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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Refugees - 스파이를 사랑한 댄서

Political Refugees - 스파이를 사랑한 댄서

2006년 러시아 첩보원 출신 망명자 리트비넨코가 런던에서 독살됐다. 그의 미망인은 푸틴 지시라며 법의 심판을 원한다


“남편은 살해됐다. 푸틴이 지시했다고 생각한다. 난 정의 구현을 원한다.” 마리나 리트비넨코가 말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우리는 런던의 간이식당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많은 사람이 막바지 쇼핑을 한 뒤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안고 빗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마리나의 남편 알렉산드르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 출신이었다. 마리나와 알렉산드르는 2000년 런던에서 정치 망명(political asylum)을 신청했다. 알렉산드르는 옛 상관이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판했다. 또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KGB의 후신)이 모스크바의 아파트를 폭파하고는 체첸 반군 소행으로 몰아붙여 체첸을 침공했으며, 폭력단 갈취행위(protection rackets)와 국제 마약조직을 배후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영국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리트비넨코의 미망인 마리나가 말했다.

2006년 11월 1일 저녁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외출했다가 돌아온 뒤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구토가 멈추지 않았다. 마리나는 화장실에서 그의 구토물을 치우느라 고생했다. “사흘 동안 계속 걸레질했다. 남편이 그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중독일까(Could he have been poisoned)?

“의사들이 왔을 때 우린 정치 망명자이며 암살 기도일지 모른다고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마치 정신이상자라도 되는 듯이 쳐다봤다.” 마리나가 알렉산드르의 머리를 어루만지자 머리카락이 뭉텅 빠졌다. 그는 말할 힘조차 없었다. 피부가 누렇게 뜨면서 쪼글쪼글해졌다. 중독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슨 독일까(But by what)?

“의사들은 온갖 검사를 다했다. 늘 그들은 원인과 해독제(antidote)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희망을 가졌지만 매번 오진이었다.” 그런 상태로 3주가 지난 뒤 독극물 전문가들은 마침내 알렉산드르에게 독성 강한 방사성 물질 폴로늄(polonium)-210 반응 을 검사했다. 양성이었다. 폴로늄-210은 주로 원자로에서 매년 소량 생산되며 97%가 러시아에서 나온다. 완벽한 암살(perfect hit)이 될 뻔했다. 폴로늄에 중독되면 대개 사흘 안에 목숨을 잃고 대부분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의문사로 처리된다.

알렉산드르는 서서히 생명의 빛을 잃어가면서도 푸틴에게 공개편지(open letter)를 썼다. 푸틴이 자신을 살해했다는 고발장이었다. 마리나는 질겁했다. “난 남편이 회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죽음의 편지를 왜 쓰나하고 생각했다.”

다음날 알렉산드르는 숨을 거뒀다. 런던 경찰은 폴로늄의 출처를 추적했다. 알렉산드르가 런던 메이페어 구역의 밀레니엄 호텔에서 다른 전직 KGB 요원 안드레이 루고 보이와 만나면서 마신 찻잔에 폴로늄이 들어 있었다. 루고보이가 모스크바에서 런던까지 타고온 비행기에서도 폴로늄 흔적이 발견됐다. 루고보이는 이미 러시아에 돌아간 상태였다. 영국이 송환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했다. 곧 루고보이는 러시아 하원의원이 되면서 면책 특권을 부여받았다. 사건 자체와 증거가 허공에 떠버렸다.

“지난 6년 동안 나는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마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이 사건은 그대로 사장되고 푸틴은 완전히 책임을 면하게 된다.” 마리나는 공개적인 사인조사 운동(a public inquest)을 개시했다. 크렘린을 유럽 법정에 세우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증거가 공개돼야 한다. 암살 주모자가 밝혀져야 한다. 푸틴은 잠자리가 편치 않을 거다.” 마리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맑고 푸르렀다. 마피아나 암살을 주제로 이야기하면서도 쾌활하고 침착했다. “주어진 삶은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리나가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 밖에 내리는 비처럼 말이다.”

