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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아우르는 통큰 여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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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칠레 대통령으로 압승 유력 … 반미 좌파연대 대신할 중도 좌파연대 출현할까
미셀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오른쪽)이 2009년 10월 29일 칠레를 방문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함께 칠레 산티아고의 대통령 궁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미셸 바첼레트(62) 전 칠레 대통령은 중남미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정치인이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남미에서 남편 후광 없이 집권한 첫 여성 대통령이다. 중도 좌파로 2006년 3월부터 2010년 3월까지 4년 임기의 단임 대통령을 지낸 그는 84%의 높은 지지율로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연임이 금지된 헌법 때문에 임기 종료 후 일단 정계를 떠났다. 그 뒤 2010년 9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유엔기구인 세계여성기구(UN Women) 총재를 맡아 전 세계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뛰었다. 그러다 올해 3월 물러나 11월로 예정된 칠레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칠레 첫 여성 대통령으로 국난 극복3년의 정치 공백 끝에 돌아온 바첼레트는 놀라운 속도로 지지율을 회복했다. 6월30일 치른 예비후보 경선에서 중도좌파연합인 ‘콘세르타시온(합의)’의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정치적 분열이 일종의 전통이 된 중남미에선 대선 때마다 좌우파가 선거를 위해 힘을 합친 연합체가 공동 후보를 내서 선거를 치르는 게 다반사다. 여론 조사에선 7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인다.

집권 세력인 우파연합 ‘알리안사(동맹)’의 파블로 론게이라(55) 후보나 무소속의 마르코 엔리케스 오미나미(40) 후보를 초반부터 멀리 따돌렸다. 칠레는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1,2위 후보만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2005년 대선에선 1차에서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결선 투표까지 갔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이번엔 1차 투표에서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

바첼레트에 주목하는 건 인상적인 리더십 때문이다. 84%라는 엄청난 지지 속에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였지만 임기 내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건 아니다. 사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할 일을 한 믿음직한 대통령으로 칠레 국민에게 기억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1차 투표 46%, 2차 투표 53.3%의 지지를 받고 당선돼 2006년 3월11일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65%의 지지율을 자랑했다. 그러나 한때 지지율이 35%로 떨어지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바첼레트는 취임 직후인 4월부터 공교육 개선을 요구하는 학생시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5월이 되자 전국적으로 79만명이 동시에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하며 대형 시위를 벌였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고교생 시위가 벌어졌다. 취임 초 50%를 웃돌던 바첼레트의 지지율은 단박에 40%대로 떨어졌다.

취임 직후 이처럼 전국이 시위에 휩싸일 때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전국의 경찰을 다 긁어 모으고 여차하면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까지 동원해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를 택하면 사태를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권이주의적이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인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국민의 존경을 잃고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수 있다. 다른 한 방법은 요구를 대충 들어주고 달래서 시위대의 자진 해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피를 흘리지 않고 비난도 덜 받겠지만 남은 임기 내내 반대파에 끌려 다닐 수 있다. 리더십을 상실하고 ‘식물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과거 한국을 휩쓴 광우병 촛불시위 때 우리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선택을 목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첼레트는 제3의 선택을 했다. 그는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제 진압 명령을 내리지도, 적당히 타협하는 미봉책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는 내가 미처 몰랐던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할 일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기회”라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조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정파·종교·인종·지역을 망라한 전문가·교사·학부모에 학생 대표까지 참여하는 교육개혁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해법 마련을 일임했다. 그러자 일단 시위가 그쳤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자문위 최종 보고서가 나와 이듬해 교육개혁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바첼레트는 칠레에서 30년 만에 처음 벌어진 대규모 시위 사태를 충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목소리와 의견을 모으는 대통합·대타협의 장으로 바꿔놓은 정치력을 인정 받았다. 바첼레트의 리더십을 연구한 울산대 이순주 교수(중남미 정치학)는 “‘국민은 투표할 권리만 원하는 게 아니라 주장할 권리도 원한다’는 취임사 내용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쪽 편만 들지 않고, 생각이 다른 국민 사이의 갈등 해결을 대통령의 임무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바첼레트 리더십의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는 단호함을 보였다. 교육개혁 자문위가 한창 활동 중이던 그 해 8월 2000여명의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에 돌을 던지자 최루탄과 물대포로 강경 진압했다. 요구 사항을 충분히 들어주고 자문위까지 만들어 해법을 강구하고 있는데도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폭력 시위를 벌인 것은 받아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다시 악재가 터졌다. 바첼레트 이전 정권에서 계획해 바첼레트 취임 2년 차에 수도 일원에 도입한 대중교통 시스템 ‘트란 산티아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큰 혼란이 일어났고 항의 집회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나왔다. 충분한 준비 없이 종전 시스템과 새 시스템을 한꺼번에 바꾸려다 일이 꼬인 것이다.

고교생 시위 사태로 떨어진 지지율이 2007년 2월엔 55.2%로 회복됐지만 교통 혼란으로 불만이 커져 3월엔 지지율이 42.7%, 4월에는 35%로 떨어졌다. 이때 바첼레트는 솔직함의 리더십을 보였다. 전임 정권에서 계획한 것이지만 이 시스템을 계획대로 도입하기로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으니 책임지고 개선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바첼레트의 사과와 시정 약속으로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의회가 교통시스템 개선을 위한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않자 그는 범미개발은행으로부터 4억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그 결과 1년 뒤에는 버스 노선이 56%, 운행 버스가 31%, 버스정류장이 163%, 버스전용차선이 36% 늘었다. 버스 대기시간은 평균 30분 이상에서 4~8분으로 확 줄었다.



