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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는 소통의 도구

가구는 소통의 도구



가구 디자이너 배세화(33) 씨를 만나기로 한 날은 올해 더위가 최고점에 올랐던 8월 초순이었다. 일산에 있다는 그의 작업실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또 십여 분을 더 걸어야 했다.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 땀에 흠뻑 젖은 여정이 상상을 부추겼기 때문이었을까? 젊고 유망한 디자이너의 작업실은 잔디가 깔린 앞마당에서 개가 뛰어 노는, 그런 한적한 풍경 속의 그림 같은 곳이리라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작업실은 컨테이너와 가건물들이 밀집한 공장지대 한 켠의 거대 컨테이너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목재가 겹겹이 쌓여 있고 공구와 기계들이 즐비했다. 그 안에서 뛰어 놀던 애완견 한 마리만이 내 상상과 맞아 떨어졌다. 갤러리서미 전속 디자이너인 배세화 씨는 한국 가구 디자인계의 샛별이다.

2007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가구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그는 2008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디자이너부문 인기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 일본의 ‘아사히카와 국제가구 디자인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으며 해외 무대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세계적인 디자인 전시회 ‘디자인 마이애미 2010’에도 출품한 데 이어 지난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바젤 디자인 페어’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 한 점당 수천 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큰 인기다. 만드는 족족 팔려 국내 전시가 힘들 정도다. 미국의 문화예술 전문지 ‘아이즈인(Eyes In)’의 편집장 비비안 반 다이크는 배 씨의 가구를 소개하며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능적”이라고 평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공장단지 내에 작업실을 둔 이유는 뭘까? 배 씨는 “목재를 가공할 때 시끄럽기 때문에 주택가 인근에서는 작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목재를 가공하다니? 디자이너들은 본래 디자인만 하지 않나? “최근 젊은 작가들 중 제작까지 손수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갤러리서미의 정승진 실장은 말했다. 하지만 “손으로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게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배 씨는 수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가 디자인한 제품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게 이 일의 매력이죠.” 그는 심지어 작업을 돕는 어시스트조차 고용하지 않는다. “몇 번 고용한 적이 있지만 결국 다 내보냈어요. 남이 한건 결국 제가 다시 하게 되더라고요. 작품 물량이 적더라도 혼자 해야 더 편해요.” 그가 수작업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자인 철학이다. “가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가구를 보면서 작가가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가구를 만들고 싶어요. 제가 따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단지 제 작품을 통해서 사람들이 생각에 잠기고 명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장에서 제작된 가구로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스팀 벤딩’ 기법은 손이 많이 간다. 나무를 얇 게 켜서 3~4시간 스팀을 쬔 뒤 구부려서 형태를 만든다. 이렇게 구부러진 나무들을 수백 겹붙여 하나의 가구를 완성하는 데는 하루 13시간씩 6~7주가 걸린다. 대량생산을 하지 못해 디자인 하나 당 6개만 한정 제작한다. 지난해 호두나무로 제작한 ‘스팀20’는 이미 5개가 팔리고 하나만 남았다.

그는 직접 가구를 만들면서 그 속에 이야기를 담는다. 중간이 부풀어 오른 형상인 벤치 ‘스팀1’은 “태아와 어머니”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뭔가를 소중하게 안는다는 느낌을 담았다. 스팀시리즈의 10번째 연작인 ‘스팀10’에서는 태어난 아기를 눕힐 수 있도록 가운데가 폭 꺼진 포근한 자리를 만들었다. 가장 최근작인 ‘스팀20’은 2인용 벤치인데 각 자리의 높낮이가 다르다. “초등학생 아이와 어머니가 함께 앉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배 씨는 말했다.

이쯤 되니 그의 작품이 가구인지 조각예술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분명 가구다. 그는 디자인 단계부터 기능적인 면을 먼저 생각한다. 제작할 때는 등판이 어디쯤 위치해야 더 편한지, 높낮이는 어느 정도로 해야 좋은지를 미리 생각하면서 디자인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작품을 낼 때마다 개량을 거듭해 기능성을 높인다.

그가 가구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무게감’이다. 기능성과 조형미를 다 갖췄으면서도 거추장스럽지 않고 단순화됐을 때 그는 “무게감이 있다”고 말한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색을 드러내는 디자인이죠. 비유하자면 말수는 적어도 뭔가가 우러나오는 사람처럼요.” 가벼운 가구는 금방 질리는 데 반해 무게감이 있는 가구는 일년 내내 쳐다봐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고 그는 말했다.

‘무게감 있는 가구’에는 배 씨의 성격이 많이 반영됐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정승진 실장은 “다른 작가들은 작품이 많이 팔리고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 좋아하는데 세화 씨는 그렇지 않다”며 인기 디자이너답지 않게 수수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배 씨는 “행사나 전시회 등 외부 노출을 즐기는 작가들의 작품은 화려하고 강한 인상을 주지만 나 같이 숨어 있기 좋아하고 조용한 사람은 작품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풍긴다”고 말했다.

가구 디자이너인 그의 집엔 가구가 전혀 없단다. “본업이 디자이너라서 그런지 가구를 사려고 인터넷을 보다 보면 점점 욕심이 생겨요. 처음에는 저렴한 가구를 보다가도 점점 더 좋은 가구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끝도 없이 가격이 올라가죠. 차라리 내가 디자인해서 외부에 제작을 맡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그것도 가격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만들지도, 사지도 못하고 있다가 그냥 가구가 없는 집에 익숙해졌죠.”

그에게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야망은 없다. “그냥 항상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제가 재미있고 즐거워야 결과물에 그 즐거운 마음이 들어가서 만족스럽게 나와요. 힘들고 지겨우면 당연히 그게 작품에서 표현이 되죠.” 그래서 바쁘더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작업실 의자에 앉아서 TV를 보며 기분전환을 한다. “사람들이 소소하게 저를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걸로 충분해요. 언젠가는 시골에 목공소를 하나 차릴 거예요. 동네 사람들 가구고쳐주고 밥 한 그릇 얻어 먹으면서 서로 나눠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가능하면 1년에 작품 한두 개씩 쉬엄쉬엄 만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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