“어떻게 늘 그렇게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나(How do you keep yourself so positive)?” “댄스 덕분이다.” 마리나가 대답했다. “난 전문 볼룸 댄서다. 댄스는 내적인 자유(inner freedom)를 가져다준다.” 마리나 리트비넨코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30세 이전엔 KGB를 영화에서나 봤고 반체제 인사(dissidents)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소련 시대 말기에 성장하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러시아에서 살았다. 크렘린 음모,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 고문 같은 것이 횡행하는 러시아가 아니라 대다수 러시아인이 갈망하는 평온한 러시아를 말한다. TV에서 로맨틱 코미디와 쾌활한 어린이 노래, 발레, 피겨 스케이팅, 월츠를 끝없이 보여주는 세계였다.

“대학에서 경제학이나 댄싱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난 소련 시스템이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댄싱을 택했다. 매일 하루 종일 춤만 췄다.” 마리나는 일류 댄서가 됐다. 1990년 그녀와 파트너는 전 소련 볼룸댄싱대회에서 결선에 진출한 6팀에 들었다. “월츠와 탱고가 내 장기였다. 파트너와 몸을 맞대고 호흡을 맞추는 춤이다.”

1993년 31회 생일날 마리나는 알렉산드르를 만났다. 알렉산드르는 그녀와는 ‘다른’러시아에서 살았다. KGB 조직범죄·대테러부서 간부였다. 둘이 서로 아는 친구들이 그녀 생일 파티에 알렉산드르를 데려왔다. 이전에 알렉산드르는 그 친구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갈취단을 체포해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마리나는 그때까지 ‘첩보원’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알렉산드르 역시 댄서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차림이 단정치 못했고 사랑 받지 못한 ‘머슴애’였다.” 마리나가 말했다. “그는 두 앞니 사이가 벌어졌지만 치아교정을 해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자랐다.” ‘그 머슴애’는 납치나 테러 용의자를 족쳐 정보를 얻는 일이 전문이었다. 체첸에서 자행된 인권유린 비디오 증거를 조작하기도 했다(나중에 후회했다). 그러나 마리나의 모성 본성이 그를 보듬었다.

알렉산드르는 부모를 몰랐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컸다. 그는 KGB가 마음의 고향인 듯 몸바쳐 일했다(최근 007 영화에서 M은 제임스 본드에게 “고아들이 최고의 첩보원 후보”라고 말한다). 마리나는 양손 손가락을 엮어 파도처럼 움직이며 말했다. “우린 완벽한 콤비였다(We were a perfect tandem). 그가 터프한 부분에서 나는 부드러웠다(where he was tough I was smooth).”

댄서와 그 냉혹한 KGB 요원은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다. 아들이 태어났다. 마리나는 팝스타들을 위해 람바다 춤을 췄고, 알렉산드르는 거리에서 부패한 경찰들을 무력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점차 달라졌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돌아오면 지치고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마리나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알렉산드르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모르는게 나아(There are some things it’s better for you not to know).”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마음이 쓰이지 않았나(Didn’t you mind being in the dark)?” 내가 마리나에게 물었다. “그는 완벽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에겐 그의 역할이, 내겐 나의 역할이 있었다. 댄서가 되면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모두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알렉산드르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살 수 없을 것 같아.” 마리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왜 그래요? 우리 친구들과 가족이 있잖아요.” “당신은 이해 못해. 온통 범죄투성이야. 꼭대기까지 썩었어.” 마리나는 알렉산드르의 말을 흘려들었다. “러시아인 대다수는 유리로 만들어진 세상에 산다.”

