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천년 고도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에 취하다
Travel - 천년 고도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에 취하다
100탑의 도시, 보석의 도시, 마법의 도시, 유럽의 음악당, 유럽의 심장, 열린 역사책…. 체코의 수도 프라하엔 수많은 별칭이 있다. 웅장한 중세의 고딕식 성당부터 바로크 양식의 돔, 아르데코 스타일의 호텔에 이르기까지 제 1·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다양한 건축물과 거기에 깃든 역사와 전설, 카프카·쿤데라·드보르작·스메타나 같은 체코 예술가와 모차르트·괴테 등 유럽 각국에서 건너와 문화의 꽃을 피운 숱한 예술가의 발자취 덕분일 것이다.
여기에 프라하에서 현지 촬영한 TV미니시리즈 ‘프라하의 연인’ 선풍까지 더해져 프라하는 이제 한국인에게 한 번 가보아야 할 여행지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3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프라하를 찾은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인의 프라하 사랑에 대한 보답인가? 7월 11일 프라하행 체코항공 여객기에 탑승했을 때 기내 상영 영화는 물론 면세품 판매 책자에도 한국어가 지원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츨라프하벨 공항에 내려 1터미널로 나오자 익숙한 한국어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스터카드 라운지에도 한국 잡지가 꽂혀 있었다. 4월 대한항공이 90년 역사의 국영 체코항공의 지분 44%를 인수해 2대 주주가 되면서 생긴 변화다.
한국어 안내 표지판 곳곳에체코관광청이 마련한 투어프로그램의 주제는 ‘체코의 벨 에포크(Belle Epoque)와 프라하의 아르누보(Art Nouveau)’. ‘아름다운 시절’라는 의미의 ‘벨 에포크’가 파리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이 번창하고 풍요와 평화를 구가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가리킨다면 아르누보는 그 시절 파리에서 탄생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건축·공예 양식이 아니던가?
새로운 예술이란 뜻의 아르누보는 19세기 후반의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와 전통적 양식의 답습에 반발해 덩굴식물이나 담쟁이 등에서 빌려온 유려한 곡선을 모티브로 시각예술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 6월 부임한 미하일 브로하스가 체코관광청 서울사무소장은 “체코의 아르누보 운동은 체코 민족의 역사와 전통 문화 복원을 통해 400년 가까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5성급 포시즌호텔에 여장을 푼 뒤 밖으로 나서니 어슴푸레한 저녁을 배경으로 무성 영화에 등장할 법한 빈티지카들이 일행을 기다린다. 빨간색 1929년 산 포드 파에톤 컨버터블에 탑승했다. 체코의 벨 에포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4일 간의 일정은 코를 찌르는 휘발유 냄새,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아르누보는 무하에서 출발해 무하에서 꽃을 피웠다고들 한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1860∼1939)는 체코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는 아르누보의 대표적 예술가다. 체코 모라비아 태생으로 파리로 이주해 가난한 삽화가로 살던 무하의 운명을 바꾼 것은 연극 포스터 한장이었다. 1894년 크리스마스 시즌, 휴가를 떠난 직원들을 대신해 석판인쇄소에서 교정쇄를 봐주던 무하에게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1844~1923)의 일감이 맡겨졌다. 연극 포스터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체코 예술의 자존심 무하금박으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롱 가운을 입고 난초 화관에다 종려 나뭇가지를 든 채 단 위에 우뚝 선 사라의 포스터 ‘지스몽다’는 이듬해 연초 극장가에 나붙으면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성화(聖畵)를 연상케 하는 머리 뒤편의 광배, 옷자락을 휘감은 세련된 덩굴식물 문양, 실물 키 높이의 대형 포스터. 이전의 어떤 포스터나 그림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스타일에 파리는 열광했다.
베르나르의 전속 화가가 된 것도 잠시, 무하는 각종 광고 포스터부터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국가관 디자인까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면서 우아한 여인과 꽃이 어우러진 몽환적 이미지, 이른바 ‘무하 스타일’을 발전시켜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부와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1910년 고향으로 돌아온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정신적 통합과 체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완성한다. 1918년 마침내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하자 신생 조국의 화폐와 우표 도안을 맡기도 했다.