미셀 바첼레트 지지자들이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아르투로 메리노 베니테스 국제공항에서 3월 27일 바첼레트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바첼레트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여성기구 대표로 일하다 2년 만에 귀국해 11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대통합 강조하되 위기 때는 단호함 보여하지만 계속되는 정쟁 속에서 이듬해 9월 헌법재판소가 차관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바첼레트는 비상조치를 발동해 이를 밀어붙여 교통시스템을 계속 정돈했다.

그 뒤 임기 말 칠레가 대지진을 당하자 발로 뛰며 국민을 위로하는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퇴임 때 민주국가 지도자로는 드문 84%의 높은 지지를 얻은 것은 이런 리더십 덕분이다.

그 덕분에 그는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남미 전체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도 크다. 그를 주목하는 이유다.

바첼레트는 대통령이 되기 전 전임자인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정권에서 중남미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도 이런 대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오랫동안 군사정권을 유지하다 민간 정부에 권력이 넘어간 칠레는 그가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도 여전히 군부를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언제 다시 쿠데타로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 출신으로 2000~2002년 보건장관을 지낸 그는 칠레와 미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뒤 2006~2010년 국방장관을 맡았다. 국방장관 재직 중 그는 군사정권의 잔재를 없애는 데 힘썼다.

명분으로만 밀어붙여 이룬 게 아니었다. 그는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구사했다. 군 연금제도를 개혁해 봉급이 적은 군인들에게 적절한 연금을 보장하고 군이 원하는 군사 장비와 해외 평화유지군 파병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자 군이 먼저 손을 들었다. 바첼레트는 군부 수장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다시는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받아냈다. 군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국가 과제인 군의 정치 중립을 얻어낸 것이다. 때론 강경한 원칙주의보다 부드러운 실용주의가 상대를 무장해제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군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1973년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1974~1990년 대통령을 지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2006년 12월 숨지자 독재자에게 국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군사장을 치르도록 명령했고, 애도 기간도 선포하지 않았다. 다만 군 기지에 조기를 게양하고 관에 국기를 덮을 수 있도록 했다.

전직 대통령임에도 군 기지 외에는 조기 게양을 거부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 국방장관인 비비아네 블랑로트를 유일한 정부 대표로 식장에 파견했다. 대통합과 독재에 대한 대응은 별개라는 것이다. 국민화합을 내세울 때와 원칙을 앞세울 때를 구분한 셈이다.

바첼레트는 칠레의 ‘혁명 유자녀’다.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페트가 이끄는 군부는 선거로 집권한 좌파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집권했다. 공군 장성으로 친아옌데파였던 바첼레트의 아버지 알베르토는 쿠데타 직후 군부에 끌려가 몇 달간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군부가 요구하는 해외 망명을 거부하고 버티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권력을 이용해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하지 않았다. 바첼레트가 물러난 지 2년이 흐른 뒤인 지난해 7월 칠레의 우파 정권은 알베르토를 고문한 전직 공군대령 두 명을 체포해 기소했다. 바첼레트는 비극적인 개인사와 국정 운영을 철저히 구분했다. 비록 개인사와 국가의 역사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말이다.

바첼레트는 남미의 성공한 중도 좌파 정권의 전형이다. 우파가 시행하던 시장경제 정책을 계속 추구하면서 거기서 얻은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사회보장을 합리적으로 늘려 빈부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남미 특유의 포퓰리즘을 포기하고 대신 성장과 분배의 합리적인 조화를 꾀한 것이다. 미국과도 외교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어려서 아버지가 워싱턴의 칠레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할 때 미국 생활을 적도 있다.

어려서 해외 망명을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숨진 뒤 군사 정권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상당 기간 구금 생활을 했던 그는 군부에 있던 아버지 친구들의 연줄로 1975년 해외 망명을 떠날 수 있게 됐다. 호주를 거쳐 옛 동독에 도착한 그는 칠레에서 망명한 건축가 호르헤 레오폴도 다발로스 카르테스를 만나 1977년 결혼했다. 이듬해 6월 아들을 출산한 그는 그 해 9월 베를린의 흠볼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듬해 칠레로 귀환허가를 받자 미련 없이 돌아가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983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0년 칠레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숙하다. 19세기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건너온 포도주 상인의 후예다.



외국어 능통한 의학박사 출신바첼레트는 여러 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가톨릭이 주류인 중남미 국가의 정치 지도자인데도 종교가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이다. 막내는 아버지도 다르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으며 그 뒤 사귄 의사 남자 친구와 사이에 막내를 낳았다. 이 의사는 군사정권과 관련 있는 우파 인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정과 정치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바첼레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집권 때 중남미에 강력한 중도좌파 연대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3월5일 세상을 떠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과거 이끈 강력한 반미 좌파연대를 대신할 합리적인 중도 좌파연대의 출현이 기대되는 것이다. 남미는 차베스 식의 포퓰리즘 좌파가 시들한 분위기다. 좀 더 합리적·효율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빈곤층을 줄이는 정권이 인기를 회복하는 추세다. 그런 변화의 한복판에서 바첼레트의 칠레 대통령 재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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