마리나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그 세상에서 나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체한다.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안주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돌을 던져 그 유리를 깬다.” 그 첫 돌이 1998년 던져졌다. 알렉산드르가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를 불러 FSB의 만행을 털어놓았다. “인터뷰할 때 난 카메라 곁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모든 것이 그의 시각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지난해 알렉산드르는 테러리스트와 마피아 두목들을 제거하는 FSB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거친 수사관들처럼 알렉산드르도 법이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범인을 잡는 게 실제 임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러시아 장성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무기를 대량 판매한다는 사실을 폭로한 FSB 요원을 “손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호텔업계 거물의 동생을 납치해 몸 값을 받아냈고, 러시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흥부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모든 게 맞아 떨어졌다.” 마리나가 말했다. “알렉산드르는 정의의 편에 서려고 FSB에 들어갔다. 그는 옳고 그름을 확실히 가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난 정의를 믿었다. 그가 공개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면 부패가 척결되리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알렉산드르의 도박이 먹혀들어간 듯했다. 그의 폭로로 FSB 국장이 해임됐다. 새로운 인물이 책임자로 왔다. 러시아 개혁파의 일원으로 간주된 그 새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알렉산드르는 FSB와 조직범죄의 유착을 보여주는 거대한 차트를 그려 푸틴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그 면담 후 알렉산드르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날 밤 알렉산드르는 마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임 국장은 틀렸어. 악수도 건성으로 하고 내 눈을 맞추지도 않았어. 그는 피해망상이 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인 기사까지 데려왔지. 부패 척결엔 관심도 없어.” 바로 그날 밤 알렉산드르의 전화가 도청됐다.

“알렉산드르는 누구보다도 먼저 푸틴이 나쁜 사람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남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가 예측한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그는 내게 ‘이제 그들이 나를 체포하거나 암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마리나가 에어로빅을 가르치고 있을 때 알렉산드르의 동료가 찾아와 남편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그 다음 해 각종 혐의가 덧붙여졌다. 법정에서 한가지 혐의가 기각되면 곧바로 다른 혐의가 제기됐다. 마리나가 반발하자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떠들었지? 무슨 수를 쓰든 그를 잡아넣고 말겠어.” 마리나는 완전히 새로운 댄스를 배워야 했다. 죄수 아내의 댄스였다.

“난 자기방어 모드로 바뀌었다(I switched on a self-defense mechanism).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만 신경 썼다. 음식을 만들어 알렉산드르에게 가져갔다. 아들에겐 아빠가 출장 중(Daddy had gone away on business)이라고 둘러댔다. 그런 작은 일 하나하나가 나로선 생존 방식이었다.”

2000년 잠시 출소한 틈을 타 알렉산드르는 마리나에게 해외로 도피해야겠다고 말했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헤쳐나가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것과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난 계속 우리의 유리 세계에 매달렸다(I still clung on to my glass world).”

그들은 해외 탈출 계획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마리나는 런던에 망명한 뒤에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런던에서 리트비넨코 부부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카터 부부였다. 알렉산드르는 러시아 반체제 작가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같은 망명인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남편 세계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마리나가 돌이켰다. “그는 1990년대에 목격한 일들이 스탈린의 KGB 시대로 돌아가는 큰 그림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틴에 등을 돌린 러시아 신흥부자 베레조프스키(알렉산드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의 후원으로 알렉산드르는 자신의 잔뼈가 굵은 FSB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서유럽으로 향하는 마약 운반을 FSB가 관리한다고 주장했다. 또 FSB가 알카에다의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포함해 세계 각지의 테러리스트를 훈련한다고 주장했다(리트비넨코는 알-자와히리가 FSB 훈련소에서 6개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또 모스크바의 아파트 폭파부터 극장 인질 사건까지 수많은 테러가 ‘체첸 반군의 소행’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FSB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리트비넨코가 제시한 증거는 정황적이어서 푸틴 반대자들도 신방성이 없다며 일축했다. 아무튼 그의 요점은 푸틴이 ‘KGB-마피아’ 혼합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엔 그런 주장이 인기 없었다. 서방에서 푸틴은 강력한 지도자이며 대테러전의 동맹으로 칭송 받았다.

