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S - “망양정 앞 바닷물로 술 담근다면…”

‘사미인곡’과 ‘관동별곡’을 노래한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1536~1593). 재상의 반열에 오른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다. 서인당 수장으로 동인당을 몰아붙여 원성을 샀지만 정계에서 밀려난 뒤 주옥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서른 살 패기에 찬 정철이 북관어사로 관동에 갔을 때 아리따운 여인을 만났다. 강원도 양양 출신 명기 홍장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관동 해안선은 미인을 배출하는 땅인 모양이다.
강릉 경포대의 허초희, 삼척 죽서루의 죽죽선이 그렇다(3·4월호 참조). 명승지의 기운을 타고난 아름다움은 울진 망양정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 여인의 미모에 반한 정철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감사나 찰방이 돼 이곳에 다시 오겠노라.”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잊을 만큼 오래된 1580년 정철이 45세가 됐을 때 강원도 관찰사가 돼 돌아왔다.
정철은 그녀를 찾아 만났으나 아련한 추억만 흐른 듯하다. 당시 정철이 쓴 『송강집』 속집 중 ‘관동 기생에게 주다’라는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열다섯 해 전 언약했지, 감사나 찰방이 된다고 했네, 내 말이 비록 맞았다 한들, 다같이 귀밑털이 반백이 됐구나.”
기나긴 두 사람의 인연이 더 이상 어찌됐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늙어서야 다시 만나는 그런 아득한 사랑임은 알겠다. 헤어져 있던 15년 세월 그 허전함과 외로움을 어찌 다 메울 수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 푸르고 깊은 동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세월 뛰어넘는 사랑의 질긴 인연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망양리(望洋里)인지도 모르겠다.
망양정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숙종(1661~1720)은 관동팔경을 그려 오라며 화가 한 사람을 파견했다. 여덟 곳을 그려 오자 숙종은 팔경시 여덟 수를 지었는데 망양정 시가 유난히 재미있다. “망양정 앞 바닷물로 술을 담근다면, 어찌 한갓 삼백 잔만 마시겠느냐”며 재치있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숙종은 이곳을 으뜸이라고 점 찍은 뒤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글씨를 손수 써 현판을 하사했다. 비로소 망양정은 경포대와 죽서루를 제치고 팔경 중 제일임을 뽐냈다.
숙종의 어명을 받든 화가가 누구인지 남겨진 자료는 없다. 추측으로는 정선(1676~1759)일 가능성이 크다. 숙종 재위 중인 1711년과 1712년 두 차례 관동 여행을 한 뒤 그곳 명승지를 그렸기 때문이다. 정작 그때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정선의 망양정 그림은 두 점이다. 그 가운데 한 점은 1734년에 그렸다.
그 작품의 구도와 배치를 보면 너무도 성급해서 위험해 보일 지경이다. 오른쪽은 꽉 채우고 왼쪽은 텅 비운 편파구도라든지,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뚜렷한 줄을 그은 듯 사선구도를 구사했다. 낭떠러지 끝에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서있는 정자는 위태롭다. 일부러 이렇게 연출했을 터이니 아마도 바닷물을 술로 빚어 모두 마시고 취해 휘청대고 싶었던 마음으로 그린 그림 아닐까.
숙종뿐 아니라 정조(1752~1800)도 화가에게 망양정을 그려오라 했다. 김홍도(1745~1806 이후)가 그린 ‘관동팔경도’를 보고 망양정 시를 읊었는데 ‘태초의 기운이 가득한 바다’를 느꼈다면서 ‘공자의 집을 연구하듯 꼼꼼하게 관찰하였다’고 했다. 실제 김홍도의 ‘망양정’을 보면 정선의 위태로운 모습과 달리 지극히 평화롭다.
섬세하고 너무 자상하게 묘사해 요즘 사진보다 훨씬 정밀하다. 산과 바다며 정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아래에 쌓아 놓은 성벽이며 해안선 모래사장 안쪽에 줄지어 자리 잡은 초가집 마을과 고기잡이 배 모양까지 무엇하나 빼뜨리지 않았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의 방울 하나하나 다 그리려 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당연히 정밀지도 살피듯 그렇게 보아야 할 그림이었던 게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망양정은 옛사람이 마주한 망양정이 아니다. 1883년 울진의 수령이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건물을 뜯어서 북쪽으로 15Km나 거슬러 올라와 근남면 산포리 지금 자리에 세웠다. 정선과 김홍도가 그린 망양정과 지금 망양정이 다른 까닭이다. 그마저도 식민지며 전쟁으로 파괴당해 사라졌던 것을 1959년 9월에 재건했다. 그 뒤 누군가 정선 작품에 묘사된 건물을 닮게해야 한다고 주장해 2005년에 고쳐 지었다.
사실 그 터를 옮기는 순간 망양정의 생명은 끝났다. 승경지란 뜻이 그렇다. 왕이 하사한 편액을 갖춘 건물이므로 울진 수령이 함부로 옮겨서는 안된다. 하지만 옮겼어도 망양정은 되살아났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왕피천(王避川)의 전설’이 떠올랐다. 왕의 피서지라는 뜻의 왕피천은 숙종대왕의 피서지였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망양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자리 잡고 있어 저 울진 수령으로서는 숙종과 망양정의 인연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예전 터와 지금 터가 다르지 않다. 정선과 김홍도의 그림과 더불어 이방운과 허필의 그림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듯 비슷하다. 이 터나 저 터나 모두 빼어났음을 알겠다. 다만 달라 보이는 건 화가를 알 수 없는 ‘관동십경도’의 아홉째 폭 ‘망양정’이다.
앞바다를 호수처럼 그렸던 건 해안선 양쪽으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파도를 보여주려는 뜻일 게다. 솟아오르는 태양보다 먼 곳 저 바다 한 가운데 섬나라가 기이하다. 울릉도를 그린 것이지만 마치 고래처럼 보이는 건 웬일일까.
지금은 청운초등학교 터로 바뀐 서울 경복궁 서쪽 마을, 정철이 태어난 땅을 지날 때면 망양정 풍경을 떠올리며 사랑의 유혹을 느끼곤 한다. 강원도 관찰사가 돼 관동땅 일천리를 누비던 정철은 ‘관동별곡’에 15년 만에 해후한 백발 여인과의 사랑처럼 망양정을 노래했는데 부럽고 또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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