재 우리 주변의 모습은 과거에 상상하던 미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여기 소개되는 디자이너들을 포함해 소수의 젊은 디자이너는 이런 현상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여전히 ‘미래의(futuristic)’ 형태라고 믿는 그 이미지를 뛰어넘어 아이디어로 가득 찬 작품을 제작한다. 램프 안에 갇힌 나방의 비행곡선을 연상케 하는 램프 갓, 할머니의 뜨개질 레이스 패턴을 모방한 체인-링크 펜스(chain-link fence, 굵은 철사를 엮어 만든 울타리) 등. 이 레이스 울타리를 디자인한 네덜란드의 유프 베르후번은 정말 현대적인 의자라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겉보기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어 “그 위에 앉는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바젤 디자인 페어’의 감독 마리안 괴블은 전시회를 통해 “현대적인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현대적 디자인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바우하우스, 임즈 등의 대표적 디자인뿐 아니라 ‘가구는 단순히 보기에 좋은 것’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이들이 만든 의자는 뭔가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앉아 보고 싶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Musical Ch airs-‘리믹스’ 가구힙합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는 디자이너는 많아도 힙합의 원칙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하는 디자이너는 마티노 갬퍼(40)뿐일 듯하다. 갬퍼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가구에서 뜯어낸 부분들을 모아 작품을 제작한다. “뮤지션들이 음악을 샘플링하는 방식”과 흡사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대표작은 2007년 처음 선보인 ‘100일 동안 만든 100개의 의자’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그는 엄청난 양의 중고가구를 사 모았다. 그리고 그 가구들을 해체한 다음 여기저기서 한 부분씩 모아 새로운 의자를 제작했다. 한 작품을 24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갬퍼가 이 혁신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2001년이었다. 당시 그는 룸메이트이자 동료 디자이너 라이너 슈펠과 함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를 구하러 다녔다. “우린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쓰다 버린 가구를 주워 왔다. 두 사람 다 디자이너이다 보니 자연히 그것들을 이용해 새로운 뭔가를 만들게 됐다.”

그들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주최하는 장식미술 야외 전시회에 출품할 기회를 얻었을 때 그 아이디어를 살려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다. 전시회 현장에서 중고 테이블과 의자를 이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각각의 중고 가구에서 어떤 부분들을 이용할지 관람객들이 선택하도록 했다”고 갬퍼는 회상했다. “우린 그것들을 이용해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소비 사이클에서 벗어난 뭔가를 이용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정치적 의미”도 지녔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가 이용하는 중고 가구들의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밀라노에 있는 갬퍼의 갤러리 ‘닐루파르’는 이탈리아 현대 건축가 겸 산업 디자이너 지오 폰티가 제작한 가구들을 작품 재료로 구입했다.

갬퍼는 자신의 “리믹스” 작업이 현대 디자인 선구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이 ‘디자인을 이용한 유토피아 건설’을 꿈꾼 그들의 비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고 디자인하는게 아니라 그저 과거와 함께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Ch ain-Link Lace-철사로 뜬 레이스 울타리디자인 회사 ‘더마커스반’의 젊은 창업주 3명은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외모와 찰스 임스 부부 못지 않은 천재성을 뽐낸다. 유프와 예룬 베르후번(35)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로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멋진 광대뼈를 지닌 금발의 훈남이다. 또 유디트 더 흐라우(36)는 오드리 토투를 쏙 빼닮은 매력적인 여성이다. 이들은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멋진 작품을 제작해 팔기 시작했다.

유프는 지금까지 이 회사의 가장 유명한 성공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제작했다. 뜨개질 레이스의 패턴을 이용한 굵은 철사 울타리다. 유프는 이 작품을 “놀라움을 곁들인 체인-링크 펜스”라고 묘사한다. 한 건축가가 시제품을 보고 대량으로 주문하는 바람에 대학을 갓 졸업한 이 3인방은 인도 방갈로르에 서둘러 공장을 세웠다. 유프는 인도에 2년 이상 살면서 이 벤처 업체의 기초를 다졌다.