무하를 모르면 체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맞다. 프라하에선 시선을 보내는 곳마다 그의 흔적이 느껴진다. 바츨라프광장 주변의 갤러리와 기념품 가게, 1911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완공된 아르누보 양식의 시민회관 내 스메타나홀(매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여기서 열린다)의 천장화, 1904년 건립된 아르누보 양식의 5성급 호텔 ‘호텔 파리’의 1층에 있는 카페 ‘사라 베르나르’, 무하재단에서 운영하는 알폰스 무하 박물관, 무하의 손녀 자밀라 플로츠코바가 운영하는 무하 아트디자인부티크, 초대형 화폭을 자랑하는 ‘슬라브의 서사시’ 연작을 전시하는 프라하 외곽의 체코 국립미술관….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 한산한 국립미술관에는 체코의 근·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은 물론 로댕·모네·드가·고흐·피카소·마티스·샤갈·고갱 등 일세를 풍미한 화가며 조각가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다면 사진 촬영도 자유롭다.
문화사적으로 벨 에포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가리키지만 체코의 진정한 벨 에포크는 뭐니뭐니 해도 카를4세(1316~1378)의 재위 기간이었다. 13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 4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수도로 삼아 유럽 문화와 정치의 구심점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이름을 딴 카를 다리를 비롯해 프라하성과 왕궁, 성 비투스 성당 등이 그의 치세 때 건축됐다.
프라하에서 서북쪽으로 127㎞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온천 휴양도시 카를로비 바리 역시 카를 4세의 집권 기간에 세워졌다. 1370년 카를 4세가 사냥을 나왔다가 화살 맞은 사슴이 물웅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뒤 치유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온천을 발견한 뒤 일찌감치 휴양지로 개발됐다는 전설이다. 체코어로 ‘카를의 원천(源泉)’이라는 의미이며 독일과 가까워 ‘칼스바드’라는 독일식 지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6세기 무렵에는 테플라강 지류 계곡 양편으로 200개가 넘는 온천 건물이 세워졌을 정도로 번성했다. 각국의 왕족과 귀족, 베토벤·모차르트·톨스토이·괴테같은 유명 인사가 요양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예전보다는 물의 양이 많이 줄었으나 지금도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 13개의 온천수가 저마다 다른 온도로 솟아오른다. 탄산·유황·식염 등을 포함한 온천물의 수온은 42∼72℃. 옛날부터 위장과 대장에 이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온천 휴양도시 카를로비 바리이곳 의사들은 증상에 따라 다른 온천수를 받아 마시라는 처방을 내린다. 시 당국은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콜로나다란 구조물을 세워 각각 시장, 물레방아, 궁전콜로나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브리지델러 콜로나다는 지하 2000m에서 70℃의 온천수가 분당 2000L씩 10~15m까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장관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관광객의 발길로 늘 붐빈다.
기념품 가게마다 판매하는 각양각색의 작은 도기주전자를 구입해 13개의 온천수 음용대를 순례하듯 다니면서 뜨거운 온천물을 받아 마시는 것이 카를로비 바리 관광의 포인트다. 물맛은 쇠맛이 나면서 짭쪼롬해 마른 오징어 삶은 물과 비슷하다. 체코의 대표적 특산품인 초록색 병의 베케로프카는 베케르란 의사가 카를로비바리의 온천물에 21가지 약초를 섞어 만든 전통주로 소화불량과 식욕부진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시내 중심가의 그랜드호텔 풉은 1758년 건설된 네오바로크 양식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개관 초에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묵었다. 1946년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가 매년 7월 초 이곳에서 열린 후 마이클 더글러스, 안토니오 반데라스, 스칼렛 요한슨, 모건 프리먼, 존 트라볼타 등 이곳을 다녀갔다. 007 제임스본드 시리즈의 카지노 로얄편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구름 낀 날씨면 한낮에도 20~23℃로 서울에 비하면 덥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동화나라 같은 풍경에 취해 하루종일 발품을 판 여행자에게 시원한 맥주 한 잔은 생명의 물이나 다름없다.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 부를 만큼 맥주 사랑이 각별한 체코에서는 더욱 그렇다. 달콥쌉사름한 체코의 대표 맥주 필스너 우르켈, 텁텁하면서도 톡 쏘는 흑맥주 등 다양한 맥주의 맛과 향을 즐기려면 프라하 맥주 박물관이 제격이다. 체코의 각 지방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생산되는 30여 가지 맥주를 맛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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