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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 - ‘유니버설라이제이션’ R&D 전략의 산실

Repo - ‘유니버설라이제이션’ R&D 전략의 산실

본사 중심 상향식 R&D 탈피 … 지역마다 자율성 주고 시너지 효과 극대화



가로·세로 3㎝ 크기 정사각형 모양의 인공 피부. 손으로 꾹 눌러보니 볼에 덴 듯한 감촉이 전해진다. 눈을 가리고 만졌다면 사람의 피부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각질층과 면역체계 역시 사람의 피부와 같다. 이 인공 피부에 메이크업베이스를 바르고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제품별로 모공에 스며드는 정도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수 있다.

차이를 설명하던 연구원은 “바르는 방식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며 “같은 메이크업베이스라도 손으로 바를 때와 화장용 스폰지를 이용할 때 피부와의 밀착성이 다르다”고 말했다. 흔히 ‘화장이 뜬다’는 표현은 주로 피부컨디션과 관련이 있지만 화장하는 습관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바로 옆에서는 무스형 크림과 일반 면도용 무스의 비교 실험이 한창이다.



도쿄는 아시아 공략 전초기지화이트에피션트 무스 BB크림은 슈에무라가 개발한 최초의 무스형 BB크림이다. 기체·액체·고체 3가지를 조합해 새로운 제형을 만들었는데 만져보면 면도용 무스보다 감촉이 부드럽다. 3차원 카메라로 살펴보니 면도용 무스보다 피부에 고르게 퍼지는 효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장품은 과학의 산물이다. 일단 원재료가 중요하지만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어떻게 배합하고, 어떤 순서에 따르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다른 제조업에 비해 공정 또한 복잡하다. 피부에 닿는 만큼 수십 차례 반복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B2C(기업-소비자간 거래) 사업이 그렇듯 소비자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인종에 따라 피부색이나 헤어 컬러, 얼굴형, 속눈썹 모양, 눈매 등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화장품은 특성상 아무리 좋은 브랜드라도 자신의 피부에 맞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아시아 여성은 향수가 발달한 서양과 달리 은은한 향을 좋아한다. 스킨케어 또한 수분감이 많은 촉촉한 느낌을 선호한다. 같은 아시아인이라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얀 피부, 동남아시아인들은 약간 붉은 빛이 도는 피부를 원한다. 미카 이노우에 KSP R&I센터장은 “화장품 선호도가 음식과 연결되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유럽의 디저트에는 크림이 많이 들어가지만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젤리 형태의 산뜻한 디저트를 즐긴다”며 “이는 화장품 선호도에도 비슷하게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현지화가 필수적이다.

일본 도쿄 시내에서 차로 50분 가량 달려 도착한 가나가와현 가와시키시. 이 곳에 위치한 로레알재팬 R&I센터(이하 KSP R&I센터)는 프랑스의 세계 최대 화장품 기업 로레알의 기술력이 결집된 곳이자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다. 로레알은 단순한 연구개발(R&D)을 넘어 혁신을 이어가겠다는 취지에서 연구기관을 R&I센터라 부른다.

일본은 화장품 관련 비즈니스가 가장 활발한 나라에 속한다. 전 세계에서 스킨케어 제품 판매량이 가장 많고, 소비자의 전문성 또한 뛰어나 비교 연구가 수월하다. 인종별 피부 조건과 취향에 맞게 새로운 원료를 찾고, 제품을 개발하는 게 R&I센터의 주 임무다.

KSP R&I센터 내 피부 색상 평가센터에 들어서면 흰색 구 형태의 기계가 눈에 띈다. 크로마스피어(Chromasphere)라는 기계인데 얼굴을 대면 노란기(Yellow)와 붉은기(Reddish)로 나눈 좌표 위에 내 피부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다. 최대한 자연광에 가까운 상태에서 피부 색상을 측정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높다.

화장 전과 후로 나눠 여성들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피부톤이 무엇인지 예측하는 기능도 있다. 피부 광 평가센터에서는 삼바(Samba)라는 특수 기계를 이용해 화장 전후 피부 번들거림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한다. 감각 평가센터에서는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촉감과 향 등을 점수로 매긴다. 보통 15명의 실험자들을 그룹으로 묶어 2번씩 조사한 뒤 데이터를 축적한다.



로레알 R&D 예산, 매출의 3.6%속눈썹 평가센터는 저마다 다른 속눈썹의 특징을 파악하는 곳이다. 파트리샤 피누 로레알 R&I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는 “아시아인은 대체로 서양인에 비해 속눈썹 길이가 짧고, 아래를 향해 자라기 때문에 속눈썹을 보다 길게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며 “이런 점을 반영해 속눈썹이 길어 보이는 마스카라를 개발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0명 이상의 일본 여성을 상대로 연구를 거친 뒤 출시한 롱래쉬 마스카라 ‘메이블린 래셔니스타’는 일본에서만 300만개 이상 팔려나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독특한 용기 모양으로 국내 여성 소비자에게도 널리 알려진 ‘슈에무라 얼티메이트 클렌징 오일’ 또한 KSP R&I센터의 작품이다. KSP R&I센터는 또 일본 내 한 중견업체와 공동으로 하이브리드 색소(hybrid pigments)를 개발했다.