예룬도 학생 시절의 프로젝트 ‘신데렐라 테이블’로 유프와 거의 맞먹는 성공을 거뒀다. 두 앤티크 테이블의 측면 형태를 합성해 매우 복잡한 현대적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재단된 57장의 얇은 판을 붙여 만드는 이 작품엔 첨단 디지털 기술이 동원됐으며 비용도 만만찮게 들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가서 집집마다 벨을 눌러가며 지원을 요청했다”고 예룬은 말했다.

더 흐라우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졸업 작품으로 관심을 모았다. 그녀가 디자인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네덜란드의 마지막 구두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녀는 그 일을 기념하는 의미로 구두 수선공의 기술을 바탕으로 가죽 의자를 디자인했다. 이 작품은 레이스 울타리, 신데렐라 테이블과 함께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됐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지 7년이 된 이들 3인방은 자신들이 초기의 훌륭한 작품에서 보여줬던 획기적인 효과를 다시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들의 최근 작품 중엔 꼭대기에 회전날개가 달린 풍력발전식 테라스 램프와 태양전지판을 잘라 만든 푸른색 나비들이 하늘거리는 자동충전식 샹들리에가 있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게 좋다”고 유프는 말했다.



From Scribble to Table-허공 드로잉이 바로 제품으로구식 교육은 때때로 학생들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도록 영감을 주기도 한다. 스웨덴의 급진적인 디자인 회사 ‘프론트’를 설립한 세 여성의 경우가 그랬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콘스트팍 디자인 대학에서 만났다. 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을 중시하는 ‘철저한 산업 디자인’ 학교였다. 프론트의 창업주 중 한 명인 샤를로트 폰 데어 랑켄은 “어떤 형태의 채택 여부를 결정할 때 언제나 기능을 기준으로 했다”고 말했다.

프론트의 또 다른 창업주 안나 린드그렌은 자신들이 그런 교육에 반발해 “기능과 관련된 실질적인 질문만 빼고 모든 것”을 탐험하게 됐다고 말했다(프론트의 세 번째 멤버는 소피아 라예르크비스트다). 폰 데어 랑켄에 따르면 이들의 목표는 물체를 통한 의사소통의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디자인 과정에서 여러가지 실험을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을 왜 하는지를 늘 생각한다. 저렴한 의자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가 필요하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실험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2005년 시작됐다. 프론트의 멤버들은 전통적인 현대 디자인의 힘든 과정을 거부했다. 수시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냅킨 뒷면에 스케치해 두었다가 드로잉과 설계도 작업을 거쳐 시제품을 만들고 본격적인 생산을 위한 장비설치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이다. 그들은 이 같은 과정을 확 줄여 허공에 끄적거린 스케치에서 바로 최종 제품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영화의 모션 캡처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이 허공에 가구의 3D 스케치를 실물 크기로 “그리는” 동작을 기록했다. 그런 다음 그 ‘허공 드로잉(air drawing)’을 3D 프린터에 입력하면 의자, 테이블, 램프 등 합성수지(resin) 제품이 실물로 출력된다. 마치 흰색 접착제를 짜내 형태를 만든 다음 굳힌 듯한 모습이다. 평범한 가구라기보다는 가구의 플라토닉한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주 실용적”이라고 폰 데어 랑켄은 주장한다.

이들의 가장 최근 프로젝트는 기존의 어떤 제품보다도 수명이 짧은 램프 갓이다. LED 전구 주변에 비누 방울 갓이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고 또 다른 비누 방울갓이 생기는 방식이다.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램프 갓’을 채택해 수십 년에 이르는 LED 전구의 긴 수명을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다.



