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에서 밑지고 부업에서 번다
본업에서 밑지고 부업에서 번다
요즘 정유 업계는 울상이다. 글로벌 경기침체 이후 업황이 눈에 띄게 나빠진데다 주력인 정유업의 실적이 예전만 못해서다. 업계 1~3위인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에쓰오일(S-Oil)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연결 기준 3조203억원이다. 전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 SK이노베이션은 영업이익 1조6911억원으로 43% 감소했고 GS칼텍스는 5109억원으로 74%, S-Oil은 52% 줄어든 8183억원이었다.
정유사의 주요 수익원은 크게 정유와 석유화학·윤활유로 나뉜다. 이 중 3사의 발목을 잡은 건 정유다. SK이노베이션은 전체 영업 이익 가운데 정유로 거둔 금액이 2791억원으로 2011년에 비해 78% 줄었다. 그나마 이 회사는 흑자였지만 GS칼텍스와 S-Oil은 정유부문에서 적자를 봤다. GS칼텍스는 정유로 5085억원, S-Oil은 3473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두 회사는 2011년에 각각 8052억원, 4723억원 흑자를 낸 바 있다. 상황이 이렇자 국내 정유사들은 새 먹을거리인 석유화학 쪽으로 눈을 돌렸다.
GS칼텍스·S-Oil 정유업에선 적자정유업은 원유를 사들여와 정제해 석유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다. 석유화학업은 정유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 등 원료로 합성수지·합성섬유·플라스틱 소재 제품을 생산해 파는 사업이다. 애초 석유화학은 정유사들한테 본업인 정유업을 뒷받침하는 부업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투자를 강화하고 비중을 높이면서 부업 이상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실적만 봐도 정유보다 석유화학에서 벌어들인 영업이익이 훨씬 많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석유화학 부문 영업이익은 7511억원이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2011년보다는 소폭 감소했지만 회사의 전체 영업이익(1조6911억원)에서 비중이 절반에 달했다. GS칼텍스도 석유화학에서 7616억원의 영업이익 흑자를 내면서 정유에서의 부진을 만회했다. S-Oil 역시 2011년보다 84% 증가한 8319억원의 이익을 냈다.
정유는 지고 석유화학이 뜬 이유는 뭘까. 정유업에서는 정제 마진 감소가 치명타다. 글로벌 경기불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각국에선 석유제품 수요가 감소했다. 일부 회사는 이 과정에서 원유를 시세보다 다소 높게 매입하면서 악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업은 국제 유가가 출렁이면 뾰족한 대안 없이 고스란히 실적에 영향을 받는다”며 “리스크에 비해 기대할 수 있는 이익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에 지난해 4분기엔 환율 하락으로 손해가 더 컸다. 내수에선 알뜰주유소 등장으로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진이 줄었다.
윤활유에서도 만회가 어려웠다. 그동안 짭짤한 수익을 내 알짜 사업으로 분류돼온 윤활유는 불황 여파로 소비가 줄었다. 대규모 증설로 공급은 늘었지만 수요가 줄자 수익성이 나빠졌다. GS칼텍스는 2011년 윤활유 부문 영업이익이 4162억원이었지만 지난해 2562억원으로 줄었다. S-Oil도 윤활유로 2011년 715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작년엔 3320억원에 그쳤다.
반면 석유화학 제품은 지난해 중국과 인도에서 수요가 늘어나 상황이 더 좋아졌다. 국제 수요 증가는 수출 증대로 이어졌다.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해에 석유화학 제품으로 총 567억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2011년 기록한 520억 달러를 넘어선 역대 최고 실적이다. 최근 시황도 호재다.
원유를 정제해 나오는 나프타로 생산하는 석유화학 기초재료인 파라자일렌의 가격은 지난해 7월 이후 8개월 연속 오름세다. 2월 중순 한때 하루 최고가가 1708달러까지 오르며 2011년 3월 기록된 최고점(1698달러)을 넘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중국 경기 회복 기대감이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중국 섬유 업계는 파라자일렌으로 만드는 화학섬유 제품의 중간 원료인 테레프탈산(TPA) 수요가 증가하자 작년부터 증설 경쟁에 나섰다. 연간 파라자일렌 생산량이 180만t으로 국내 최대인 S-Oil엔 큰 호재였다.
GS칼텍스 관계자는 “2011년 이전부터 꾸준하게 석유화학 부문에서 투자를 늘린 결과 상황이 좋을 때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2007년부터 부업인 석유화학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연간 1조원 이상의 설비 투자를 석유화학에 집중했다. SK이노베이션과 S-Oil도 비슷한 시기에 연간 5000억~1조원 안팎의 투자를 이어왔다.
국내 정유사의 석유화학 분야 투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인천에 석유화학 공장을 짓고 있다. 예상 투자금액은 1조6000억원이다. 울산에서도 일본의 JX에너지와 합작해 1조원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다. 진행 중인 전체 투자액 4조원 가운데 65%(2조6000억원)가 석유화학 부문에 집중됐다.
완공 이후 공장 가동률을 끌어올려 늘어난 석유화학 제품 수요에 맞추기 위해서다. GS칼텍스는 2015년까지 7000억원 규모의 석유화학 부문 추가 투자를 할 계획이다. S-Oil도 2011년 울산 온산공장 확장에 1조3000억원을 투자한 이후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알짜사업인 윤활유마저 수익성 고전부진한 정유 분야 실적 만회를 위해 정유 빅3는 알뜰주유소에도 눈을 돌렸다. 2월 21일 한국석유공사와 농협이 알뜰주유소 유류 공급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정유 3사 모두 제안서를 제출했다. 기존 알뜰주유소 유류 공급 사업자였던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 외에도 SK이노베이션과 S-Oil이 새로 참여해 입찰 경쟁에 불이 붙었다.
2월 27일 S-Oil이 우선 협상자로 선정되면서 우위를 차지한 가운데 향후 가격 조정 여부나 조정 폭이 관건이 될 전망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알뜰주유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시장점유율을 움직이는 변수가 되자 정유사들이 인식이 달라진 것으로 분석한다. 내수에서 조금이라도 점유율을 높이고자 경쟁에 나선 것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정유 업계 전망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다. 이희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SK이노베이션은 규모의 경제 효과와 이란산 원유 도입 효과로 실적 회복 속도가 빠를 것”이라며 “GS칼텍스와 S-Oil도 실적 개선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선우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석유제품 수출 제한 정책을 지속하는 한 아시아에서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며 “동남아 중심의 수요 증가가 이어지면서 아시아의 정제 마진 사이클도 중동과 중국의 새로운 설비 가동이 본격화하는 2015년까지는 상승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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