색조 화장품 고유의 색상이 사람 피부에 표현되었을 때 다르게 발색되는 현상을 개선한 물질이다. 이노우에 센터장은 “눈으로 보는 제품의 화사한 컬러가 피부에 발랐을 때도 최대한 동일하게 연출되도록 한 물질”이라며 “이 색소는 슈에무라 립스틱 ‘루즈언리미티드’, 랑콤 파운데이션 ‘포토제닉’ 등 다양한 로레알 제품에 적용됐다”고 설명했다.

1909년 설립된 로레알은 세계 최대의 화장품 그룹이다. 지난해 매출은 225억 유로(약 32조원). 로레알 외에도 랑콤·슈에무라·키엘·메이블린·비오템 등 유명 화장품브랜드가 있다. 설립 초기 염색제로 널리 알려졌지만 지금은 화장품 매출 비중이 98%에 달할 정도로 영역이 확대됐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과 함께 과감한 R&D 투자로 급성장했다.

현재 로레알 그룹은 전 세계 19개 지역에서 KSP R&I센터와 같은 R&I 센터를 운영한다. 각국 소비자의 취향과 트렌드를 연구하는 평가센터도 한국을 포함해 17곳에 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연구인력만 3800여 명에 달한다. 지난해 로레알 그룹의 R&D 예산은 7억9100만 유로(약 1조1400억원)로 전체 매출의 3.6% 정도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 여파 속에서도 R&D 예산만은 줄이지 않았다.

‘LR2412’는 로레알 R&D 투자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12년간의 연구 끝에 개발한 LR2412는 식물이 상처를 입으면 스스로 치유하는 자가 재생 과정에서 영감을 얻었다. 파트리샤 피누 디렉터는 “피부 모든 층에 스스로 침투하는 만능 분자로 식물의 신호 전달물질과 같은 역할을 한다”며 “피부 각질층을 통과해 표피와 진피층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노화 방지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레티놀보다 피부 침투 속도가 약 4배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개발한 LR2412는 전 세계 R&I센터에 전해져 각국의 특성에 맞는 제품으로 개발됐다. 일본 KSP R&I센터는 LR2412를 이용한 화장수와 로션을 개발했다.

로레알 입장에서 지역 R&I센터를 늘리는 것은 포화상태로 접어든 미국과 유럽 시장 대신 아시아·남미 등 신흥 시장을 공략하려는 포석이다. 스테판 오르티즈 로레알 아시아 R&I 총괄은 “특정 국가나 민족이 보유한 고유의 미적 가치를 제품에 반영해 마케팅과 연결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제품을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국가의 특성에 맞게 성분이나 디자인을 변경하는 전략이다. 흔히 말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전략’이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기업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글로컬라이제이션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도 대다수의 글로벌 기업은 현지 국가의 기업이나 사업 풍토에 맞게 제품을 기획하고 판매 전략을 짠다. LG전자가 나이지리아에서 말라리아 모기 퇴치 기능을 갖춘 에어컨을 출시하거나 삼성전자가 뒷면을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색으로 디자인한 LED 모니터로 2011년 한 해 동안 10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로레알 역시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하지만 로레알의 경우 특정 R&I센터에서 개발한 원료나 제품이 전혀 다른 국가나 시장으로 퍼져나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개발한 제품이 유럽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남미에서 개발한 헤어케어 제품이 동남아 지역에서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메이블린 ‘퓨어 미네랄 프레시글로우 BB크림’은 원래 화사한 피부 표현을 원하는 한국 소비자를 위해 개발된 제품이다. 메이블린이 한국 여성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춰 개발했는데 국내 출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제품은 1년 뒤 스타일은 한국 여성에, 재료는 서양인의 피부에 맞춰 ‘드림 프레시글로우 BB크림’이란 이름으로 다시 출시됐다. 대륙을 건너간 한국형 BB크림은 유럽에서도 판매 1위를 차지했다.

로레알파리의 ‘토탈리페어5’도 비슷한 예다. 곱슬머리가 많은 브라질 여성들은 강렬한 태양과 잦은 퍼머로 인해 손상된 머릿결을 진정시키는 헤어케어 제품을 선호한다. 토탈리페어5는 이러한 소비자 욕구에 맞춰 머리카락 속 단백질 재생을 돕는 제품이다. 브라질에서 인기를 끈 이 제품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인도·동남아 지역으로 건너가 큰 사랑을 받았다.



지역 특성 연구를 다시 수출하는 ‘逆혁신’로레알의 각 지역 R&I센터는 해당 국가의 소비자 특성을 연구하는 동시에 특수한 역할을 맡는다. 2005년 설립한 중국 상하이 푸동 R&I센터는 아시아인의 피부·모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미국 시카고 에스닉 R&I센터는 아프리카인의 피부와 모발 연구을 담당한다.

미국 클라크 연구센터는 메이크업 기술을 일본 KSP R&I센터는 스킨케어와 메이크업용 염료 개발에 집중한다. 본사는 개별 R&I센터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현지 소비자 특성을 연구해 개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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