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품도 봄·가을 맛 다르죠
같은 제품도 봄·가을 맛 다르죠
1년 365일 오로지 라면만 고민하고 연구하는 곳은 어떤 일상일까. 2월 27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으로 향했다. 이곳엔 3만3000여 ㎡ 면적의 오뚜기 라면 공장이 있고 바로 옆에 지상 4층, 지하 1층짜리 연구소가 있다. 25명의 전담 연구원이 라면 신제품 개발과 품질 향상에 골몰한다.
하얀 페인트칠로 단정하게 정돈된 건물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자 열띤 분위기가 느껴졌다. 1층엔 오뚜기 라면 전 품목을 진열한 장식장이 있어 외부인을 반기고 2층엔 연구원들이 쓰는 교육장이있다. 3층과 4층은 조리기구와 시식 설비, 시식대, 보존성 테스팅 설비, 각종 건조기로 가득하다. 라면 신제품이 처음 탄생하는 곳이다. 탁자엔 식재료가 즐비하고 라면 봉지도 어지럽게 쌓여 있다. 연구의 산물은 파일럿라인을 거쳐 생산라인으로 옮겨진다.
“1월에 오뚜기 라면의 시장점유율이 2위(13.1%)로 올라섰습니다. 열심히 연구한 보람을 느낍니다.” 김규태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20년째 라면만 연구한 베테랑이다. SBS ‘생활의 달인’에도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그의 말처럼 오뚜기 라면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지난해 매출이 2011년보다 17% 늘었다. 1987년 시작한 후발주자이지만 50년 역사의 삼양식품과 2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스프 못지않게 면발이 성패 좌우오뚜기 라면 연구원들은 매운맛·순한맛·해물맛·서양식 등 제품별로 담당 분야를 나눠 연구한다. 스프 담당자와 면 담당자는 한 팀으로 모았다. 스프와 면발이 어우러진 맛의 조화를 살리기 위해서다. 연구 업무를 총괄하는 황성만 오뚜기 라면연구소장은 “보통 라면 맛은 스프가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면발도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스프를 개발하면 그에 맞는 면발의 점성·탄성·굵기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뚜기 라면연구소가 면발 연구에도 중점을 두는 이유다.
면의 굵기는 라면 맛과 상관관계가 있다. 면발이 굵을수록 조리시간이 길어져 면에서 전분이 많이 우러나온다. 같은 스프를 넣어도 굵은 면일수록 국물 맛이 더 걸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다. 반대로 면발이 얇으면 깔끔하고 시원한 맛의 스프와 잘 어울린다.
“굵은 면이면 식감이 단단하게 느껴질 수 있어 밀가루와 전분의 원료 비율을 조정합니다. 굵어도 부드러운 식감을 주게 만드는 겁니다. 얇은 면이면 빨리 퍼져 쫄깃한 식감이 덜할 수 있어 이때도 원료 배합 비율을 조정합니다. 잘 퍼지지 않고 쫄깃한 식감이 오래갈 수 있도록 합니다.”
스프 개발도 중요하다. 라면 1개당 11~12g 중량의 분말스프가 650g짜리 라면 한 그릇의 정체성을 좌우한다. 이처럼 적은 양으로 각기 다른 맛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개발 과정도 만만찮다. 예를 들어 ‘쇠고기라면’이라면 연구소는 가장 먼저 원료를 검토한다.
맛·가격·안정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쇠고기의 원산지와 부위 검토에 나선다. 원료가 선정되면 분말스프로 만들기 위해 추출 한다. 효소 분해, 열수 추출 등의 분해 과정을 거친다. 추출 후엔 소금이나 조미 소재를 더해 농축해서 쇠고기 엑기스를 만든다. 원료의 성분을 보존하고 맛의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다음은 건조다. 농축이 끝난 쇠고기 엑기스를 제품별로 분무·진공·열풍·동결의 다양한 건조법으로 말려 분말 형태로 만든다. 마지막은 배합이다. 분말 형태로 만든 쇠고기 원료와 조미 소재(효모 엑기스, 간장 분말, 고춧가루, 후춧가루, 야채분말 등)를 혼합하는 과정까지 끝나면 비로소 분말스프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분말스프와 면발에 건더기 스프가 더해지면 라면봉지가 된다. 현재 오뚜기라면 연구소가 취급하는 품목은 56종에 이른다.