Go Toward th e Light-테크놀로지에 영혼을 불어넣다스코틀랜드의 디자이너 조프 만(32)은 모션 캡처 장비부터 3D 레이저 스캐너, 시제품을 “찍어내는” 쾌속조형모형(rapid prototyper)까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작업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 자체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는 “테크놀로지에 영혼을 깃들일 때 재미있는 작업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2005년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미술학석사(MFA) 학위 취득 당시 전시회에 출품했던 램프다. 그는자신이 “동작과 실체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런 관심의 결과물 중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이 ‘어트랙티드 투 라이트(Attracted to Light)’다. 만은 평범한 조명 기구 안에 갇힌 나방의 비행 경로를 캡처한 다음 쾌속조형모형을 이용해 그 여러 겹의 곡선 모형을 플라스틱 리본 형태로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전구 둘레에 씌워 램프로 만들었다.

만은 오늘날의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사물의 물리적 실체에만 관심을 집중할 때 무시하게 되는 속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날아가는 곤충을 바라보면서 그 비행 궤도는 눈여겨 보지 않는다. 또 매끈한 표면을 보면서 그 반사 효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만은 자신의 작품 ‘샤인(Shine)’에서 그 반사 효과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은 촛대를 3D 스캐너로 스캔했다. 스캐너는 촛대의 진짜 표면과 거기서 나오는 레이저의 반사로 생기는 못처럼 뾰족한 빛줄기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촛대를 매끈한 면과 뾰족한 빛줄기들이 합쳐진 희한한 형태로 읽어낸다. 만은 이 디지털 파일을 3D 프린터에 입력해 새로운 촛대(위 사진)를 만들어냈다. 원래의 촛대와 같은 형태지만 표면에 바늘처럼 뾰족한 가시들이 잔뜩 솟아 있다. “난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는다”고 만은 말한다. “다만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 형체를 부여할 방법을 찾을 뿐이다.” 그는 심지어 분노와 고뇌까지 형상화했다.

만이 제작한 ‘크로스파이어(Crossfire)’라는 제목의 비디오 작품이 지난해 MoMA에서 전시됐다. 영화에서 가시돋친 말다툼 소리가 흘러나오자 식탁 위에 놓인 크리스털과 도자기 그릇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만은 비디오에서 컴퓨터 애니메이션 효과로 일그러뜨린 그 그릇들을 실제 도자기와 유리로 제작했다.



The Pillow as Companion-연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베개이탈리아 의사의 딸 프란체스카 란차베키아(29)와 말레이시아 엔지니어의 아들 훈 와이(32)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디자인 아카데미 대학원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회사 ‘란차베키아+와이’에서 만든 최고의 제품 중 일부가 첨단 디자인에서는 보기 드물게 낭만적인 측면을 지닌 이유가 그 때문일까? 이 회사에서 나온 ‘라이트메이트(Lightmate)’는 사람 몸 크기의 베개다.

구름과 물웅덩이 등 다양한 형태의 이 베개들은 껴안으면 은은한 빛과 따뜻한 열기를 발산한다. 란차베키아가 학생 시절 프로젝트로 처음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네덜란드에 막 도착해 “의기소침하고 외로웠던”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고, 연인이 곁에 없을 때 그 빈자리를 채워줄 프로젝트”를 원했다.

졸업 후 로맨스를 동업 관계로 발전시킨 이들은 여전히 “사람의 몸과 마음에 친밀하게 느껴지는” 물건들을 만들고자 한다. 현재란차베키아는 밀라노 근처의 파비아에서, 와이는 싱가포르에서 일한다. 와이는 “차가운” 물건의 예로 아이폰을 들었다. 아이폰은 기본적으로 멋진 디자인으로 장식한 전자부품 상자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했다. 란차베키아는 “그 완벽성과 차가운 금속성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란차베키아는 2008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자신과 와이가 “물건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디자인을 추구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만드는 물건은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것들보다 더 훌륭해야(더 진심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제품이 얼마나 팔리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최근 한 프로젝트에서는 노인들을 위해 바퀴 달린 지팡이를 제작했다. 멋진 바구니나 차 쟁반, 아이패드 받침대로도 쓸 수 있게 디자인된 제품이다. 와이는 디자인업계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노인차별 문제를 부각시키고 “의료용품과 가정용품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말했다. 와이는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신제품에 “하나의 메시지를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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