러시아에 있을 때와 달리 런던에서 알렉산드르는 모든 생각을 마리나에게 털어놓았다. “한밤중에 나를 깨워 자신이 쓴 글에 조언을 구했다.” 마리나가 자랑스럽게 돌이켰다. 영국 BBC가 댄싱 오디션 프로그램 ‘스트릭틀리 컴 댄싱(Strictly Come Dancing)’을 시작하면서 볼룸 댄스가 다시 유행하자 마리나는 다시 강습을 시작했다. 그들 부부는 모스크바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알렉산드르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부자들이 런던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자 남편은 KGB가 영국에 침투하기 시작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영국인들이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영국 회사들에 투자하는 러시아인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남편은 푸틴이 러시아 에너지와 부패한 돈에 유럽이 의존하도록 만들어 서방으로 영향력을 확장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견디지 못해 탈출했던 바로 그 세계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간이식당은 켄싱턴에 있다.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 구역이다. 그 곁에 있는 벨그라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이 많다. 그곳의 거대한 저택들은 가끔씩 일행을 이끌고 들이닥치는 러시아 부호들을 기다리며 크리스마스 내내 불이 꺼져 있었다.

“2006년이 되자 남편 눈빛이 과거 첩보원 시절로 돌아갔다.” 마리나가 말했다. “그는 러시아 마피아의 유럽 돈세탁에 크렘린이 연루됐는지 추적하는 영국 비밀정보국 MI6와 스페인 정보국을 돕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남편이 단지 과거 FSB의 비행을 폭로한 데 대한 복수로 암살됐다고는 믿지 않는다. 난 그가 서방에서 러시아 마피아와 크렘린 관계를 캤기 때문에 암살됐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르가 죽은 뒤 세계 언론은 입원한 그의 사진과 푸틴에게 보낸 공개 고발장을 대서특필했다. 런던에서 폴로늄 흔적이 발견되자 방사능 경보가 내려졌다. 러시아가 영국에 소규모 핵공격을 감행한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현대판 KGB의 어두운 세계가 갑자기 런던 중심가의 문명화된 거리를 뒤덮었다.

격분이 일고 ‘신냉전(new Cold War)’ 이야기가 나돌았다. 영국 외무부는 마리나에게 루고보이가 러시아를 떠나 해외에 발을 딛는 순간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마리나는 그런 시스템을 믿고 아들을 잘 키우는데만 집중했다.

“알렉산드르가 죽었을 때 아들은 열두살이었다. 아들을 키우는 일로 나는 버텼다. 우린 매일 알렉산드르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암살에 관해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난 대변자가 돼본 적이 없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싫었다. 그건 죽음의 춤이다(a dance of death).”

그러나 마리나가 집에서 조용히 지내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알렉산드르가 핵무기를 밀수입하다가 방사성 물질에 중독됐을지 모른다, 베레조프스키가 그를 죽인 후 푸틴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이야기였다. 한편 푸틴은 힘이 더 세졌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와 관계 ‘재설정(reset)’에 나섰다.

유럽은 러시아 에너지에 더욱 기댔다. 2010년 돈세탁을 수사하는 한 스페인 검사는 러시아를 두고 ‘사실상 마피아 국가(virtual mafia state)’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러시아 자금은 파산한 영국으로 계속 흘러 들었다. 출처는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no questions asked about where the money comes from).

“2011년 TV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푸틴과 악수하며 러시아-영국 관계 재구축을 천명하는 장면을 보면서 더는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나가 말했다.

이제 베레조프스키가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마리나는 법정투쟁 비용을 확보하려고 대중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의 사인조사가 재개되면서 알렉산드르에 관한 비방이 잠잠해졌다. 변호사들은 알렉산드르 죽음에 ‘러시아 국가의 책임’을 시사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더 타임스지는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알렉산드르의 사인조사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관계가 훼손돼선 안 된다(The inquest must not sour relations with Moscow). …영국은 러시아에서 최대 투자국이다.”

마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영국은 푸틴을 잘 대해주면 보답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르는 조금만 잘해주면 상대를 우습게 보는 게 KGB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에게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가 러시아에서 그랬듯이 영국인들도 그들 나름의 작은 유리 세상을 믿고 싶어한다.”

식당 밖에선 크리스마스에 쉬려고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쇼핑객들이 커피를 마시려고 우리 식당으로 가득 몰려들었다. 우리는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알렉산드르가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후회하는가? 과거 세계에 머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내가 사랑으로 자신을 떠받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전진 스텝을 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빛났다. “이젠 내가 리드할 차례다.” 호흡을 완벽하게 맞추는 춤은 두려움과 후회를 넘어선다. 이건 사랑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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