매운맛으로 매서운 상승세황소장은 연구원 시절 인기상품 스‘ 낵면’을 직접 개발한 베테랑이다. 그는 라면을 맛보는 일이 숙명이라고 말한다. 하루 평균 20여종이 넘는 라면을 먹는다. 40여종까지 먹을 때다 있다. 질리지 않을까. “주말이면 집에서도 가족들과 라면을 먹으면서 품평회를 엽니다. 라면 연구원이 면을 싫어해선 이 일을 절대로 할 수 없어요.”
그는 중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형의 회전 테이블에서 매일 회의를 한다. 연구원들이 모여 앉아 오뚜기 라면은 물론 경쟁사 제품을 맛보며 평가하고 분석한다. 단순히 라면만 맛보지 않고 계란을 풀어 먹거나 김치와 함께 먹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끓이지 않고 과자처럼 먹기도 한다. 소비자가 라면을 즐기는 다양한 방식 그대로 시도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소비자들이 오뚜기 라면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 한 가지. 오뚜기라면은 56가지 품목에서 1년에 1~2회 품질 향상 업무를 진행해 제품에 반영한다. 같은 라면이더라도 1년 전 제품과 오늘 나온 제품의 맛이 미세하게 다르다. 정보기술(IT) 용어로 치면 업그레이드다.
연구원들이 모여 앉아 매일 수십 여개 라면을 시식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기존 제품 맛에 익숙한 소비자가 더 맛있어졌다고 느끼게 하는건 신제품 개발보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소비자 입맛에 부응하는 것도 연구소가 할 일이죠. 우리 제품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개선하는 데도 중점을 둡니다.”
‘진라면’ 같은 인기 상품은 이미 소비자의 검증을 거친 맛이라 개선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연구소에선 제품별로 연 2~3회, 1회당 100명씩 소비자 패널을 구성해 의견을 수렴한다. 라면을 가장 많이 찾는 초·중·고교 학생에서부터 주부와 전문 요리사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모아 오뚜기 라면과 경쟁사 라면을 품평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해 조사의 객관성을 높인다.
연구소 지하 1층에 있는 파일럿라인으로 향했다. 이곳엔 지난해 초 도입한 연속식저온진공건조기(CVD)가 있다. 야채·해물·육류 엑기스와 혼합 농축액을 건조해 스프 원료로 만들 때 똑같은 품질로 연속 생산하기 쉽도록 하는 기기다. 육중한 몸집이지만 빠르고 똑똑한 고성능을 자랑한다.
장수상 오뚜기 라면 선임연구원은 “일반 건조기로는 10~12시간 걸리던 작업을 CVD으로 한두 시간에 해결한다”며 “원료를 얇게 연속해서 쏴 내부 진공을 거치기 때문에 원료 맛과 향도 그만큼 더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파일럿라인의 CVD는 실제 생산라인에 그대로 적용된다.
최근 경쟁사 제품에서 발암물질인 벤조피렌이 기준치 이상 검출돼 홍역을 치른 만큼 위생 강화에도 주력한다. 각 기준치를 준수하는 한편 엑스레이·금속검출기로 라면봉지 안에 이물질이 있으면 바로 걸러 회수한다. 오뚜기 라면연구소는 불황에 매운맛 수요가 다시 늘 것으로 보고 연구개발에 반영했다. 새로운 시장인 저칼로리 제품 확대에도 힘쓸 계획이다.
황성만 연구소장은 “2011년부터 흰색 국물이 유행했지만 지난해 하반기에 다시 빨간 국물로 소비자 기호가 되돌아간 모습”이라며 “기존 주력 시장이던 빨간 라면에 집중하는 한편 차별화된 볶음면을 개발해 틈새시장을 노리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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